미어 전투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8월 5일 프랑스군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보급로를 노린 프랑스군의 습격에 맞선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후 연합군이 철수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는 프랑스 측이 이득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2. 배경


1758년 6월,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의 지휘하에 라인 강의 서쪽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밀어붙였고 6월 23일 크레펠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이후 페르디난트는 7월 한달간 라인강 서쪽 지역에서 군사 행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하노버에서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연합군의 보급선은 전적으로 필립 프레이어 폰 임호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규모 병력이 지키고 있는 리스의 다리 하나에 의존하고 있어 매우 취약했다. 라인강 하류 전선군 신임 총사령관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스므프랑수아 드 샤베르 장군에게 이 다리를 공격하게 했다. 8월 초, 임호프 장군은 프랑스군이 다리로 접근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자 500 명을 남겨둬서 다리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병력을 리스로부터 약 2km 떨어진 미어에 방어태세를 갖췄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8월 5일, 프랑스군과 연합군은 미어에서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 사령관: 필립 프레이어 폰 임호프
  • 병력: 3,500명

4. 전투 경과


8월 5일 오전 6시, 샤베르는 베셀 근처의 숙영지에서 출발했다. 이후 4시간 동안 행군한 샤베르의 프랑스군은 디에스포트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적이 미어 마을의 고지대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샤베르는 적을 밀어내기로 결심하고 먼저 포병대에게 고지대에 주둔한 적을 향해 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임호프 장군은 두 개의 울타리를 세워놓고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군이 고지대로 진입하는 즉시 역습하기로 마음먹고 보병대에게 첫번째 울타리 뒤로 약 200보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좌익을 요격하기 위해 우익에 배치되어 있는 스톨쩬베어그 보병대를 파견했으며, 또다른 연대에게 명령을 내려 후방에서 북을 치고 있다가 적이 가까이 접근해오는 즉시 총검 돌격을 감행하게 했다.
한편 샤베르는 본대가 미어에서 적과 교전을 벌이는 사이 샤비녜 백작 휘하 별동대를 리스로 우회 기동하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그는 작전을 변경해 연합군 250명이 주둔하고 있는 미어 마을에 샤비네 백작을 직접 파견하기로 했다. 이에 샤비녜 백작이 이끄는 별동대는 마을 입구에 초소를 짓고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적과 교전해 그들을 초소에서 몰아내고 초소 너머 300여 보를 전진했다. 이에 샤베르는 브랑카스 여단에게 곧장 전방으로 침투하여 연합군 좌익과 중앙 앞에 있는 초소를 포위 섬멸하라고 명령했다. 브랑카스 여단은 도로의 우측면을 따라 약 500보를 전진했다가 적이 설치한 울타리로 인해 행군이 지연되었고 적군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들은 묵묵히 전진했고, 브랑카스 여단에 소속된 페리고드, 로얄 로레인, 그리고 포이 대대가 가장 먼저 목적지에 도착했다.
샤베르는 마을 후방 우측에 배치되어 있던 드 로이 드래곤 분대를 소환해 브랑카스 여단을 지원하게 했다. 또한 그는 적이 아군의 좌익을 점점 위협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브랑카스 보병여단에게 좌측으로 가까이 가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임호프가 스톨쩬베어그 보병대를 적의 좌익을 요격하고자 파견했으므로 그의 생각은 옳았다. 하지만 샤비녜 백작이 이끄는 별동대에 소속되어 있던 일부 민병대가 적의 거센 저항에 질러 도망치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은 진격을 거부했다. 샤베르는 이 민병대를 규합하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임호프가 파견한 스톨쩬베어그 보병대가 적의 좌익을 강타했다. 프랑스군 좌익에 배치된 리딩 여단은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무작정 발포했다가 적의 일제사격에 밀려 와해되었다. 이 꼴을 본 샤베르는 드 로이 드래곤 분대를 미어 마을 후방의 작은 평원으로 옮겼다. 그들은 와해된 아군 좌익을 추격하는 연합군을 순간적으로 저지했다. 드래곤 분대가 적을 저지하는 사이, 좌익 프랑스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디에스포트 마을의 고지에 야전 대포 2대를 설치했다.
이후 샤베르는 더이상 미어에서 전투를 이어가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디에스포드로 퇴각했다. 그후 그의 군단은 한 시간 동안 디에스포드에서 부상자들을 수송할 마차들을 준비한 뒤 다시 베젤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미어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517명의 사상자 및 포로가 발생했고 대포 10문을 잃어버렸다. 반면 연합군은 2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렇게 연합군은 리스 다리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으나 페르디난트는 7월 23일의 잔더스하우젠 전투에 이어 이번 전투 소식을 전해듣고 프랑스군이 노골적으로 아군의 보급로를 노리고 있다는 걸 파악했다. 이에 그는 8월 8일에 라인강을 건너 하노버로 귀환하기로 결심했고, 연합군은 8월 9일부터 10일까지 라인강을 건너 하노버로 철수한다. 이로서 프랑스는 본토가 연합군에게 짓밟힐 위기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