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펠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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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6월 23일 하노버 크레펠트에서 프랑스군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해 라인강 너머로 내몰고 프랑스군에게 빼앗겼던 하노버 영토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2. 배경
1757년 11월 5일, 프랑스군은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완패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대거 본국으로 퇴각했고, 그 전까지 프랑스군의 공세로 수세에 몰려있던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은 이 때를 틈타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 1758년 초,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연합군은 프랑스군에게 빼앗겼던 하노버 영토들을 대거 확보하고 프랑스군을 처음으로라인강 너머로 밀어냈다. 이후 1758년 6월 초, 페르디난트는 군대를 이끌고 라인강을 건너 라인강 서쪽 독일 영토에서 작전을 개시, 프랑스군과 라인강 인근에서 대치했다.
한편 프랑스는 작년에 원정군 사령관으로 부임해서 하노버를 철저하게 약탈해 하노버 국민들에게 반감을 샀고 뒤이은 연합군의 반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버린 리슐리외 공작 루이 프랑수아 아르망 드 비뉴르 뒤 플레시스를 경질하고 클레르몽 백작 루이 드 부르봉-콩데를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연합군의 공세를 저지해야 할 임무를 맡은 클레르몽 백작은 크레펠트에서 적을 막아내기로 했다. 크레펠트에는 인근에 흐르는 라인강에 세워진 운하가 있었다. 이 운하는 장벽이 동과 서로 길게 쳐져 있어 일종의 자연적인 요새로 사용가능했다. 클레르몽 백작은 이 운하를 이용해 적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려 했다. 얼마 후, 페르디난트는 크레펠트에 적이 주둔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즉시 이들을 격퇴하기로 결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 사령관: 클레르몽 백작 루이 드 부르봉-콩데
- 병력: 보병 34,000명, 기병 13,000명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
- 병력: 보병 21,700명, 기병 8,800명, 경기병 1,400명, 포병 1,200명
4. 전투 경과
4.1. 페르디난트의 계획
페르디난트는 주력군을 앙라트로 이동시킨 뒤 적의 진영을 살펴보고는 프랑스군 좌익을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적이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면 곤란하므로, 그는 좌익 부대로 하여금 적의 우익을 공격하는 흉내를 내 적의 시선을 우익 쪽에 쏠리게 만들기로 했다. 그러면서 우익 부대를 상크-퇴니스 언덕 고지에 새벽까지 배치한 뒤 배치가 완료되는 대로 적의 좌익을 기습하기로 했다. 6월 22일 늦은 저녁,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페르디난트에게 적의 진영을 정찰한 사안에 대해 보고했다. 그후 페르디난트는 그의 군대 한 가운데에 있는 텐트에서 잠깐 잠을 잤다. 이윽고 6월 23일 새벽 2시,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텐트에 장군과 대령들을 집결시켰다. 그는 자신의 장군들에게 날이 밝는 대로 적을 공격할 것임을 밝히면서 자신의 작전을 설명했다. 오전 4시, 브라운슈바이크 보병 1개 대대에게 숙영지와 보급품들을 지키게 한 페르디난트는 군대를 이끌고 진영을 떠났다.
4.2. 연합군의 접근
연합군의 좌익은 13개 보병대대, 23개 기병대대, 12개 야포, 6개 중포, 크람 소령 휘하의 척탄병 1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중장이 지휘했다. 이들은 크레펠트 쪽으로 진격하다가 마을에서 약 1500m 떨어진 곳에서 정지했다. 또한 극좌익에는 후사르 분대, 예거 기병대들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프랑스 우익에 견제 공세를 실시해 적의 시선을 잡아끌 계획이었다. 한편 페르디난트 본인이 직접 지휘하는 연합군 우익은 24개 보병대대와 32개 기병대대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슐렌버그 중위와 슐렌부르크 중위 휘하의 척탄병 2개 대대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아군 좌익부대가 적의 시선을 잡아 끄는 사이 멀리 기동하여 상크-퇴니스 언덕 고지를 점거한 후 적의 좌익을 기습할 계획이었다. 또한 연합군의 중앙에는 6개 보병대대와 6개 기병대대, 6개 야전포대가 배치되어 중앙에 배치된 프랑스군을 견제 공격하기로 했다.
오전 6시, 크레펠트 인근에 배치되었던 프랑스 척후병들이 연합군 군단이 크레펠트로 접근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를 지휘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클레르몽 백작은 연합군이 방비가 잘 된 곳에 무작정 공격하려 한다는 걸 믿지 않고 그들의 진격에 대한 모든 보고를 무시했다. 이무렵 상크-퇴니스에 도착한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홀슈타인-고토프 공작 프린츠 게오르크 루트비히, 그리고 오베르 장군과 함께 언덕 고지에 올라갔다. 페르디난트는 프랑스군의 위치를 조사한 뒤 오베르 장군에게 아군 중앙 부대 지휘를 맡긴 뒤 우익 부대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는 우익이 공세의 주력으로서 적의 좌익을 밀어붙이는 동안 중앙과 좌익은 적을 붙들어놓기를 희망했다.
페르디난트의 명령이 내려지자, 우익 부대는 오전 8시에 보스트로 진격하여 앙라트 근방의 프랑스 좌익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우익 보병대를 지휘했고 홀슈타인-고토프 공작은 기병대를 지휘했다. 페르디난트는 척탄병들과 함께 보스트 마을로 통하는 도로로 진군했다. 이들의 공세에 처음 맞선 프랑스군 부대는 상크-퇴스트 근교의 전초 기지에 주둔한 척후부대였으나 곧 물러났다. 이때 슈페르켄 장군은 연합군 좌익 부대를 이끌고 쿨루드 습지를 따라 크레펠트 쪽으로 천천히 진군했다.
오전 9시, 크레르몽 백작은 상크-퇴니스의 척후병 부대로부터 적이 공격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클레르몽 백작은 적이 무모하게도 운하에 세워진 장벽들을 정면 돌파하는 멍청한 짓을 할리 없다고 여겼으며 단지 아군을 압박하려고 드는 것 뿐이라고 여기고 전군에 대기 명령만 내릴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슈페르켄이 이끄는 연합군 좌익부대는 크레펠트 서쪽에 배치되었고 연합군 중앙부대는 상크-퇴니스 남쪽에 배치되었다. 또한 연합군 우익부대는 덤불, 울타리, 농장 등으로 뒤덮인 지형을 힙겹개 진군하여 보스트 마을을 우회하여 진군했다. 그들은 버슐스바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질퍽거리는 도랑을 건너야 했다. 이로 인해 페르디난트가 지휘하는 연합군 우익의 진격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오전10시, 클레르몽 백작은 여러 개의 연합군 군단이 그의 진영으로 행진하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진영 앞에 군대를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클레르몽은 중앙에 대규모 보병대를 배치했고 그 뒤에 2개 종대의 기병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좌익에는 총기병대와 드래곤 부대가 배치되었고 우익에는 프랑스 유탄병부대가 배치되었다. 또한 그는 전방의 안라트에 4개 보병대대와 포병대를 배치했다.
정오 무렵, 오베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 포병대가 안라트에 설치된 적 포병대와 잠시 포격전을 벌인 끝에 격파했다. 이때 안라트에 주둔한 4개 보병대대는 적의 대규모 병력이 아군 좌익을 향해 진군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즉시 사령부에 이 사실을 알린 후 아군 좌익부대와 합세했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도랑을 건너 안라트 인근의 숲을 건넜다. 그후 그는 천천히 안라트와 빌리히 사이의 평지에 그의 군단을 배치했다. 이후 그는 장교들을 교회 첨탑에 올라가서 가장 적절한 공격 지점을 확인하게 했다. 돌아온 장교들로부터 공격 지점을 보고받은 페르디난트는 마침내 우익 부대에게 적의 측면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4.3. 연합군의 측면 공격
오후 1시경, 크레펠트 서쪽과 상크-퇴니스 남쪽 일대에서 연합군 좌익과 우익의 포병대가 포화를 퍼부어댔다. 클레르몽 백작은 적의 거센 포격에 대항하기 위해 부하들에게 무장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지만 그 외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고 점심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연합군 우익은 포병대를 전진시켜 적의 대열에 포격을 가하게 하고, 후사르 기병대로 하여금 프랑스군의 좌측면을 공격하게 했으며 적을 향해 전진하는 보병대의 우측 후방에 보크 장군이 이끄는 드래곤 부대를 배치시켰다.
오후 2시, 프란츠 크사버(일명 크사크 왕자)가 이끄는 작센군이 도착했다. 이에 클레르몽 백작은 가장 심각한 공격을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 우익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을 우익 쪽으로 파견했다. 한편 페르디난트의 연합군 우익은 배치를 완료한 뒤 프랑스군 좌익을 향한 맹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 포병대는 급히 맞대응했으나 적의 고센 포격을 버티지 못하고 금세 무너졌고, 프랑스군 좌익은 전투 개시 30분만에 허물어질 위기에 몰렸다.
오후 3시경, 프랑스 좌익 방향에서 대포 소리가 들려오자, 크사버는 클레르몽 백작에게 적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술을 본따서 일부 병력에게 견제 공격을 하면서 다른 측면에 주공을 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 경우에는 적의 주공은 프랑스군 좌익을 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클레르몽 백작은 그의 주장을 귀기울여 듣지 않았지만 나중에 안라트에서 달려온 전령의 급보를 접하자, 비로소 페르디난트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급히 생제르맹 백작 루이 클로드에게 15개 보병대대를 맡겨 좌익을 구원하게 했으며 30개 기병 대대를 추가로 파견해 생제르맹 백작을 지원하게 했다.
이후 연합군 우익은 홀터 농장에 포진한 적을 상대로 45분간 격전을 치른 끝에 적을 차츰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진격을 재개하기 위해 군대를 재편성하기도 전에 생제르맹 사단이 도착했다. 생제르맹 백작은 15개 보병대대를 이끌고 홀터 농장을 점거한 적을 향해 돌격을 개시했고, 양측은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 한편 페르디난트는 안라트의 탑에서 전황을 살펴보고 있던 장교로부터 프랑스군이 피스켈른에서 진군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페르디난트는 이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적을 하루빨리 끝장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와 거의 동시에, 그는 그의 보병들이 생제르맹 사단과 맞붙고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몇백보 쯤 떨어진 곳에서 비밀 통로가 발견되었다는 두번째 전갈을 받았다. 이에 페르디난트는 그 비밀통로에 병력을 투입해 적의 후방을 요격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연합군 좌익을 이끄는 슈페르켄 중장은 우익 부대의 공격이 성공할 지를 확신하지 못해 눈앞의 프랑스 우익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페르디난트의 부관 중 한 명인 뷔로우 소령은 그에게 적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슈페르켄은 듣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후사르 기병이 우익 부대의 초기 공격이 격퇴되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스뢰르켄은 즉시 퇴각 명령을 내리고 하노버리안 보병 근위대 2개 대대를 중앙에 파견해 그들을 지원하게 했다. 한편 클레르몽 백작은 크레펠트 근처와 프랑스 중앙 부대 후방에 배치된 예비군 18개 보병대대를 아군 좌익으로 보내 생제르맹 백작을 돕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좌익 부대가 있는 곳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오후 5시경, 페르디난트로부터 새로 발견된 비밀 통로를 따라 프랑스 보병대의 후방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접수받은 홀슈타인-고트로프 왕자는 이에 따라 기병대를 이끌고 비밀 통로를 지나 북동쪽으로 전진해 셍제르망 보병대 후방에 나타났다. 프랑스군은 갑자기 자신들 후방에서 출현한 적을 보고 공황 상태에 빠져 삽시간에 붕괴되었고, 마침내 연합군은 전투 개시 3시간 만에 프랑스군 좌익을 분쇄시키는 데 성공했다. 얼마 후 아군 우익이 적 좌익부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은 오베르 장군은 철수를 준비하고 있던 슈페르켄에게 전령을 띄워 이 소식을 알린 뒤 휘하 중앙 부대에게 적을 향한 본격적인 공세를 개시하게 했다. 프랑스군은 측면이 뚫린 것에 동요해 이러한 적의 공세를 막아낼 전의를 상실했고, 오베르 장군의 보병대는 적이 점거하고 있던 란트웨르를 탈취했다.
4.4. 양측 기병대의 격돌
이렇듯 프랑스군이 총체적인 붕괴로 이어질 위기에 몰렸을 때 기소르 백작이 이끄는 총기병대가 아군 좌익 진영에 도착했다. 기소르 백작은 휘하 총기병대를 이끌고 후퇴하는 아군을 추격하는 적을 향해 일제사격을 해 기세를 꺾어놓은 뒤 부하들의 선두에 서서 돌격했다. 이들의 맹렬한 기세에 짓눌린 연합군 보병대는 후퇴했고, 페르디난트는 급히 홀슈타인-고토프 공작의 기병대를 투입시켰다. 이후 양측의 정예 기병대는 격렬하게 격돌했으나 승부가 쉽게 가려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생제르맹 백작은 병사들을 가까스로 수습해 새 대열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아군이 총체적인 파국을 당하는 걸 면하게 해준 기소르 백작은 불행히도 적과 교전하던 중 치명상을 입고 전사했다
4.5. 프랑스군의 퇴각
오후 6시 30분, 연합군 우익과 중앙 부대가 승세를 타고 적을 향해 밀어붙였다. 작센의 크사버 왕자가 척탄병 여단을 규합해 반격에 나설 준비를 했고 앞서 파견되었던 예비군 18개 보병대대도 뒤늦게나마 좌익 부대와 합세했다. 그러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클레르몽 백작은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크사버 왕자는 피스켈른의 남서쪽 도랑을 따라 둔덕을 점령해 적의 추격을 저지했고 생제르맹 백작 역시 후위부대를 맡아 충분한 방어태세를 갖춰 본군의 후퇴를 성공적으로 엄호했다.
오후 7시경, 그때까지 꾸물거리고 있던 슈페르켄 장군은 마침내 자신의 좌익 몇개 보병대대를 란트웨르 쪽으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추격을 피해 멀리 후퇴했다. 그날 늦은 저녁 페르디난트가 직접 슈페르켄 장군을 만나러 갔을 때, 슈페르켄의 연합군 좌익 부대는 여전히 크레펠트 근처에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그의 소극적인 태도를 질타하며 그의 보병대를 란트웨르로 진격시키고 기병대로 하여금 적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슈페르켄은 그 명령을 따랐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만약 슈페르켄이 아군 우익과 중앙부대가 밀어붙였을 때 함께 했더라면, 연합군은 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오후 9시, 연합군은 전투를 마무리하고 숙영지로 돌아갔고 대부분의 부상자들을 크레펠트 마을로 이송했다. 이리하여 크레펠트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약 4,2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는데 그 중 2천명은 생제르맹 사단에서 발생했다. 또한 프랑스 총기병대에서 약 60명의 장교와 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들의 지휘관은 기소르 백작이 전사했다. 그리고 8개의 야전 대포가 적에게 탈취되었고, 2개의 연대기와 많은 장병들 역시 적에게 포획되었다. 한편 연합군은 10명의 장교와 302명의 병사들이 죽었고 40명의 장교와 1,182명의 병사들이 부상당했다. 크레펠트 전투에서 무능한 면모를 여과없이 드러낸 클레르몽 백작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정부에 자신의 지휘권을 다른 사람에게 이양해주길 청했고. 정부는 이 요청을 수락한 뒤 지휘권을 콩타드 후작 루이 조르주 에라스므에게 이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