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돈

 



1. 소개
2. 일생
3. 평가


1. 소개


章惇
1035 ~ 1106
송나라 인종, 영종, 신종, 철종, 휘종 대의 문인이자 철종대의 재상. 자는 자후(子厚)이다.

2. 일생


송나라 건주 포성 사람이지만 소주 지역으로 옮겨 살았다. 어릴때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왕안석, 사마광, 소동파 형제 등 뛰어난 이들과 친구였다. 인종 가우 4년(1059년), 소주에서 상경해 24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고 진사가 되었다. 이후 1069년 희녕 초, 친구 왕안석이 신종에게 발탁되어 재상이 되자 편수삼사조례관에 임명되었다. 장돈은 왕안석을 지지한 신법파였다. 그러나 왕안석이 급격하게 신법을 추진하자 이견을 보였고 왕안석과는 정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병사를 이용해 변경지역 수백 리를 개척하여 원주를 설치하는 등의 행정적인 성과를 이뤄냈다.
신종 원풍 2년(1079년) 참지정사에 올랐지만, 장돈은 신법파와 구법파의 당쟁에 연루되어 채주지주로 좌천되었고 진주, 정주 등지로 옮겨다녀야만 했다. 그러다가 왕안석이 실각했고 신종이 사망했다. 이후 신종의 어린 장남 철종이 즉위하고 선인태후 고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선인태후의 신임을 받던 사마광, 소식 등이 조정에 대거 포진하게 되면서 신종 시기동안 당쟁에 휘말려 유배되거나 한직으로 밀려난 관료들을 개봉으로 복귀시켰는데 장돈 역시 지추밀원사에 임명되어 개봉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철저한 원칙론자이자 신법파였던 장돈은 당시 선인태후와 사마광 등 원우당파(구법당)의 신법 폐지 조치들에는 이견을 보였고 특히 면역법이 폐지됨을 강하게 반대했다. 따라서 장돈은 유지, 소식 등에게 역으로 탄핵을 당해 다시 여주지주로 폄직되어 쫓겨났다.
선인태후가 1093년 죽고 장성한 철종이 친정하게 되면서 장돈은 상서좌복야 겸 문하시랑에 제수되고 재상이 되었다. 이때 그는 채변, 채경 등과 함께 선인태후 섭정기였던 원우 연간 이전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조치들을 추진했다. 따라서 이때 청묘법 등의 신종 대의 옛 신법들이 되살아났고, 장돈 등은 탄핵 등을 이용해 원우당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 사건들을 일으켰다. 이런 조치들은 과거 신종 사후 집권한 사마광, 소동파 형제 등이 추진한 정책적, 행정적 조치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심했고, 당쟁을 과거보다 격화시켰다.[1][2] 그는 이후 철종이 친정한 소성 연간동안 조정의 실권을 가지고 국정을 운영했다. 이때 장돈은 서하의 고토를 반환하는 일에 반대하고 세사(歲賜)를 끊어버리도록 조치를 취하게 했다. 따라서 서하와 이 문제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100년 1월 25살의 젊은 철종이 갑자기 요절하면서 후화원에서 신종의 정비 흠성헌숙황후 상씨 주재 아래 후계건저가 열렸을 당시 예율에 어긋남과 본래부터 여색잡기, 음담패설, 유흥 등의 까닭에 황제감이 아닌 점을 이유로 단왕 조길의 즉위를 반대했다. 이때 일어난 일은 <송사> 본기 휘종편에도 자세히 나와있는데 장돈은 단왕 조길의 행동거지를 일찍부터 알았기에 예법상 아니됨을 건너뛰더라도 황제감이 아니었던 휘종의 즉위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장돈은 본래부터 정적이 많았으며 신법파 내부에서도 증포와 같이 사이가 틀어지고 시기했던 이들이 많아서 오히려 그의 의견은 무시되고 휘종이 즉위하게 된다.
휘종이 즉위한 직후, 그는 죽은 선황 철종의 장례를 책임지는 산릉역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장돈은 이때 철종의 관이 운구되던 날 비가 많이 와서 행렬이 지체될 당시 내린 결정 탓에 증포 등 정적들에게 꼬투리가 잡혀 탄핵되었다. 당시 탄핵 사유는 상여꾼들이 철종의 관을 진흙탕 위에 놓고 유숙해서 휘종과 황실을 능멸한 죄였다. 따라서 철종 장례를 총책임지는 그는 이 일로 탄핵되어 서주단련부사로 폄직되었다. 이후 목주,월주, 호주 등지로 쫓겨나듯 돌아다니면서 험한 유배지에서 고생하다가 1106년 사망했다.

3. 평가


장돈은 그 재능이 뛰어났고 계략이 밝고 행정처리 능력이 탁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철저한 원칙론자였던 장돈은 젊은 시절부터 차갑고 매몰찬 성품과 냉철한 일처리 때문에 재능이 인정받았음에도 구법, 신법 모두에 적이 많았다. 이는 장돈이 휘종의 무능함을 일찍 파악하고 그의 즉위를 강력 반대했음에도 같은 신법파였던 증포, 채변 등에게 상태후의 무리한 후계선정에서 동의는커녕 배제된 이유였다. 게다가 후대에서는 왠지 간신으로 찍혀서 송사 간신전에 기록되었다.
[1] 이 당시 장돈, 채경, 채변 등의 조치들을 보면 원우당인들의 조치들보다 심했다. 이미 죽은 사마광의 경우에는 위패가 훼손되었으며 관직이 낮춰지고 부관참시될 뻔했다. 또 《자치통감》 역시 사마광이 썼다고 해서 없애려고 했다. 아울러 개봉에 있던 상청저상궁 석비는 소식이 썼다는 이유로 훼손되고 다시 채경의 글로 교체시켰고 선인태후 섭정 기간동안 제작된 전국 각지의 비각 기사들도 죄다 없애버렸다. 이런 보복조치들은 사마광, 소식 등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조정에서는 대대적인 인사조치들도 일어났고 엄격한 조사를 거쳐 약 800명에 대해서 그 경중에 따라 좌천부터 영원히 관직에서 축출, 관직진출 연좌 등 강한 처벌조치들이 벌어졌다.[2] 이런 보복 조치와 계략 때문에 장돈은 정적이 많았다. 더해서 장돈은 본래부터 원칙론자이자 냉철하고 차가운 성격이었기에 같은 신법당파라고 하더라도 증포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