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성헌숙황후 상씨

 


'''북송의 황후
欽聖憲肅皇后 | 흠성헌숙황후
'''
'''시호'''
흠성헌숙황후(欽聖憲肅皇后)
''''''
상씨(向氏)[1]
'''출생'''
1046년
'''사망'''
1101년
'''재위'''
북송의 황후
1067년 ~ 1085년
북송의 황태후
1085년 ~ 1101년
'''배우자'''
신종(神宗)
'''증조부'''
상민중(向敏中)
'''부친'''
상경(向經)
1. 소개
2. 생애
2.1. 황후, 황태후 시절
2.2. 후계 선정과 사망
3. 자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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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송나라의 제 6대 황제인 신종의 정실 황후. 융우황태후(隆祐皇太后) 상씨, 태황태후(太皇太后) 상씨, 상태후라고도 불린다.
후술하지만 '''조송 역사상의 많은 간신이나 결국에는 송나라를 갈아버린 외적들조차하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행한 송나라 멸망의 원흉.'''

2. 생애



2.1. 황후, 황태후 시절


흠성헌숙황후는 북송의 재상 상민중(向敏中)의 증손녀로 하내(河內) 사람[2]이다. 영종 치평 3년(1066년)에 영종의 적장자인 황태자 조욱과 혼인했으며 안국부인(安國夫人)이 되었다. 이후 치평 4년(1067년) 영종이 붕어하고 신종이 즉위하자 황후(皇后)가 되었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서자인 연안군왕 조후가 즉위하고 난 뒤, 시어머니 선인태후 고씨철종을 수렴청정하였을 때 융우황태후(隆祐皇太后)가 되고 선인태후 고씨의 명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다. 이후 철종이 1100년 25살의 나이로 후사 없이 요절하자 황실 최고어른의 자격으로 수렴을 치고 곡을 한 뒤, 재상 장돈과 함께 북송의 수도 내 궁궐 중 후화원에서 조정 중신들을 모아 후계논의를 벌였다.

2.2. 후계 선정과 사망


철종의 아들 헌민태자 조무가 어린 나이에 요절한 까닭에 예법(에율)상 적자계승원칙은 적용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후화원에서 열린 후계논의는 자연스레 철종의 형제들, 즉 당시 생존에 있던 선대 신종의 아들 중 선정해야했다. 철종 사망 당시 철종의 동복,이복형제들은 5명이 남았는데 신왕 조필, 단왕 조길, 연왕 조오, 간왕 조사, 목왕 조시가 있었다. 이중 송나라 제위계승 예법상 거의 맹인과 다름없던 신왕 조필[3]을 건너뛴다면, 철종의 동복동생이자 덕비 주씨[4]의 차남인 간왕 조사[5]가 이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 서로의 이해관계들이 얽히고, 원래부터 덕비 주씨와 사이가 안 좋았던 상태후가 철종과 간왕의 친모 덕비 주씨를 싫어하던 감정까지 섞이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상태후: “국가가 불행하여, 대행 황제께서 자식이 없으니, 천하의 일은 모름지기 서둘러 정해야 합니다.”

장돈: “예율에 따라 당연히 동복동생이신 간왕을 세워야 합니다.”

상태후: “ 신종의 여러 아들 중에, 신왕이 가장 연장자인데 눈병이 있고, 그 다음이 단왕이니 단왕을 당연히 세워야 할 것이오.”

상태후가 예율, 황실법도 등을 모두 무시하고 처음부터 단왕을 언급하자 조정 대신의 대표이자 재상인 장돈은 상태후 앞에서 크게 목소리를 높이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게 된다.

장돈: “연수로 따지면 곧 신왕께서 연장자이시고, 예율에 따르면 곧 모제(동복동생)이신 간왕을 당연히 세워야 합니다!”

상태후: “모두 신종의 아들이고, 이와같이 분별에 어려움이 없는데 차례에 의해 단왕을 당연히 세워야 하오!”

증포: “장돈이 신 등과 더불어 서로 의논한 적도 없었으니, 황태후마마의 성유[6]

는 당연하옵니다!”

채변[7]

:”성지[8]를 모으고 따라야 합니다.”

허장상: “성지를 모으고 따라야 합니다.”

상태후: “내가 보기에 이 아이는 괜찮소. 인물도 잘생기고 말끔하며 선제께서 일찍이 내게 말씀하시길, 단왕은 복되고 오래 살 수명을 가진 관상을 가지고 있고, 또 인자하고 효행도 있다고 했습니다! 각 왕들과는 같지 않다고도 하셨소![9]

단왕을 반대하는 장돈 등이 “이분께서는 행위가 경박하고 온건하며 묵직하지 못 하옵니다. 성숙한 정치가가 되는 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사옵니다.”라고 반대했지만[10]선인태후 사후 상태후 쪽을 지지하던 신하들과 신법파였던 증포까지 상태후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단왕 조길이 즉위하게 된다.
이처럼 철종 사후 상태후 주도로 재상 장돈, 지추밀원 증포, 상서좌승 채변, 중서문하시랑 허장상 등이 논의한 후계건저회외는 과거 선인태후 고씨가 예율과 예법에 따라 9살밖에 안 된 연안군왕 조용[11]을 태자로 삼아 즉위시킨 것과는 너무 달랐다. 과거 선인태후 고씨는 영종과 자신의 아들들(신종의 동복형제들)이 성년이었고 손자들이 어렸기에 신종의 뒤를 영종의 아들[12] 중 한명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고태후는 자신의 생각을 거두고 황실의 예법을 따라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예율대로 신종의 어린 장자를 후계로 해야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반면 신종 생전부터 철종의 생모 덕비 주씨와 사이가 굉장히 나빴고 또 다시 덕비 주씨 소생이 즉위하는 것만은 막으려고 했던[13] 상태후는 이와 달랐다. 그녀는 회의 처음부터 연장자순으로 후계를 주장하면서 철종 생전에 자신의 앞에서 예의바르고 말끔한 차림, 말솜씨, 시무재능으로 총애를 받은 단왕을 미리 생각해놨고, 주변의 반대에도 자신의 주장만을 밀어붙였다. 원래부터 상태후를 지지하던 신하들은 당연히 그 의견을 좇았지만, 평소 같은 신법당파였어도 장돈을 시기해왔던 지추밀원 증포가 장돈과 상의한 적이 없다면서 오히려 상태후의 편을 들었고, 이런 상황을 보면서 상태후의 뜻이 옳다고 하는 대신들이 합세해 장돈 등 소수의 반대 의견이 이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14]
이처럼 여러모에서 선인태후 고씨와 흠성헌숙황후 상씨는 후계논의에서 다른 태도를 취했고, 철종 사후 건저회의는 처음부터 다른 당파간의 이해관계, 같은 당파 내부에서도 있던 관계, 황실의 세력싸움, 상태후 개인이 신종의 아들 중 단왕 조길을 총애한 사심까지 결합되어 있었다. 문제는 단왕 조길이 나이는 철종의 동복, 이복형제 중 신왕 다음이었지만, 상태후의 생각과 달리 가장 황제의 자질이 없었다는 점이었다.[15] 그는 상태후 앞에서는 예의바르고 멋쟁이인데다 뛰어난 문예 재능을 지닌 인물로 평가를 받았지만, 실상은 10대초반부터 경성 내에서 유흥, 여색잡기 등으로 유명했다[16]. 하지만 이런 점을 알았음에도 흠성헌숙황후 상씨와, 증포, 상씨를 지지한 신하들은 훗날 벌어질 엄청난 일을 생각해봤을 때,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했다.[17]
흠성헌숙황후 상씨는 휘종이 즉위한 이후, 태황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면서 일부 구법당파 관료들을 복귀시키고, 구법당파와 신법당파 사이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구법당의 한충언, 신법당의 증포를 재상으로 삼는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또 철종의 첫번째 황후였지만 1099년 철종에 의해 폐출된 소자성헌황후 맹씨를 다시 복권시켜 황태후로 올려 삼았다.
휘종 즉위 후 1년 뒤인 1101년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3. 자녀


흠성헌숙황후는 신종의 정실이었지만 사이에서 외동딸 주국장공주(周國長公主)만을 얻었다. 주국장공주는 1067년에 태어났지만 고작 11살의 나이에 1078년 요절하였고 이복동생인 휘종 때 숙회장제희(淑懷長帝姬)로 개칭되었다.

4. 둘러보기






[1] 향할 향, 성씨 상.[2] 오늘날의 하남(河南) 심양(沁陽).[3] 신종과 혜목현비 무씨 사이에서 9남으로 태어났다. 철종이 사망할 당시 생존한 신종의 황자 중 가장 연장자였으나, 눈병이 심해 앞에 있는 사람을 거의 구분하지 못 했다. 따라서 그는 거의 맹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다.[4] 흠성황후 주씨로 추존되었다.[5] 신종과 덕비 주씨(흠성황후로 추존) 사이에서 13남으로 태어난 철종의 동복동생.[6] 황태후, 황제, 왕의 가르침[7] 휘종때 간신이자 재상인 채경의 친동생. 신법파의 중진이었으며 왕안석의 사위였다. 그는 형 채경과는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8] 황태후 또는 황제의 의견[9] 상태후가 이렇게 주장한 발언을 신종이 했다는 근거가 없다. 신종은 애초에 휘종이 10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으니. 하지만 그녀의 주장처럼 황궁 안에서 눈에 보이는 단왕 조길의 모습은 밖에서의 모습과 달랐고, 단왕의 예술가적 재능과 외모, 복장 등을 이유로 상태후가 아낀건 사실이었다. 당시 단왕 조길은 뛰어난 회화실력, 시무뿐만 아니라 일찍이 상태후를 만난 자리에서 보여준 예의바른 태도로 신종의 아들 중에서 상태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10] 장돈은 이때 端王輕佻 不可以君天下(단왕은 성품이 가벼워서 황제가 되시기에는 불가합니다)라고 상태후 앞에서 말했다고 한다.[11] 황태자 책봉 후 휘를 후로 바꿨다.[12] 영종은 정실인 선인태후 고씨와의 사이에서만 4남 4녀 중 4남 2녀를 얻었다. 어머니의 신원이 정확하지 않은 공주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황후와의 사이에서 얻은 영종은 후궁 중 어느 누구에게도 비,빈을 내리지 않았던 황제이기도 했다. 선인태후 고씨가 이때 장남 신종의 뒤를 이을 인물로 고려한 성년이 된 아들들은 오영왕(吳榮王) 조호(趙顥), 익단헌왕(益端獻王) 조군(趙頵)이었다.[13] 상태후는 자신이 신종의 정실임에도 덕비 주씨의 소생이 철종뿐만 아니라 그 동복동생까지 황제가 된다는 것은 덕비 주씨가 사실상 정실과 다름없어진다고 생각해서 더욱 반대해왔다.[14] 왕안석의 문하생 증포는 신종 연간 시역법을 강하게 비난해 왕안석이 물러나는데 결정타를 날렸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등장할 채경의 재기에도 큰 기여를 했는데 지방으로 좌천된 채경을 다시금 추천해 재상까지 오르게 도와준 인물이기도 하다.[15] 상태후는 증포를 ‘천고대골의 선비’라고 부르며 칭찬하기도 했다. 증포의 학문적 지식과 재능이 뛰어났고, 남풍칠증(南豐七曾) 중 한명이었기에 때문이다. 하지만 <송사>’간신전’에 수록되어 있는 증포가 그녀의 판단처럼 이런 칭호를 받아도 되는 지에 대해서는 평이 상당히 엇갈린다. 증포는 철종 생전에 자신을 추천해주지 않았다는 사적인 원한 때문에 장돈을 시기했고 구양비 등이 자신과 처남에게 그냥 눈에 거슬린다하여 모함하고 탄핵한 행적 등을 보였다. 더해서 훗날 채경에게 탄핵되어 쫓겨난 이유도 사적으로 권한을 남용하고 작록을 황제 허락없이 측근들에게 하사한 사실과 뇌물을 받는 등의 개인적 비리 탓이 컸기 때문이다.[16] 단왕 조길은 사저에 나와 살 당시 영종의 딸인 고모 촉국공주와 왕선 부부의 집에서 거처했다. 그런데 단왕은 뛰어난 서화가인 고모부 왕선을 유독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고 복사판처럼 살았다. 그런데 문제는 왕선이라는 이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어도 집에 무희를 두고 살면서 여러 첩들을 거느리고 힐방루와 같은 기방들을 돌고 생활 자체도 사치스러운 삶을 보낸 인물이라는 점이었다. 따라서 10대 초반때부터 고모부 왕선에게 여자와 노는 법, 잠자리 기술 등을 힐방루에서 어울리며 배웠고, 글공부는 좋아하지 않고 그림 그리기, 축국, 음담패설을 하는 등의 행실로 유명했다.[17] 당장 상태후 사후 휘종때 내시 동관과 후궁 유씨의 추천으로 채경이 등장했다. 채경은 증포 등에게 신용받지 못했다가 복귀 이후 공교롭게도 증포가 그를 다시 추천해서 이후 재상까지 올랐다. 그리고 채경은 휘종의 신임을 얻어 증포를 포함하여 구법당파, 신법당파 모두 채경에 반대된다면 쫓아냈으며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여 관직 진출을 막았다. 더해서 이때 상태후가 복권시킨 맹황후도 다시 폐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