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포
1. 소개
曾布
1036년 11월 3일 - 1107년 8월 21일
송나라 인종, 영종, 신종, 철종, 휘종 대의 대신이자 간신[1] . 자는 자선(子宣)이며 아버지는 증역점(曾易占), 이복 형은 증공(曾鞏)이다. 시호는 문숙(文肅). 증공(曾鞏), 증조(曾肇), 증우(曾紆), 증굉(曾紘), 증협(曾協), 증돈(曾敦)과 더불어 남풍칠증(南豐七曾)으로 불리고 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북송 강서(江西) 남풍(南豐) 사람으로 증역점(曾易占)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때 부친 증역점이 여의고 부친상을 치뤘으며 이후 형인 증공(曾鞏)을 따라 수학했다. 이후 증공과 함께 과거 진사시에 응시하여 인종 가우(嘉祐) 2년(1057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선주사호참군(宣州司戶參軍), 회인현령(懷仁縣令)을 역임했다.
2.2. 희녕변법과 좌천
증포는 영종의 뒤를 이은 신종 때인 희녕(熙寧) 2년 왕안석, 한유의 추천을 받아 33세의 나이에 개봉으로 올라왔고 중용되었다. 이때 증포는 신법파의 일원 중 여혜경과 함께 왕안석의 신임을 얻었고 신법이라고 불리는 희녕변법의 주요 정책들을 입안하고 추진하는데 힘을 보탰다.
하지만 소위 신법이라고 불리는 개혁이 시행된 지 3년이 되던 무렵부터 잇따라 발생하는 부작용들로 조정대신들과 지방관리들의 상소가 올라오며 왕안석을 중심으로 하는 신법파와 사마광을 중심으로 하는 구법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신종에게 위계종이 “신법으로 인해 온갖 재화들이 수도의 창고에만 쌓여 가고 시중 물가는 수시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오히려 대지주와 간사한 상인들은 가격 통제를 구실삼아 폭리를 취하고 있어 백성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고 있습니다“라고 상소를 올렸고, 2년 뒤에는 정협이 신종에게 올린 유민도(流民圖)라는 그림으로 신종과 조정 대신들은 큰 충격을 받아 파장이 일어났다. 아울러 청묘법 시행과 제도상 문제점 등을 놓고 구법파와 신법파의 대립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과거 왕안석과 신법파의 개혁을 지지하던 구양수 등이 신법파에게 등을 돌렸다. [2]
이렇게 조정안팎에서 신법과 왕안석 그리고 신법파가 비판을 당하는 와중에 왕안석을 도와 한림학사 겸 삼사사로 승진해 승승장구하던 증포는 중신 한기가 신법의 미숙함과 이로 인한 폐단을 지적함에 대해 왕안석 대신 조목조목 반박하며 신법파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희녕 7년(1074년), 증포는 신종 앞에서 왕안석을 비판하고 신법 중 시역법의 폐단들을 지적했다. 또한 신종에게 이 부분의 시정을 주장했다.
증포의 재능을 아끼며 지지하던 신법파와 왕안석에게 증포의 이런 행보와 언행은 배신 행위였다. 따라서 참지정사에 임명된 여혜경이 탄핵상소로 증포를 공격했고, 결국 증포는 탄핵되었다. 탄핵으로 좌천된 증포는 지방지주로 좌천 후 담주, 광주 등을 전전해야 했다.
2.3. 장돈과의 대립과 갈등
증포는 신종 생전에 지방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가 원풍 8년(1085년) 신종이 승하하고 어린 철종이 뒤를 잇게 되었다. 이때 철종이 고작 10세 밖에 되지 않아 신종의 어머니이자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후 고씨(고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과거 당쟁으로 쫓겨난 이들을 다시 개봉으로 복직시키거나 그 명예를 회복시켰다. 이때 증포 역시 신법파였음에도 일찍이 신법의 폐단을 지적하다가 탄핵되었기에 한림학사로 복직되어 개봉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호부상서로 승진했다.
1093년, 선인태후가 승하하고 장성한 철종이 친정하게 되면서 철종은 신법의 재추진과 함께 신법파의 장돈[3] 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증포 등 신법파 관료들을 대거 중용했다. 이때 증포는 철종에게 장돈을 극진히 대하고 찬양하며 내심 장돈이 자신을 추천하길 바랬지만, 장돈은 이런 증포를 오히려 경계하며 추천하지 않고 추밀원에서만 증포를 추천했다. 이런 까닭에 증포는 장돈을 시기하고 더욱 사이가 벌어졌다.
철종 친정기 당시 재상 장돈은 신종의 신법을 계승해야함을 주장하고 선인태후 생전 원우연간의 폐단을 조사하는 대옥을 일으켰다. 이때 매일같이 이 사건에 연루된 관리들이 귀양을 가거나 황제 앞에서 처벌을 받았는데 증포도 이 조사 과정에서 일부에게 모함을 당했다. [4] 이에 증포는 장돈을 지적하며 “황제께서 권력을 쥐고 계시는데, 오직 사람들과 언관들은 재상[5] 만을 두려워하고 황제 폐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런 사실을 앎에도 이를 고발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말하며 장돈을 공격했다. 하지만 장돈은 대옥 사건을 일으켰음에도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고 반발 폭을 줄이기 위해 철종에게 여러 명사들을 추천해 등용케하고, 사마광과 여공저의 시호와 묘비, 묘석 등의 훼손은 아니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따라서 증포의 장돈 배척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1100년 겨울, 철종이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되어 승하하게 되면서 신종의 정비이자 당시 황실 최고 어른인 상태후 주재 하에 후화원에서 후계건저회의가 열리게 된다. 이때 장돈은 조정 대신의 대표인 재상으로서 상태후에게 예율과 예법대로 신왕 조필과 간왕 조사가 그 후계가 되어야 하며, 이중 철종의 동복동생인 간왕이 예율에 따라 뒤를 이어야 함을 주장했다. 이때 증포는 상태후에게 “장돈은 저희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주장하며 장돈 주장의 무게감을 떨어뜨리고 가장 황제감으로 적합하지 않은 단왕 조길(훗날 휘종)을 지지하던 상태후 편을 들었다. 이런 증포의 행동에 장돈과 일부는 단왕이 행실 등을 지적하며 반대했지만 증포가 상태후와 그녀를 따르던 대신들과 합세해 “장유유서에 따라 신왕의 즉위가 아니되면 예법과 철종의 유지대로 간왕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장돈의 주장이 관철되지 못하게끔 했다.
여기에는 장돈의 주장에 대해 상태후의 반박[6][7] 도 컸지만, 상태후가 예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 증포가 이를 편들면서 장돈을 공격한 발언 역시 단왕이 황제가 되는 것에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10대 초반부터 평소 무게감있지 못하고 사치스럽고 여색을 탐하며 음담패설 등의 행실로 유명해 황제감이 아니라고 평가받고 있던[8] [9] 단왕 조길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휘종이다.
2.4. 몰락
상태후의 주장대로 단왕 조길이 철종의 뒤를 이었다. 그리고 휘종은 곧이어 열린 철종 장례과정에서 장돈을 그 책임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책임자인 장돈은 “상여꾼들이 비오는 날 황제의 관을 함부로 진흙탕 위에 올려놓아 황실을 능멸했는데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꼬투리가 잡혀 탄핵되었다. 이후 장돈은 지방으로 쫓겨나 지방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죽었다. 이때 새로 즉위한 휘종은 상태후에게 수렴청정을 받았는데 상태후는 과거 철종 친정기동안의 당쟁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고 구법파와 신법파의 균형 등을 이유로 폐출된 맹황후를 다시 불러들이고 구법파의 한충언과 산법파의 증포를 나란히 재상으로 임명했다.[10]
하지만 과거 철종대의 당쟁을 줄이고 하나로 묶어야 한다는 이유로 증포와 대립하던 구법파의 한충언이 사퇴하면서 증포는 혼자 정권을 장악했다. 이때 그는 태황태후인 상태후로부터 그 학문을 인정받아 “천고대골의 선비”라고 불리기도 했다. 증포는 과거 장돈 등 집권대신들에게 믿지 못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으며 신뢰받지 못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된 채경이 개봉으로 복귀함에 있어서 도움을 줬다.
1102년(숭녕 원년), 채경은 증포 등의 도움을 받고 휘종의 신임을 받아 좌복사에 올랐다. 하지만 이 무렵 증포는 채경과 사이가 화목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채경이 휘종과 증포 앞에서 증포를 비판하면서 “작록은 폐하께서 주시는 상인데 어찌해서 재상이 자신의 측근들에게 개인적으로 수여하시는 것이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증포는 이 말에 분개해 휘종 앞에서 채경과 강하게 논쟁을 벌였다. 이때 온익이 채경의 말에 얼굴을 붉히며 강하게 반박하던 증포를 향해 “어찌해서 폐하 앞에서 그런 무례를 범하시는 것이오”라고 화를 냈고, 이를 보고 있던 휘종도 증포의 행동이 무례하고 불쾌하다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후 증포는 탄핵을 받아 윤주지주로 좌천되었다.
이후에도 채경은 증포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는데, 증포가 부정한 뇌물을 받고 부정한 일을 벌여 죄목이 있다고 했다. 따라서 증포는 계속 폄직되고 조사를 받다가 남경을 관할하는 사농경으로 쫓겨났다. 그러다가 자신이 일찍이 추천한 학관 조윤이 반란을 일으킨 까닭에 산관으로 또 좌천되어 형주까지 가야만 했다. 그러다가 4년 후 서주로 전입하여 태중대부의 관직을 회복했지만 1107년 윤주에서 사망했다.
3. 여담
증포의 아내 위완(魏玩)은 노국부인(鲁國夫人)에 봉해진 까닭에 위부인(魏夫人)이라 불리는데 그녀의 시 작품이 종종 증포의 형인 증공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그녀의 작품인 '우미인초행(虞美人草行)'은 <시화총귀(詩話總龜)> 권 21에 실려있는데, 흔히 주자로 알려진 남송 영종 시대의 유학자 주희(朱熹)는 이 작품을 가리켜 “송조(宋朝)에서 문학을 한다는 부인(夫人)은 오직 위부인(魏夫人)과 이이안(李易安) 2명뿐이다" 라고 높게 평하였다.
[1] <송사> <간신전>에 실려 있다. 하지만 그가 여혜경, 채경과 같은 간신인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증포는 본래 신법파였지만 희녕 7년 시역법 비판 이후부터는 신법파 중진들과 대립하며 중도적 입장을 보였고 이런 이유로 장돈, 한충언, 채경 등과 대립해왔기 때문이다. [2] 증포의 형이자 왕안석과는 일찍이 친했던 증공의 경우에는 동생과 달리 신법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신법 이후에도 그 친분이 계속되었던 왕안석에게 편지로 이 문제점들을 지적했다.[3] 신법파의 일원이자 왕안석과는 친구로 한때 신법의 진행이 급하고 문제가 있다고 하여 증포와 마찬가지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그는 본래 냉정하고 지나치게 매몰찬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그의 성격은 “장돈의 재능이 뛰어나고 사심없이 냉철하게 일을 추진한다”, “뛰어난 정치적, 행정적 능력과 성과가 있기에 일을 맡음에 믿고 맡길만 하다”, “판단력이 뛰어나고 객관적이다” 등의 평가를 신구법파 모두에게 받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타협점을 찾기 힘든 원칙론자였던 장돈은 정적을 공격하는 정치적 술수를 꾸밈에도 뛰어났고 워낙 냉정한 인물이라서 신구법파 모두에게 적이 많았다.[4] 이 당시 소식, 소철 형제 등도 관직이 폄하되어 지방으로 좌천되고, 그 죄의 정도가 심한 인물로 몰린 경우에는 연좌죄로 그 후손들까지 그 관직을 막았다. 이때 구양수의 셋째 아들인 구양비도 증포와 증포의 처남인 위태에게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원우당인이라 모함받아 노주 지주로 좌천되었고 귀향조치 당했다. 그러다가 철종 원부 연간에 다시 복직되었다.[5] 장돈[6] 당시 신왕 조필은 상태후의 말대로 눈병이 심해 후계에서 제외되는데 있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 신왕은 눈병이 심해 바로 앞의 사람도 자세히 분간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당시 사이코패스, 지적 장애인보다 황제가 되면 안 되는 더 큰 결함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부분은 신왕과 같은 결함이었다고 한다.[7] 상태후는 ‘주덕비의 소생이 두명이나 황제가 되면 자신이 껍데기만 정실일 뿐 주덕비가 정실과 다름없다’고 판단해 철종의 유지와 황실예법을 후화원 건저회의 시작부터 무의미하게 진행시켰다. 이때 그녀는 “내가 정실이지만 자식이 없고, 살아있는 신종의 아들들이 모두 서자들이라서 그 위아래가 없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이런 상태후의 발언들은 당연히 재상 장돈이 ‘황실 최고 어른이 철종의 유지도 어기고 황실의 계승법도까지 어기느냐”라면서 강하게 반발하고 나가는 이유가 되었다.[8] 단왕 조길은 평소의 행실과 달리 상태후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고 그 비위를 잘 맞췄다고 한다. 따라서 상태후와 그 측근들은 단왕 조길을 좋게 평가했다. 실제로 단왕은 회화, 시무 실력이 뛰어났고 멋쟁이에 단정한 외모와 말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9] 상태후와 철종, 간왕의 생모 주덕비 사이가 워낙 나빴던 이유도 상태후가 단왕 조길을 지지한 이유였다.[10] 여담으로 이때 한충언은 키가 크고 증포는 워낙 키가 작아서 이 부분에서도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