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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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북송의 정치인. 자는 개보(介甫)며 호는 반산(半山)이다. 강서성(江西省) 출신이며, 5~6세 때 시경과 논어를 통달한 천재였고, 1038년에 부친상을 당함에도 노력한 끝에 4년 뒤 진사에 급제하여 북송의 시인·문필가로 활약했다.
2. 생애
1021년, 장시성 무주 임천현 사람이다.[3]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일에 종사하다가 할아버지대에 이르러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왕안석의 아버지 왕익(王益)은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 관아의 하급관료였다. 더해서 그의 집안은 고향 임천현에 “하루 목숨을 기댈 만큼의 경작지”도 없었기에 가난했고, 청빈한 인물이었던 부친 왕익은 지방 하급관료로 지내면서 가족들을 이끌고 근무지를 전전했다.
어릴때부터 똑똑했던 왕안석은 불과 5세때 시경과 논어를 통달했으며, 당대의 또래 수재들이 그렇듯 정치, 경제 등 당시 현실적인 부분보다는 시부(詩腑)를 만들어 명성을 올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다가 17세가 되던 해 여름, 아버지 왕익이 강령부(江寧府)[4] 에 근무하게 되어 이곳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생각이 바뀌어 시부보다는 학문에 몰두했다. 하지만 1038년에 업무로 인한 과로 등으로 부친 왕익이 사망하여 부친상을 치뤄야 했다.
이무렵 왕안석은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강령부에 그대로 정착했는데 학문에 몰두함에도 당시 인종 경력 연간 학문의 유행을 따르면서도 방법은 달랐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해석 후에도 그는 자신이 공부하여 얻은 지식이 정확한지 검증하기 위해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눈으로 현실 생활을 직접 접하려고 했다. 또 단순히 유가의 학문, 경전만을 공부하지 않고 제가백가의 학문들과 의서 등 다른 학문까지 폭넓게 습득했다.
인종 경력1년인 1042년, 왕안석은 과거에 급제해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을 수여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중앙 관리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학문 지식을 갖추고 행정실무 능력이 탁월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관개사업과 재정 관리 업무 능력에서 평가가 좋았다.
가우 5년 인종에게 《만언서(萬言書)》를 지어 바쳤다. 이때 그가 인종에게 건의한 개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중앙 관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여러 중앙관료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안석은 모친과 동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사양했다. 만언서를 바친 지 2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잠시 관직을 떠났고, 모친상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 후에도 40세가 될 때까지 지방관으로 근무했다.[5]
3. 신법
왕안석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신법(新法)이라 불리는 개혁 때문일 것이며 왕안석의 개혁은 반대파의 견제와 불안한 정치 상황으로 인해 큰 성과는 거두지 못 했다.
4. 개혁의 배경
1038년 이원호가 국호를 대하(서하)라고 고치고,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한다. 7년간의 전쟁으로 화약을 체결하는데, 송태조 조광윤의 문치정책으로 군사력이 약해진 송인종 연간에는 범중엄 등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하를 물리칠 군사력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서하가 송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는 대신, 송은 매년 비단 13만필과 은 5만냥, 차 2만근을 보내게 된다. 또한 거란에게도 화의를 주선한 대가로 비단과 은을 제공한다. 병사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으나, 질은 형편없었고, 국방비가 정부 예산의 80%를 차지하게 된다.
황실은 황실대로 낭비를 일삼는 행사를 하여 국고를 탕진하였고, 3년마다 치러진 과거로 인해 벼슬자리보다 관료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대지주의 증가로 농민들은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재정 수입이 크게 줄어들게 된다. 이에 따라 물가는 상승되고 세수는 줄어들고, 노비와 빈민들은 늘어나는 악순환의 경지에 이르렀다.
5. 왕안석의 개혁
왕안석은 인종에게 정치개혁안이 담긴 만언서(萬言書)[6] 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가 중앙에 데뷔한 건 인종, 영종의 뒤를 이은 19세의 젊은 송신종이 제위에 오르고 난 이후였다. 왕안석은 신종의 재가를 얻고 부재상인 한림학사로 임명된다. 그의 개혁 정책은 1069년~1074년에 걸쳐 시행되었고 서하의 침공 등으로 매우 피폐해진 국가의 재정난을 극복하고, 대지주와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농민과 중소 상인들을 보호 육성하여 부국 강병을 이루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 균수법
- 청묘법
- 보갑법
- 시역법
- 모역법
- 보마법
6. 결과
왕안석의 개혁안은 제대로만 된다면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이었으며, 기존 기득권 세력에게 불리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고 생각과 달리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제도 자체가 허점도 많고 부정부패, 고리대가 심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심화시켜 백성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는 문제가 터져나왔다.
당장 대부호들이 대부분 기존 기득계층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으로 그를 반대하는 당파를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반대파를 구법파(舊法派)라고 하고 개혁에 찬성하는 파를 신법파(新法派)라고 하여 당쟁이 가속화되었다. 당시 구법파의 당수는 사마광이었다. 더해서 왕안석을 지지하던 관료들이나 왕안석 찬성세력인 신법파 내부에서도 전보다 더 심해진 사회 부작용, 너무 급격하게 밀어붙이는 개혁 속도 등을 이유로 왕안석을 비판했다.
희녕변법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고 있던 1074년 희녕 7년, 허베이 성에 큰 가뭄이 발생하자 구법파는 이것을 신법에 대한 하늘의 분노로 상소하여, 당시 구법파의 배경이었던 신종의 어머니 선인성렬황후 고씨와 내시, 구법파 관료들이 지속적인 퇴진운행을 벌였다. 더해서 신법파 내부에서도 급격한 왕안석의 개혁에는 반대한 장돈[7] , 증포, 여혜경[8] 이 신법의 부작용을 비판했고, 원래 신법을 지지하던 구양수조차 청묘법의 문제 등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이에 신종도 왕안석을 해임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왕안석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9] . 신법은 왕안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신종의 재위 기간에는 꾸준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신법당에는 왕안석 외에는 그다지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신법파 내부에서도 내부분열이 일어난다.[10] 수완은 뛰어났지만[11] 구법파 사람들에게도 간사하다 평가받던[12] 여혜경의 경우는 평소 왕안석의 말을 기록해뒀다가 왕안석의 세력이 약해질 때 즈음 부정적으로 해석될 여지의 것들만 골라 황제에게 참소한다. 다음 해에 왕안석은 복직했지만, 이때 그의 복직을 두려워하고 반대하던 여혜경이 앞장서 ‘왕안석이 유가의 도를 배신하고 황제를 허수아비로 여겨 속이고 있다’며 신종에게 왕안석을 탄핵하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결국 왕안석은 1076년에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1085년 북송 신종이 사망하고 다음 해에는 왕안석도 사망한다.[13]
신종이 죽은 후 선인성렬황후에 의해 사마광이 재상으로 등용되고 곧 신법이 폐지된다. 이에 개혁을 일부 지지하던 소식[14] 을 비롯해 이런 반동적인 조치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 우려한 이들이 많았는데,[15] 그 얼마 후에 사마광도 오래 집권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신법과 구법의 당쟁은 원래의 목적을 잃은 채 더욱 가속화되어 정치혼란을 초래해 송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된다.
왕안석의 신법 개혁과 관련하여 다음 두 문헌을 참고할 수 있다.
- 이근명(2014). “왕안석 신법의 시행과 臺諫官”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이근명(2010) 『역사문화연구 제 35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7. 비판
후대에 대표적인 개혁자로 평가받지만 소위 '개혁 정치인'들이 다 그렇듯 동시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개혁 부분에 집중하여 고평가하는 사람도 있었고 최근엔 이쪽이 다수파지만, 한동안은 그 폐단에 주목하여 나쁘게 보곤 했었다. 특히 성리학을 세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남송의 주희가 사마광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저평가되어 온 편. 주희는 왕안석 또한 나름대로 유능한 명신으로 평가했지만 신법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북송의 멸망 원인으로 이 신법의 부작용을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왕안석의 평가는 나빴다.
왕안석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신법 자체가 비현실적 내지는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미 당대에 소동파는 희녕변법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는데, 일단 정부의 전곡 출납 장부의 곡식 가격 자체가 이미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있고, 품질이 떨어지면 팔 수 없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성립이 안되니 조정에서 사들이고 되파는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높아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똑같거나 구법 이상이고 차라리 상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비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희녕변법 후 신종은 32곳이나 되는 궁내 창고에 비단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창고를 추가로 지었을 정도였지만, 소동파는 왕안석의 신법이 민간의 이익을 빼앗는것이라 지적하고[16] 상홍양에게 속은 한무제 말년에 이르러 도적들이 봉기하고 난이 일어났다며 만약 무제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거나 소제가 법을 고치지 않았다면 한나라는 얼마 안 가서 망했을 거라고 하기까지 했다.[17] 그러니까 왜 한무제랑 똑같은 짓을 하느냐는 비판이었다. 사실 상홍양(한무제)이나 왕안석이나 외부의 적(흉노, 요-서하)을 막기 위해 이런 정책을 추진했다는 걸 생각하면 소동파가 왜 이런 비유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한무제나 상홍양은 흉노를 막을 재정을 만들어 실제 흉노 원정에 제대로 쓰기라도 했지 왕안석의 신법은 부작용만 일으켰다는 점에서...말 부터가 그런데 무제는 경제 시기부터 지어진 군마용 말목장을 더 지어 말을 기르게 했지만 왕안석의 보마법은 군마와 짐마가 다르다는 점에서 이미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신법 중 가장 논쟁거리였던 청묘법 또한 정부가 민간 사금융보다 더 높게 고리의 이자를 먹여서 돈놀이하냐는 비판이 나왔다. 더해서 청묘법이 처음 시범적으로 실시된 하북일대에서는 백성들이 단체로 존경받던 명신 한기에게 몰려가 “청묘인지 뭔지 하는 것 좀 황제폐하께 제발 없애달라고 해주십쇼. 이것 때문에 죽겠습니다”라고 집단 행동까지 했고[18][19] , 신법당과 왕안석의 주장을 지지해주던 인사들까지 이를 비판했다. 또 보마법은 잠깐 지나가는 글에도 비현실적이라는[20] 비판이 이어진다.
즉, 왕안석의 개혁은 말만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을 위한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정부가 기득권을 대체해 대지주, 대상인의 위치를 독점해 민간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정부가 사채놀이를 하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짓이 아니냐는 것이 정책 자체에 오랫동안 가해진 비판이었다.
이는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홍대용의 계방일기 같은 것을 보면 세손(정조), 유학자(실학자 포함)들이 한 목소리로 왕안석을 조롱하곤 했다.
실제로 저런 분위기였다. 왕안석이 얼마나 닥치고 까였는지 볼 수 있는 대목. . 이미 그 이전에 대동법 실시 과정에서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는 측은 자신들이 왕안석 같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었다. 그런데 정작 정조는 왕이 되고 난 후에는 왕안석을 옹호했다."여기서 왕안석이 재상이 된 것이 역사의 쾌사입니다."
"어찌 그렇소?"
"그러지 않았다면 왕안석이 간신인 것이 밝혀지지 않고 현자로 평가되었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비판은 왕안석의 태도와 신법당에 대한 것이다. 먼저 왕안석은 중앙 데뷔 당시부터 특유의 성격과 그 성품 때문에 반대가 심했다. 당시 조정 내에서 한기 등 경험 많은 원로들과 강직한 성품을 가진 오규같은 이들조차 함께 일할 당시 경험한 “당연한 것조차도 자기가 싫으면 무조건 자기합리화하며 듣지 않는 태도”와 “업무 처리에서도 현실을 파악하지 않은 채 잘못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외고집’ 기질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21] 하지만 신종은 원로들의 조언이나 군목사로 함께 일한 이후 경험을 토대로 기용에 반대한 오규 등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대의견을 낸 장지기에게는 과거 그가 구양수를 비판할 때 개인가정사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대놓고 면박을 줬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주장처럼 왕안석의 가장 큰 결점으로 지적된 성격과 업무 스타일은 개혁 집행과정에서 갈수록 문제를 발생시킨 결과, 왕안석을 지지했던 이들조차 정적으로 만들어 결국 왕안석은 실각, 송나라는 개혁의 실패와 부작용으로 긍정적 효과보다는 악영향이 커지는 결과를 얻고 말았다.정조 : "왕안석은 사마광과 비교하면 인품은 몰라도 재주는 뛰어나지 않냐?"
다른 신하들 :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이에요. 정치를 오래 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이뤘을 텐데"
채제공 : "옛날 법 고치고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요즘 젊은 것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사마광이 더 낫다고 하는 거지요."#
정조 : "ㅇㅇ 주자도 왕안석이 명신이랬어"
왕안석은 빠른 개혁을 위해 지지층을 최대한 늘리려 노력했고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이들을 대거 개혁 업무 전면에 추천해 중앙 요직을 차지하게끔 했다. 따라서 신법당은 순식간에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그렇게 세를 늘리다 보니까 여혜경, 채경, 증포와 같이 영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 신법당의 대부분 구성원을 이뤄버렸고, 왕안석 생전에도 뒤가 구린 짓을 해서 문제가 된 인물들이 많았다.[22]
왕안석과 학문적 성향이 맞고 잘 통한 까닭에 일찍부터 절친이었던 여혜경의 경우에는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해준 뼈있는 조언처럼, 자신과 왕안석이 실각될 위기에 처하자 왕안석을 공격했다. 이후에도 다시 복직한 상황에서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해 과거 왕안석의 발언들을 증거로 내세워 공격해 사임하게 만들었다. 또 증포의 경우, 신법의 열혈 지지자이자 추진 세력이었음에도 결국 왕안석이 실각하는 데 합세했다[23] . 왕안석 죽은 후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파당을 짠 것도 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25] 거기다 그 파당의 내부 상태가 이러니 왕안석을 포함한 신법당 전체가 간신이라는 후대의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 사실 왕안석이 질이 나쁜 인물들을 믿고 그들을 대거 추천해 키웠다는 점과 파당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것 자체로도 충분히 간신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이다.
그 외에, 최근에는 저런 조치들로 북송을 구할 수 있었느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북송 시대 송휘종 무렵에 승자는 채경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 측이었고, 구법당은 역적으로 몰려 모욕당했다. 또한 신법도 완전히 묻힌 것은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정책이 발굴되었고 구법당 옹호측인 주희도 신법과 비슷한 정책을 내놓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북송이나 남송이나 망했기 때문. 다만 북송의 멸망의 원인은 송신종부터 이어온 당쟁에도 있지만 송휘종의 사치와 낭비도 한몫 했으며 채경이 비록 신법당 측이라지만 그가 제대로 된 신법 정책만을 한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북송이 망한 결정적 원인은 막장 군주인 송휘종과 북송의 잘못된 외교정책에 있었다.[26]
아무튼 이제나 저제나 평가는 "현명한 개혁자 왕안석이 수구꼴통들의 음모에 매장당했다."나 "간신 왕안석의 사악한 음모가 나라의 수명을 깎았다"로 갈린다. 물론 세상 모든 정치가 이렇게 나뉜다고 봐야겠지만...
8. 그 외
신종이 왕안석에게 "옛날 당태종이 고구려를 쳤는데 왜 못 이겼냐?"라고 묻자 "연개소문이 비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참고로 이 일화는 중국 측의 사료에서는 따로 전하지 않는데, 술이부작의 원칙을 중요시했던 김부식의 성격을 생각해 볼 때에 없는 이야기를 마음대로 지어냈을 리는 없다. 아마도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에 들은 이야기를 실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변법개혁을 이끈 개혁정치가의 이미지로 강하게 인식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송나라 시절의 뛰어난 산문작가들을 일컫는 '''당송팔대가'''의 일원이기도 하다. 당송팔대가는 당나라의 한유(韓愈) · 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 소순(蘇洵) · 소식(蘇軾) · 소철(蘇轍)[27] · 증공(曾鞏)에 왕안석을 일컫는다. 이 칭호는 송나라 때의 진서산이란 사람이 처음 주창한 단어로 이 평가가 그대로 이후까지 이어져서 명나라 이후의 문인들에게도 받아들여진 것. 이런 의미에서는 중국문학사에도 제법 비중이 큰 인물이다.
특히 소식(소동파)과는 정치판에서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소식 개인적으로는 왕안석을 높이 평가했었고, 소식이 왕안석의 변법 중 남겨야 할 것은 남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마광의 눈밖에 나서 좌천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식은 실각하여 지방에서 살고 있었던 왕안석을 찾아가 함께 지내며 시나 문장을 짓기도 했었다고 한다. 반면 소식의 동생 소철은 신법에 명확히 반대하는 노선을 따랐고 이에 신법 찬성파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조선 정조의 경우는 세손시절에는 위에 나왔던 것처럼 왕안석을 비판했지만 왕이 되어서는 왕안석을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혁파한 일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서둘렀는가. 희령(熙寧)의 정치가 물론 폐단은 많았지만 병제(兵制)를 변통한 것과 같은 것은 실로 좋은 법인데 어찌 모두 폐지해서 결국 융정(戎政)이 떨치지 못하고 나라의 형세가 더욱 약해지게 만들었단 말인가. 왕안석에서 나온 것이라면 꼭 서둘러 폐지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지나쳤는가. 정자(程子)가 ‘우리들이 그를 격동시켜 그렇게 된 것이다.’ 한 말이 진실로 대현인의 공평한 말씀이며 공평한 마음이다. 대체로 왕안석은 고집이 너무 지나쳤지만 그 재주야 어찌 세상에 쓸 만한 것이 없었겠는가.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등용한 것은 그 뜻으로 보면 큰 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록 정조 15년(1791년) 4월 30일의 기사 중#"
정조는 자신이 총애했던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에게 '너는 왕안석'이라고 말한적도 있다. 박제가가 이루기 어려운 개혁을 주장한다는 뜻이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뉘앙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왕안석은 반드시 영행전(佞幸傳)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혹자는 ‘마땅히 명신전(名臣傳)에 들어갈 것이다.’ 하였는데, 나중에 《명신록(名臣録)》을 보니 과연 그 가운데 들어 있고, 《송사》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주자(朱子)도 이미 명신으로 인정했으니, 어찌 얻기 어려운 인재가 아니겠는가. 다만 여혜경(呂惠卿) 같은 무리들을 등용해 진출시킨 것이 큰 착오였던 것이다. 대체로 세도(世道)를 만회하는 것 역시 운수가 좋고 나쁜 것에 관계되는 것이다. 군주는 운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그때의 운수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여겨진다.- 역시 정조 15년(1791년) 4월 30일의 기사 중"
전근대 중국 지식인(사대부)들 사이에선 그다지 높게 평가되지 못하고 도리어 이단아라고 보는 시각까지 존재했으나 청말 캉유웨이가 왕안석에 대한 재평가를 하면서 왕안석에 대한 시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정적인 사마광과 사적으로는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로를 방향은 다르지만 국가를 위하는 애국자로 여기고 존경했으며, 사마광은 왕안석에게 상술된 것처럼 여혜경은 믿을 만한 인사가 못 되니 경계하라는 정치적 조언까지도 해 줬다. 두 사람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신법당과 구법당 사이에 합리적인 토론이 이루어졌지만, 두 사람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흙탕 싸움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