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성렬황후 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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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宣仁聖烈皇后 高氏
1032-1093
송영종의 황후이자 신종의 모후, 철종과 휘종의 할머니이다. 영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얻었다. 흔히 고태후 또는 선인태후로 불린다. 별칭은 여중요순(女中堯舜) 또는 여자요순.
2. 가계와 일화
선세(先世)는 연인(燕人[1] )이며 성은 고씨(高氏), 아명은 도도(滔滔)로 조부는 북송의 대장이자 충무절도사(忠武節度使) 고경(高瓊)이며 아버지는 고준보(高遵甫)이다. 고준보와 송인종의 계후 자성광헌황후 조씨(慈聖光献皇后 曹氏)의 자매인 조씨(曹氏)[2] 사이에서 1032년에 태어났으며 남동생으로는 고사림(高士林), 고사손(高士遜)이 있다.
3. 황후, 황태후 시절
어린 시절 간택되어 이모인 자성광헌황후 조씨를 따라 입궁했으며 송인종의 양자인 조종실과 15세 때 혼인했고, 남편과 함께 궁 밖 사저에서 살았다. 그리고 남편인 조종실이 가우 7년(1062년) 태자가 되면서 휘를 서(曙)로 바꾸고 1063년 인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후, 치평 2년(1065년) 황후에 책봉되었다.
남편인 영종이 재위 4년만인 1067년 붕어하고 장남인 조욱(趙頊)이 즉위하여 황제가 된 후, 보자황태후(寶慈皇太后)로 높여졌다. 그녀는 아들인 신종이 왕안석의 신법을 받아들여 정책을 추진했던 것에 반대해왔으며 아들인 신종이 원풍 8년(1085년) 병상에 눕게 되었을 때 태자건저 회의를 주재했다. 그리고 손자인 용(傭)[4] 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교서를 갑오3년 초하루에 반포했으며 아들인 신종이 죽고 손자인 조후(철종)가 황제가 되었을 때 태황태후가 되어 어린 손자 철종의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4. 수렴청정과 사망
손자 철종의 연호인 원우(元祐, 1086년 ~ 1094년 4월) 연간동안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때 사마광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신종 연간 당쟁으로 연좌되어 쫓겨난 이들을 복권시키고 구법당 대신들을 기용했다. 아울러 이 시기동안 어린 철종에게 늘 다른 곳이 아닌 황제 자신의 침상에서 잠을 자게 하는 등의 규칙을 정하고 엄격하게 훈육했으며[5] 시독 소식, 범저우를 어린 황제의 스승으로 삼아 인성교육과 제왕교육 모두에 상당히 신경을 기울였다. 그녀는 비록 왕안석의 신법에는 반대했지만 청렴하고 엄격한 정치를 했으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고 한다.
1093년 9월 지병으로 향년 62세의 나이에 사망했으며 아들 신종의 무덤인 영유릉(永裕陵)에 묻혔다.
5. 자녀
남편인 영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는데 청매죽마의 부부사이라고 할 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아낀 것으로 유명하다.
- 장남 신종(神宗)
- 차남 오영왕 호(吳榮王 顥)[6]
- 3남 윤왕 안(潤王 顔)[7]
- 4남 익단헌왕 군(益端獻王 頵)
- 장녀[8] 위국대장공주(魏國大長公主)[9]
- 차녀[10] 한국위국대장공주(韓國魏國大長公主)
6. 평가
공사를 철저히 나누어 잘 지키고 사적인 감정을 이유로 청탁을 받거나 눈감아주지 않았고, 수렴청정 기간동안 수도 내에서 건설중이거나 계획된 궁궐, 부아, 사원 건축을 중지케하고 각종 부역 의무에 징용된 농민들을 모두 집으로 보내고 각종 세금들도 감면하여 여자요순, 여중요순으로 불러졌다. 더해서 스스로도 사치를 하지 않고 모범을 보이고 주변의 부정축재와 같은 부패행위를 엄히 단속하여 구법당의 맥을 이은 성리학 체제하에서 수렴청정의 모범으로 칭해졌다. 조선왕조에서도 대비들이 수렴청정의 조서를 반포할 때 늘상 나오는 얘기가 선인태후의 수렴청정을 모범으로 하겠다는 얘기이다.
7. 둘러보기
[1] 지금의 베이징 및 허베이성 일대[2] 선인성렬황후 고씨의 어머니 조씨의 집안도 명문가인데, 그녀의 할아버지가 북송의 개국공신 조빈이다.[3] 남편 영종에게 선인성렬황후 고씨는 “이미 제가 황후의 몸이 되어 저희 가문은 이미 그 덕을 입어 과분합니다. 그래서 저희 친정사람들을 올려주려는 것에는 더욱 신중해야할것입니다. 제 동생 사림은 이미 승진했고 조정에서의 직위도 과분하오니 어찌 더 올려줄 수가 있습니까.”라며 반대했다고 한다.[4] 황태자가 된 후 휘를 후(煦)로 바꿨다.[5] 궁중에서 철종이 다치거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고태후는 주변을 통해 어린 황제의 동향을 보고받고 상황에 따라 미리 안전조치들을 명하며 상당히 신경썼다고 한다. 따라서 궁중에서 키우던 어린 곰을 만지던 철종이 다칠까봐 궁녀와 환관들에게 어린 곰들을 안게 해서 보게 하는 등 조치를 취하게 했다고 한다. 물론 이런 선인태후의 교육방식과 달리 주변의 급격한 인사조치에 걱정하던 철종의 친모 덕비 주씨는 과민반응하여 먼저 아들의 음식을 손수 기미하는 등의 행동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켰고 고태후와 대립하게 됐다. 또 철종 역시 이런 과보호에 대해 사춘기 시절 본인 나름의 반항(할머니가 의견을 물으면 입을 닫고 말하지 않거나 할머니께서 시킨대로 하라고 말하기 등)을 하기도 했다. 철종은 할머니가 사망한 이후 지나치게 자신의 행동을 비약하여 보고한 일부 환관들을 친정 이후 황제와 태황태후를 기만하고 할머니와 손자 사이를 벌어지게 음모를 꾀했다고 해서 처벌했다.[6] 창왕(昌王) 조호라고도 한다.[7] 요절[8] 영종의 딸 중에서는 차녀.[9] 흔히 촉국공주, 보안공주라고 부른다. 남편인 왕선과의 사이에서는 아들 1명을 얻었지만 요절하였다고 하며, 그녀 역시 1080년 불과 29세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다.[10] 영종의 딸 중에서는 3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