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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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북송 대의 유학자, 정치가 및 역사가. 자치통감의 편저자로 유명하다. 자는 군실(君實). 시호는 문정으로 온국공으로 봉해져 사마온공이라고도 불린다. 그의 먼 조상 사마부(사마랑, 사마의의 동생)[3] 는 하내군 온현 출신이다.유안세[2]
: 수만 개의 한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가 무엇입니까? 일생 살아가면서 좌우명으로 삼을 만한 한 글자를 골라 주십시오.사마광: 그것은 '''誠'''(정성 성)이네.
유안세: 誠이란 무엇입니까?
사마광: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그 첫걸음'''(從不妄語始)이지.
2. 생애
20세에 진사가 되고 이어 한림학사, 어사중승이 되어 정계의 요직을 거치던 차에 신종이 즉위해 왕안석을 중용하여 일련의 개혁 정책을 담은 신법을 시행하려 했다. 당초에는 개혁 자체에는 찬성했으나 온건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신법이 관료들의 기득권까지 개혁해 정계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추밀원을 중심으로 신법 반대 세력인 구법당의 우두머리가 되어 결국 왕안석의 최대 정적으로 입지를 굳혔다.
신법을 추진하려는 송 신종의 의향이 강경했기에 결국 개봉을 떠나 낙양에 은거하며 자치통감 편찬에 노력해 1084년 마침내 완성했다. 정치적인 견해는 달랐으나 학자로서의 입지를 송 신종 또한 매우 존중했기에 자치통감 편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4]
송 신종이 붕어하고 철종이 즉위해 황태후 고씨가 섭정하게 되자 정계에 복귀해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며, 신법 타파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재상이 된 지 불과 8개월 만에 병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생의 맞수인 왕안석과 같은 해에 죽었다. 나이는 왕안석이 두 살 어리다. 신법 철폐 정책을 신법 추진 이상으로 급격하게 밀고 나갔기 때문에 소식 등 함께 신법을 반대하는 견해였던 동료들과도 크게 마찰을 빚었다.[5] 특히 노역을 금납화하는 모역법(면역법)에 대해서였다. 소식이 직선적이긴 했지만 사마광 역시 고집불통이라 소식(소동파)는 궐(정사당)을 나가면서 "사마우(司馬牛: 사마 황소 고집)[6] ! 사마우"라며 절규했다고 한다.
이후 고태후가 죽자(1093년) 송 철종은 신법당을 도로 복귀시켰으며, 그에 따라 원우 연간(철종 연간)에 득세했던 원우당(구법당)은 크게 몰락한다. 사마광 역시 황제가 친히 내린 비문을 부수고 후손들이 삭탈 유배를 떠나는 치욕을 겪는다. 부관참시까지 거론되었으나 이것만큼은 면했다. 하지만 송 철종이 또 급서하면서(1100년) 동생 휘종이 즉위하고 향태후는 다시 구법당을 복권시켰다. 이와 같이, 왕안석(신법당)과 사마광(구법당) 사후에 계속 빚어진 신법당과 구법당의 진흙탕 싸움은 북송 멸망 때까지 계속되어 국력 약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7]
당대에 이미 매우 덕망 높은 인물로 알려졌으며, 보수 유학자들로부터는 공명정대한 인물로 대대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8]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측에서는 반동적인 정치가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다만 재상으로 있던 기간이 겨우 8개월이었기 때문에 신법을 대신할 정책을 구상하다가 끝내 실현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9]
왕안석의 신법을 매우 반대했지만 실제로 왕안석과 사마광 개인 대 개인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세 통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 편지를 보면 "내가 그대의 벗으로서 하는 말"이라고 적혀 있으며 매우 허심탄회하게 왕안석의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나라를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대의 목적은 좋았고, 나와 그대의 목적은 같지만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밝혔다. 즉, 이들 둘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사마광이 신법은 반대한 것은 신법이 성공하면 송나라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나 문제는 의도와는 달리 사회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우려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왕완석의 신법은 많은 논란이 되었다."개보(왕안석의 자)가 천하에 큰 이름을 떨친 지 어언 30년. 우수한 재능과 풍부한 학식으로도 나아가 벼슬하는 건 어렵고 물러나는 것은 쉽다오. '''천하 사람 누구나 그대가 가히 태평한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외치며, 백성들이 그대의 은택을 입었다고 외친다오'''"
-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보낸 서신 중에서
왕안석 역시 사마광이 사심 없는 인물임은 인정했기 때문에 답장에 사마광의 비판을 하나하나 논박하면서 "사사로운 면에서는 나 역시 그대를 벗으로 생각하나, 국사에 대한 의견이 맞지 않는 것은 각자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오"라고 적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점이 워낙 조정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사마광도 왕안석을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고 조정에서 더욱 강력하게 왕안석의 개혁안을 비판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마광과 왕안석은 죽을 때까지도 개인 대 개인으로서는 서로를 존중하고 공경하는 태도를 지켰다고 한다.
3. 여담
그의 기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릴 때 친구들과 놀다가 한 친구가 실수로 발을 헛디뎌 정원에 세워둔 인공 돌산 아래 물항아리에 빠졌다. 모두 당황해서 울고불고 왔다갔다 방황하는 등 우왕좌왕했지만 사마광은 침착하게 돌을 찾아들고 물항아리 아래를 깨뜨려 구멍을 내서 물을 빼고 친구를 구했다는 일화가 있다. 사마광이라는 사람을 몰라도 아동용 서적이나 교과서 등에서 옛날이야기로 소개되어 한 번쯤 들어본 사람이 많은데, 이 일화의 실제 주인공이 바로 사마광이다.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도 있는데 제목은 사마광잡항(司馬光砸缸), 즉 '사마광이 항아리를 깨다'라는 뜻이다.
또 5세 때 누이와 호두를 먹고 있었는데 호두 까기가 쉽지 않았다. 호두를 까지 못한 누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여종이 호두를 뜨거운 물에 불려 까주었다. 얼마 후에 돌아온 누이는 사마광에게 어떻게 호두를 깠냐고 물었고 사마광은 여종이 했던 방법을 자기가 스스로 만든 방법인 양 거짓말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고 있었던 사마광의 아버지는 사마광을 불러 거짓말한 죄를 엄히 혼내고 성실과 정직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이때부터 사마광은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항목 맨 위에 있는 유안세와의 대화도 이걸 보여주는 예. 7살 때는 좌씨춘추 강의를 듣고 집에 와서 들었던 내용을 정확하게 강의했다고 할 정도로 수재였다.
개인적인 덕망과 검소함은 고금의 재상들의 정성에 비할 만했다. 사마광에 대해선 이런 일화도 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사마광이 유서를 만나서 일을 맡긴 일이 있었다. 그런데 유서가 추운 날임에도 가난하여 홑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사마광은 자신도 그나마 겨우 가지고 있던 낡은 가죽옷 두 벌 중 한 벌을 유서에게 주고 길을 떠나게 했다. 사실상 사마광이 유서에게 가죽옷을 그냥 준 것. 그런데 이후 유서는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 가죽옷을 서신과 함께 고스란히 돌려 보냈다고 한다.
그가 평생 사표로 삼은 '誠'의 모습은 그의 열전에서도 잘 나타난다.
선조가 사마의의 동생이자 삼국지의 인물 중 한 명인 안평왕 사마부로 무려 93세까지 살아서 장수를 누렸다. 현대인들의 잘못된 이해로 인해 자치통감에서 그가 위 정통론을 주장했다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자치통감은 연도만 조위 - 서진의 연도를 사용할 뿐 어느 정통론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이른바 '무통설'. 그가 사마씨의 후손이란걸 감안하면 여러모로 공정한 해석인 셈이다.[10]사마광이 말하면 임금이 행하고 계교를 내면 임금이 그 계교를 따르자, 몸을 사직에 바칠 것을 각오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무(庶務)에 열중했다. 그러나 빈객이 그의 몸이 파리한 것을 보고 제갈량(諸葛亮)의 ‘식소사번(食少事煩)’의 말을 예거하면서 경계하니 광(光)은 "죽고 삶은 명(命)에 달려 있다" 하고 더욱 서무에 힘썼다.
《송사(宋史)》 사마광열전(司馬光列傳)
조선에선 엄청나게 받들어졌는데, 정조 때 경연에서 "왕안석이랑 사마광이랑 비교해서 인품은 물라도 능력은 왕안석이 결코 사마광보다 못하진 않았다." 라고 했더니 신하들이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입니다. 오래 정치를 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유학자들이 본래 새로운 일 벌이기를 꺼려하는 걸 생각하면 신법에 반대했던 사마광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1]
구법당의 당수였다는 이미지 때문에 보수주의자의 이미지가 강한 탓인지 신법당의 당수이자 개혁정치가의 이미지가 강한 왕안석과 나이 차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나이차는 사마광이 불과 '''2살''' 연상이다. 두 사람을 묘사한 초상화를 봐도 사마광은 흰수염이 성성한 노회한 정객의 이미지지만 왕안석은 그보다는 훨씬 젊게 묘사되었다. 공교롭게도 사마광과 왕안석 모두 같은 해에 사망했다.
[1] 980년 ~ 1041년[2] 劉安世. 북송의 문신. 사마광의 제자이다.[3] 초한쟁패기 은왕 사마앙의 후손들은 은나라의 봉지였던 하내군 온현에서 거주했다. 이후 사마씨가 진을 세운 이후로 수도인 낙양과 각지의 봉지로 흩어졌다.[4] 사실 자치통감 편찬 자체가 신종의 지시기도 했다.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이 격화되자 신종은 둘 다 버릴 수는 없지만 일단 사마광에게 사서를 편찬하게 해서 자연스레 일을 놓게 했다. 하지만 이것이 구법당에게 꼭 불리했던 것은 아니었고 구법당은 자치통감을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은근히 어필할 수 있었다.[5] 사마광이 신법 혁파를 너무 강하게 밀어붙인 것처럼 왕안석도 신법 추진을 너무 강하게 밀어붙였다. 당장 위에 나왔듯 사마광은 온건적일지언정 신법을 찬성했다가 너무 강경하게 밀어붙이자 반대하게 된 인물이었다.[6] 혹 여기서 사마우는 공자의 제자 중 한 명인 사마우라는 견해도 있다.[7] 이 구법당과 신법당의 당쟁은 채경이 등장하면서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자기에게 반대하면 사이좋게 때려잡아 일단락되지만 채경이 또 이들보다 나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8] 심지어 정조 때 정조가 대놓고 왕안석에 대해 "인품은 모를까 능력은 왕안석이 사마광에 뒤지지 않는다." 라고 말하자 신하들이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이고 오래 정치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이뤘을 거라는 말까지 했다.[9] 실제로 처음에는 신법 자체에는 찬성했으니 뭔가 바꿔야 한다는 것은 공감했을지도 모른다.[10] 4차 북벌 때 제갈량과 사마의가 정면대결한 노성 전투에서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가 촉군 1만 명의 목을 베며 대승을 거뒀다고 왜곡한 반면 촉서와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이 전투에서 이겼음을 명확히 하자 아무리 조상이라도 어디서 약을 파냐는 태도로 선제기의 기록을 아예 무시했다.[11]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조선 유학자들이 떠받들었던 주희는 왕안석을 명신이라 평가했다. 그래도 주희도 어디까지나 왕안석 개인만 좋게 평가하고 정작 그가 추진한 신법에는 비판을 가하며 심지어 북송의 멸망은 신법의 부작용이라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