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함

 

성명
장석함(張錫咸)
생몰
1889년 3월 15일 ~ 1951년 4월 5일
출생지
함경남도 함흥시 만세동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석함은 1889년 3월 15일 함경남도 함흥시 만세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1월 보창학교(普昌學校)에 재학 중 학우 17명과 함께 단지동맹회(斷指同盟會)를 조직하고 손가락을 잘라 국권회복을 위한 결의를 굳게 했다. 이후 1909년 5월 신민회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11월 중국 지린성 용정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활동했다. 1911년에는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와 북간도선교단(北間島宣敎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 9월 강봉우, 윤명희(尹命熙) 등과 함께 용정 신촌에 영신학교(永新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의 실시에 힘썼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의 독립만세시윙에 참여했는데, 그 과정에서 장남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조선독립기성총회(朝鮮獨立期成總會)의 재무위원으로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회를 중심으로 결사대를 조직하는 한편 국민의회(國民議會)의 보조기관으로 애국민단(愛國民團)을 조직하고 명동학교에서 개최된 북간도 국민의회 간도지부협의회의 재무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해 6월 나자구에 있는 덕흥학교(德興學校)에서 일민신문(一民新聞)을 발간하고 청년들을 모아 맹호단(猛虎團), 충열대(忠烈隊), 결사대(決死隊) 등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구춘선(具春先) 등과 함께 군정사후원회(軍政司後援會)를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수행했다.
1920년 1월 간도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에 힘썼으며 국민회의 재무위원으로 각 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공급하여 주는 업무를 맡아 이에 진력하다가 1921년 용정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년 김약연, 정재면 등과 재만동포옹호운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에는 대한국민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1931년 만주사변 후에는 교육, 문화 활동을 지속하여 재만 한인 교포들이 민족의식을 잃지 않도록 노력했으며, 8.15 광복 후 서울로 이주하여 말년을 보내다 1951년 4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석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