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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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세파는 1919년 10월 19일 경상북도 대구부 동운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3가)에서 아버지 장지하(張志厦)와 어머니 김해 김씨 김달순(金達順)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13대손이다.
그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에 임굉·이태길·최낙철 등 동교생들과 함께 당시 대구부 동운정에 살던 이무영(李茂榮)의 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했다. 연구회는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한 단체로서, 회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양하였으며 회의 운영을 위해 비밀엄수·매월 10일 연구발표와 하급생지도 및 동지포섭 등의 방침을 정했다. 또한 각 부서를 정했는데, 장세파는 공업부 책임 겸 사무원을 맡았다.
연구회는 1941년 2월부터 1941년 3월까지 여섯차례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했다. 그러던 중 졸업이 다가오자, 그들은 졸업 후 각각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할 때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했다. 또한 회원들은 현지에서의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고, 사무원은 다시 각지에서 보고된 상황을 취합하여 전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우송방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공문을 가장하기로 했다. 장세파는 이에 따라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경북 의성군에 소재한 안평공립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반딧불>이 일경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동지들과 함께 왜관 헌병대에 체포된 그는 미결수 신분으로 2년간 대전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6월 13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장세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