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낙철(독립운동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최낙철은 1921년 11월 22일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은산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 그는 같은 학교 학생 임굉·이태길·장세파·김영필 등과 함께 당시 대구부 동운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 소재 이무영의 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한 단체로서, 회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온 조국의 독립에 대비하여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권위자가 될 것을 결의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회의 운영을 위해 비밀엄수·매월 10일 연구발표·하급생 지도 교양 및 동지획득 등의 운영방침을 정하고 또한 각 부서를 정했는데 그는 지리부 책임을 맡았다. 연구회는 1941년 2월부터 그해 3월까지 6회에 걸쳐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연구회 회원들의 다수가 졸업을 하게 되어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즉, 졸업 후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회원들은 현지에서의 활동상황을 공문으로 위장하여 매월 1회,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는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함경북도 나진부의 약초공립국민학교에 훈도로 근무하면서#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7월에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경찰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항일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해 8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미결수로서 복역하였다. 1942년 1월 예심에 회부되었고 1년이 지난 1943년 2월 8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곧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현 강북구) 수유동에 거주하였으며, 1952년 경상북도 용궁중학교의 교장 서리에 재직하고 있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으며, 2005년 8월 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