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산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수산은 1900년 8월 7일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응곡리(매골마을)에서 부친 장주진과 모친 김주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장유의 동생 장신(張紳)의 12대손으로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이후에는 군자공립보통학교를 재학했다. 그 후 스무 살 무렵에 어머니를 잃고 부친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1919년 3월 전국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장현리에 살던 권희(權熺)와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그는 권희가 작성한 <비밀통고>를 마을 주민들에게 배포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오는 7일 군자면 옛 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같이 부르려고 한다. 각 리민(里民)은 구한국 국기를 1개씩 가지고 와서 모이라"는 것이었다.
이 격문은 이종영(李鍾榮), 이종진(李鍾振), 이응수(李應洙), 이덕증(李德增), 이종형(李鍾亨) 등 마을 주민들의 손을 거쳐 장곡리, 장현리는 물론 이웃의 월곶리까지 전달되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4월 7일 만세운동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와 권희는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재판도 함께 받았다. 장수산은 1919년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고,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었고,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마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0년 4월 28일에 출옥했다.
장수산은 시흥군의 문인들이 결성한 ‘연성음사(蓮城吟社)’가 1927년 주관한 한시 전국 현상공모에 응모해 5등으로 입상했고, 1929년 발간된 수상집 '연성음사제일회집(蓮城吟社第壹會集)'에 그 내용이 수록되었다. 또한 그는 후학들을 위해 시흥군 일대의 교육 활동을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군자국민학교 장곡분교[1] 설립에 앞장섰다. 1981년 5월 15일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경기도 시흥시 거모동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장수산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현재의 장곡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