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조선)

 





'''조선 효종의 장인 | 인선왕후의 부친'''
'''신풍부원군 장유
新豐府院君 張維'''

'''군호'''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시호'''
문충(文忠)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본관'''
덕수(德水)
'''이름'''
유(維)
''''''
지국(持國)
''''''
계곡(谿谷), 묵소(默所)
'''생부'''
덕수군 장운익
'''생모'''
밀양 박씨(密陽 朴氏)
'''부인'''
안동 김씨(安東 金氏)[1]
'''자녀'''
1남 2녀
'''묘소'''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
'''생몰
기간
'''
'''음력'''
정해년 12월 25일 ~ 무인년 3월 17일
'''양력'''
1588년 1월 22일 ~ 1638년 4월 30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4.1. 환향녀 논쟁을 일으킨 사람
4.2. 엄청난 애연가
4.3. 동생 장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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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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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왕후의 아버지로, 효종의 장인이다.
최명길, 이시백, 조익 등과 친했다고 한다. 최명길과 함께 대표적인 주화파였으나 최명길의 입지에 아무래도 묻힌다.

2. 생애


1587년 판서 덕수군(德水君) 장운익(張雲翼)[2]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우의정 김상용의 사위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년)에 19세의 나이로 향시에 장원을 했다. 4년 뒤인 1609년(광해군 1년)에는 스물셋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를 했다. 이후 예문관·승문원 등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김직재의 옥에 매제 황상이 연루되어 역적으로 체포되면서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2년 동안 고향인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는데, 이 무렵에 대가의 문장을 거의 다 접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었고 신풍군에 책록되었다. 이조좌랑과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공신이면서도 공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소장 관인들을 보호하다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1636년(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하였다. 이때 인조가 삼궤구고두례의 굴욕을 당한 뒤 삼전도 비문을 쓴 일로 욕을 많이 먹었다. 어쨌든 1637년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친상을 이유로 18차례의 상소 끝에 물러났다.
사후 효종이 즉위하자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에서 강화도 수비에 실패하고 사형당한 덕창군(德昌君) 장신(張紳)이 그의 동생이다.

3. 평가


천문·지리·의술·병서·그림·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신흠·이식과 더불어 4대가 월상계택(月象谿澤)으로 꼽혔다. 이는 네 명의 호를 딴 것으로, 장유는 계谿로 세 번째에 든다.[3] 여한구문가[4]로 꼽힌 적도 있다.
그런 인물이었는지 자신감도 대단했던 모양.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 정자주자)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육구연)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불일(不一)한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有識無識)할 것 없이, 책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정주(程朱)를 송(誦)하여 다른 학(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

심지어 양명학을 선학이라며 의롭지 않다 하는 것을 까버리기도 했으나, 송시열에게는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라며 좋은 평을 받았다.
실록을 집필한 사관 역시 ‘조정에서는 명신(名臣)이었고 임금의 장인이었으며, 공훈은 마원과 등애를 능가하고 문장은 한유와 구양수를 앞질렀다’고 평했다.

4. 여담



4.1. 환향녀 논쟁을 일으킨 사람


병자호란 후 외아들 풍양군(豊陽君) 장선징[5]의 처인 며느리 한씨가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속환되어 돌아오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아들과 한씨를 이혼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절개를 잃은 며느리에게 조상 제사를 맡길 수 없다며 이혼을 청하는 단자를 올린 것. 당시 장유는 봉림대군의 장인으로 ‘나라 어른’의 자리에 있었기에 장유의 요구는 임금이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한편 속환된 딸의 아버지 한이겸[6]은 사위가 새 장가를 들려고 한다며 노복을 시켜 격쟁하여 그 원통함을 호소했다. 실제 전란으로 인한 포로 부녀의 문제는 임진왜란 직후에도 대두되었지만, 그때는 부녀들에게 절개를 잃은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따라서 법이 허락하지 않은 이상, 임진왜란 이후 사족 중에 환향녀를 내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에 병자호란으로 인한 문제도 ‘옛 판례’를 따르기로 이미 결정이 났건만, 유독 장유가 사사로이 문제를 제기한 것.[7]
이에 최명길은 장유와 그의 지지자들에 맞서 “아내를 속환하려고 많은 사족이 함께 갔는데, 만나자마자 부부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하기를 마치 저승 사람을 만난 듯 했다”고 했다. 또 속환이 더뎌지자 자결하는 부녀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했다. 그리고 장유 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줄 경우 백 집의 원망이 될 수 있다고 했다.[8]
인조는 장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장유 아들의 이혼을 허락하는 순간 도미노처럼 각 집안에 불어 닥칠 우환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좌의정 최명길은 집요하게 ‘일국의 왕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공평해야 한다’며 감시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조정 회의를 기록한 사관(史官)은 절의를 금과옥조로 여겨온 예의지국이 ‘비뚤어진 견해’를 가진 최명길 때문에 오랑캐로 전락했다며 개탄했다.[9]
이러한 소란이 있은 후 6일이 지나 갑자기 장유가 죽음으로써 환향녀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없던 것이 되었다. 그러나 3년 뒤에 장유의 부인인 김 씨가 남편의 뜻이라며 아들 내외의 이혼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제출함으로써 환향녀 문제는 다시 이슈가 되었다. 김 씨 부인은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어른에게 순종하지 않고 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다’고 했다. 이를 두고 영의정 홍서봉은 죽은 남편이 조정의 윤허를 받지 못하자 칠거지악을 내세워 뜻을 관철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10]
죽은 사람의 소원이라며 떼를 쓰는 안사돈에게 국왕 인조는 이혼의 법을 고치기는 어려우므로 장선징이 훈신의 독자임을 감안하여 특례로 이혼을 허락했다. 그 덕에 장선징은 결국 환향녀인 아내와 이혼하는 데 성공했다. 인조는 장선징 이외 그 누구에게도 속환을 이유로 한 이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영을 내렸지만, 장선징이 선례가 되어 대부분의 사람은 ‘사대부의 가풍’에 누가 될까봐 환향한 부인과 갈라섰다.
장유의 집에서 쫓겨나 아들 장훤과 생이별을 당한 장선징의 아내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장선징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장훤은 그 후 9품 하급 관직마저도 힘겨운 상황이 되었다. 환향녀의 아들이라는 주장에 생모와는 연이 끊어졌고, 그래서 계모의 자식임을 증명하자 이제는 천륜을 저버린 배은망덕한 자식으로 다시 공격을 받은 것. 결과적으로 장유는 완고한 유교 이념에 따라 무고한 며느리를 내쫓으면서 며느리한테서 태어난 손자의 벼슬길까지 끊어놓은 셈이 되었다.

4.2. 엄청난 애연가


담배에 관해서 지독한 혐연가였던 장인 김상용과 달리 조선 최초로 담배를 핀 인물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골초였다. 오죽하면 자신의 저서 <계곡만필>에 구구절절 담배 예찬론과 변호의 글을 썼을 정도. 하지만 장인이 보기에는 썩 좋지 않았던 모양. 승정원일기같은 당대 기록에도 담배 문제로 장인과 사위가 사이좋게 투닥거린 내용이 남아있을 정도다. 야사에도 탑전삽화(榻前 揷話)와 구용정 일화가 가장 유명하다.
어느 날 장인과 사위가 인조를 친견하던 중 담배 얘기가 나오자 문득 김상용이 자신의 사위 장유를 보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요초(妖草)인 담배를 그렇게 사랑하는고? 그것은 분명히 밝지 못한 일이니 그렇게 사물에 어두워서 어찌 국사를 담당할 수 있을꼬?"하는 말로써 왕 앞에서 힐책을 하였다. 장유는 이 말을 듣고,
"장인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영초(靈草)를 배척하십니까? 장인께서 만일 담배를 사랑하셨더라면 지금보다 더욱 명상(名相)이 되셨을 것입니다."하는 말로써 응수를 하였다. 인조가 이 모양을 보고 웃으며 둘의 말이 모두 일리가 있다며 중재를 했다.
장유가 어전(御前)에서도 거리낌없이 한 대 피워 물고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담배를 피울 줄 모르고 있었다. 그때 한참 눈여겨보던 김상용은 마지못해 한 마디 건네었다.
"사부빈객(士夫賓客) 장유는 어전에서도 흡연하는가?"
따끔하게 사위를 나무랐다. 장유는 그 뜻을 깨닫고 담뱃대의 불을 껐다. 그러나 김상용은 다시 한번 한마디 했다.
"구용정(口容正)일세."
이것은 입의 모양을 바르게 가지라는 말이다. 담배를 피우려면 입을 삐죽이며 뻑뻑 소리를 내야 하니 이 모양이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유는 그 후부터 어전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이후부터 존귀한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풍습이 일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의견이 달라 투닥거려도 옹서(翁壻)지간의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

4.3. 동생 장신


문제는 장유의 동생 장신인데, 장신은 병자호란 당시 영의정 김류의 아들이자 강화 수비 총책임자인 강도순찰사 김경징과 함께 졸속으로 강화도를 지키다가 어이없게 청군의 침입을 허용한 무능한 인물이였다. 이 와중에 장유의 장인 김상용은 평소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찾으며 일부러 화약에 불을 지펴 손자와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 등과 함께 자폭했다.[11] 결국 자신의 동생이 장인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강화도를 함락시킨 주범이 된 셈. 이 탓에 장신은 자진함으로써 죗값을 받았지만 결국 장신의 형이자 김상용의 사위인 장유도 일생의 큰 오점을 남긴 셈이다.
[1] 김상용의 딸.[2] 임진왜란의 공으로 인해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3]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송팔대가의 고문(古文)을 모범으로 삼은 점, 주자학적인 사고가 규범이 되고 있는 점, 이들 모두가 화려한 가문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한 점 등을 들 수 있다.[4] 한말의 학자 김택영이 고려 시대부터 당대까지의 문장가 9명의 문장 95편을 추려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鈔)라는 책으로 엮었다. 여기에 소개된 인물 9명은 김부식, 이제현, 장유, 이식, 김창협, 박지원, 홍석주, 김매순, 이건창이다.[5] 첫번째 정실은 한이겸의 딸 청주한씨로 이혼하였고, 두번째 정실은 이승효의 딸 경주이씨, 세번째 정실은 윤종지의 딸 해평윤씨이다. 가끔씩 대중역사서를 집필하는 사람들이 환황녀 논쟁을 일으킨 부인을 해평윤씨로 착각하지만, 청주한씨가 환향녀 논쟁을 일으킨 것이 맞다[6] 인조비 인열왕후의 아버지 한준겸의 사촌동생으로 한효순의 아들이다[7] 이에 관해서는 이숙인, '여자들의 귀환', 다산연구소 메일링 제483호 참조[8]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속환을 못할 사람들이 생기고, 많은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和氣)가 상하지 않겠습니까."(『인조실록』)[9] "사로잡혀 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녀들의 본심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의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인조실록』)[10] 칠거지악 중에서도 ‘불순부모(不順父母)’는 제1 계명에 해당한다.[11] 문제는 김상용 사후에 벌어지는데, 이때 김상용이 정말 담배를 피려다가 실수로 폭발 사고가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의도하고 자폭한 것인지에 대해 조정에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국왕 인조는 “칭찬하는 말이 참되어야 죽은 자가 영화롭고 산 자가 사모할 것”이라고 답하는 식으로 그의 순절을 인정하지 않는 투로 말했다. 당시 정황상 다소 당략적인 요소가 짙었던 이 논쟁은 김상용의 자손들이 거칠게 항의하면서 최종적으로는 순절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장유와의 일화에서도 보듯이 생전 본인이 담배를 노골적으로 증오한 점도 순절 쪽으로 기우는데 유리했다. 비슷한 사례로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있다. 술먹고 전투 도중 불화살을 쏘다가 실수로 화약단지에 떨궈 폭사한 것이라는 의혹이 있었다. 어쨌든 이완도 정묘호란 당시 의주성을 지키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자폭한 것으로 일단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