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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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전상엽(全相燁)
생몰
1921년 2월 12일 ~ 2016년 8월 5일
출생지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삼리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전상엽은 1921년 2월 12일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3년 평양의 대동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44년 1월에 일본군 평양사단내 42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당시 일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동년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전상엽은 김완룡(金完龍)·최정수(崔正守)·김윤영(金允永)·박성화 등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고 동년 8월부터는 동지포섭 등의 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사단내 각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그는 학병항쟁 조직의 작전참모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학병항쟁의 계획으로 평양사단 병영폭파 등을 주장하였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운 실정이었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만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계획을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동지인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9체포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자신을 감시하던 던 일본 헌병을 때려눕히고 탈옥에 성공한 뒤, 중국 방면으로 탈출하고자 했으나 2개월 만에 한만국경지대에서 일본 군경에 피체되었다. 1945년 6월 그는 일본군법회의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
이후 고향인 북한에서 항일 투쟁 사실을 높게 평가받고 공직생활을 잠시 했으나 공산주의 체제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조용히 38선 이남으로 넘어와 남한의 체제에 얼마간 적응한 뒤, 가족 역시 남한으로 몰래 데려왔다. 그로부터 얼마뒤 6.25전쟁이 발발했으니, 자신과 가족의 이주를 조금만 지체했다면 전쟁통에 가족과 헤어지거나 북한체제를 떠나는 것이 불가능했 수도 있었으니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25전쟁 중 남한에서는 상대적으로 고학력인 인원은 장교로 차출하였는데, 평양의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게 학도병 훈련까지 받은 전상엽 지사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전상엽 지사는 장교로 차출되어 참전한 6.25전쟁 중 북한군과의 전투에서 수차례 죽을 고비도 넘겼다고 한다. 항일투사였을 뿐아니라 참전용사였던 것이다.
휴전 이후에는 군에 남아 장교로 복무하며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교수를 맡기도 하였고, 최홍희를 비롯한 비슷한 처지의 이북이 고향인 장교들과 가깝게 지냈으나, 이북을 고향으로 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군에서의 진급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껴 중령으로 예편하게 된다. 이후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2016년 8월 5일에 사망했다.
학도병 시절 일본군에 대한 반란 시도, 북한체제에 실망 후 남한으로 넘어온 뒤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6.25 참전 등은 어려운 상황일수록 기꺼이 희생정신을 발휘하고자 하는 성품에서 나온 행동으로,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전상엽 지사가 군제대 후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들어선 어느날 시내버스 라디오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뉴스가 나오자 성토하듯이 승객들이 모두 듣도록 큰 소리로 유신정권을 비판했고 버스기사는 곧바로 버스를 정류장이 아닌 경찰서 앞에 세우고 전상엽 지사를 불순분자로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이런 광경은 당시의 군사독재 시절에는 흔한 일이었고 그만큼 위협적인 환경이었지만 평범한 사회의 일원으로서도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본인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북에서 도망치듯 남한으로 넘어와 아무런 기반도 없이 전쟁까지 겪으며 서울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고 생활을 하였으나, 자녀들은 역시 이북에서 온 부인과 함께 기업체의 대표, 의학박사, 대학교수 등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원으로 키워냈고, 전상엽 지사 역시 항일투쟁과 6.25참전에 대한 이력을 모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에 다행히 노년에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상엽 지사의 6.25 참전기록과는 달리 항일투쟁기록은 모두 이북에서 있었던 일이어서 대한민국 정부에 입증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결국 전상엽 지사 및 동지들의 항일투쟁 사실을 파악하는데 정부가 일본측의 자료도 활용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패전국으로 철수하면서도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죄목과 형량 등의 내용을 담은 서류를 폐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일부 자료는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고 그 자료들이 항일투쟁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전상엽 지사는 90세가 넘은 후에도 테니스를 즐길 정도의 건강체질이었으며 2016년 96세로 별세할 때까지 노년에는 항일투사 중 드문 생존자로서 국가보훈처와 광복회로부터 원로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청년기에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비교적 이른 나이의 항일투쟁, 이후 6.25참전, 그 후 군사독재와 남한의 경제발전 및 대한민국의 민주화라는 주변환경과 가치관이 격변해온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모두 겪은 역사의 증인이라 할만하다. 단, 군사독재에 비판적이었던 전상엽 지사는 말년에 목도한 대한민국의 진보적 분위기가 팽배하는 사회변화에 대해서도 일면 비판적이었는데, 실향민으로서 6.25전쟁을 겪고 공산주의와 싸웠으며, 북한의 몰락을 본 입장에서 북한의 지도층을 우호적으로 대하려하고 공산주의 느낌이 날 수도 있는 부의재분배를 강조하려는 정부 분위기가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저서 <천명天命>에서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경험과 생각을 일부 엿볼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전상엽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1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