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화(독립운동가)
1. 운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성일
박성화는 1921년 11월 19일 함경남도 갑산군 서부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라는 명목에 의해 일본군 평양사단 내 42보병부대에 입대하였다.[1]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그해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그는 김완룡(金完龍)·최정수·전상엽·김윤영(金允永) 등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고 그해 8월부터는 동지를 포섭하는 등 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사단 내 각 부대의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이때 최정수는 학병항쟁 조직의 참모로 활약했다.
그러나 당초 학병항쟁의 계획으로 평양사단 병영의 폭파 등이 제의되었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웠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한국-만주국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 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계획을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 동지인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써 그도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그 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6월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1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 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이후 여생을 보내다가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1993년 1월 29일 인천광역시에서 별세했으며,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 나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박성화
박성화는 1900년 11월 1일 전라남도 나주군 나주면 과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9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에 입대했으며, 1942년 한국광복군 2지대에 편입되어 제3구대 제1분대에서 활동을 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후 나주로 귀환하여 조용히 지내다 1970년 7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박성화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당시 일본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