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환
1. 오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정규환
정규환은 1894년 8월 10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청호면 사동(현 오산시 오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수원군 성호면 오산리 장터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3월 29일 오후 5시경, 그는 이성구(李成九)·이규선(李圭璇)·김경도 등과 함께 수백명의 군중을 규합, 면사무소와 일경주재소 등을 습격하여 면장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자 도피한 그는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으며, 이후 붙잡혀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21년 1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화성군 오산읍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10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정규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 함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정규환
정규환은 1900년 9월 11일 경상남도 함양군 백토면 상백리(현 수동면 상백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는 걸 지켜보고 고재경(高載景), 정재원 등을 동지로 규합한 뒤 해외 독립운동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에 사는 부호 차우진(車佑鎭)을 대상으로 삼고 1919년 11월 15일 오전 1시경 차우진의 집에 침입해 독립운동을 하는 결사대원이라 소개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차우진은 가진 돈이 없다며 음력 10월 1일에 일금 1만 원을 제공할 것을 약정하였다. 이후 12월 12일 약정한 독립운동 자금을 받기 위하여 약속 장소로 갔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1월 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강도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뒤 1921년 3월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가석방되었고, 그해 4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정규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