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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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정몽호(鄭夢虎)
본관
진주 정씨[1]
생몰
1898년 10월 4일 ~ 1984년 12월 13일
출생지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2]
사망지
경기도 수원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몽호는 1898년 10월 4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2일 설천면 문의리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하동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뒤 그와 정순조·정학순·윤주순(尹柱舜) 등을 초대했다. 이에 따라 그는 이예모의 집에서 동지들과 만나 만세운동을 남해읍에서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서당 학생과 인근 주민들에게도 이 계획을 알리고 참가를 권유했다.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군중은이 남양리 노상에 모였다. 이예모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군중은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하여 만세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열이 고현면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알리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을 안 시위대는 명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장꾼으로 가장한 그는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들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시위군중은 군청·우체국·학교·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고,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시위군중은 이 사실도 모르고 날이 저물어서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8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수원으로 이주하여 조용히 지내다 1984년 12월 1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몽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첨정공파.[2] 인근의 금음리·노량리·진목리와 함께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 국문학자 정병욱과 독립유공자 정순조·정임춘·정학순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