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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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동래 정씨 경주 정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 등 시조를 달리하는 네 계통이 있다.
2. 역사
진주 정씨의 원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 6촌 중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다. 그러나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진주정씨가 여덟 파가 되어 진주8정(晋州八鄭)이라고 한다. '''진주 정씨(晉州 鄭氏), 진양 정씨(晉陽 鄭氏)'''는 경상남도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동래 정씨 경주 정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 등 시조를 달리하는 네 계통이 있다. 8정(鄭)을 편의상 크게 나눠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으로 크게 구분하는 것이 통설이다.
3. 번영
시조 영절공(英節公) 정예(鄭藝)는 고려(高麗)의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다.
고려(高麗)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정시양(鄭時陽), 병부상서를 역임(歷任)한 정신열(鄭臣烈), 판도판서인 정임덕(鄭任德), 예의판서의 정유(鄭愈),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수(鄭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정록, 찬성사를 지낸 정을보(鄭乙輔)[1] 등이 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고, 중국(中國)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목화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2] 정천익(鄭天益)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상신 1명(정분), 대제학 2명(정이오,[3] 정경세),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 59명과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4] 등의 청백리를 배출해냈다.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경세(鄭經世),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던 수재.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여 공(功)을 세웠고 성리학(性理學) 뿐만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를 형성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명장 정기룡(鄭起龍)장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상주성 탈환, 정유재란 때의 성주, 초계, 의령성 탈환 전투에도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남해안을 방어하던 중 통영진중에서 숨졌다.
4. 본관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다. 663년(문무왕 3)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으며,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에 다시 강주로 환원되었고, 983년(성종 2)에 12목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개편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896년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도 진주목의 토성(土姓)으로 정(鄭)·하(河)·강(姜)·소(蘇) 4성이 기록되어 있다.[5] 한 고을에서 통혼이 매우 잦았기 때문에 종친회 어르신들은 하씨, 강씨, 소씨와는 한 집안처럼 여기며 통혼을 꺼린다.
5. 분파, 계파
진주 8정(晉州八鄭)으로 불렸던 진주정씨(晉州鄭氏)는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4계통, 8파로 계대(繼代)를 이어왔다.
- 예계: 정예(鄭藝)는 고려 통합 삼한벽상공신 광록대부(光祿大夫)·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를 지냈다.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문종조 문신인 문익공(文翼公) 정시양(鄭時陽)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 충장공파(忠莊公派): 시조 정예(鄭藝)는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예계, 헌계, 장계의 큰집이다. 파조는 조선 세종~단종조 문신인 14세손 정분(鄭苯)이다.
- 첨정공파(僉正公派): 시조 4세손 정중공(鄭仲恭)은 정시양의 증손으로,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시조 6세손 정안교(鄭安校)는 정중공의 손자로, 고려 때 판내부사(判內府事)를 지냈다.
- 헌계: 시조 9세손 정헌(鄭櫶)은 정시양의 8대손으로, 고려 말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정헌의 손자 정택(鄭澤)은 고려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 우곡공파(愚谷公派): 시조 11세손 정온(鄭溫)은 고려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 어사공파(御史公派): 시조 11세손 정택(鄭澤)은 고려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 지후공파(祗侯公派): 시조 정신(鄭侁)은 고려 때 지후(祗侯)를 지냈다.
- 장계: 시조 10세손 정장(鄭莊)은 정시양의 9대손으로, 고려 말엽에 통종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정장의 증손 정척(鄭陟)은 조선 태종 때 판윤을 지냈으며, 정장의 현손 정성근(鄭誠謹)은 성종 때 직제학을 지냈다.
- 공대공파(恭戴公派): 시조 정장(鄭莊)은 고려 때 첨추(僉樞)를 지냈다. 파조는 조선 태종~성종조 문신인 13세손 정척이다.
- 자우계: 시조 정자우(鄭子友)는 호장(戶長)을 지냈다. 정자우의 6대손 정신열(鄭臣烈)이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정자우의 8대손 정진경(鄭晋卿)은 중랑장을 지냈다.
- 은열공파(殷烈公派): 시조 정자우(鄭子友)는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
6. 주요 인물
- 정이오(鄭以吾) -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문신(판한성부사 예문관대제학)
- 정분(鄭苯) - 조선시대의 문신(우의정)
- 정온(鄭溫) - 고려시대의 문신(자헌대부)
- 정척(鄭陟) - 조선시대의 문신(지중추원사)
- 정성근(鄭誠謹) - 조선시대의 문신(좌부승지)
- 정경세(鄭經世) - 조선시대의 학자
- 정기룡(鄭起龍) - 조선시대의 무신(울산부사)
- 정사제(鄭思悌)(1556) - 조선시대의 의병장
문과 선조 24년 (1591) 식년시 병과 1위
- 정필달(鄭必達) - 조선시대의 문신(첨지중추부사)
7. 과거급제자(조선시대)
- 정재춘(1680): 문과 경종 3년 (1723) 식년시 갑과 장원급제
- 정흔(1566): 문과 광해군 8년 (1616) 별시 갑과 장원급제
- 정백창:문과 인조 4년 (1626) 중시 을과
- 정사제(1556): 문과 선조 24년 (1591) 식년시 병과 1위
- 정필달(1611): 문과 인조 23년 (1645) 별시 을과
- 정종학: 문과 고종 13년 (1876) 중시 병과
- 정사현(1506): 명종 4년 (1549) 식년시 병과
- 정사량: 문과 명종 1년 (1546) 증광시 병과
- 정윤(1852) 문과 고종 30년 (1893) 별시2 병과
- 정휘진(1719): 문과 영조 17년 (1741) 식년시 병과
등 모두 252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59명, 무과 44명, 생원진사시 147명, 음양과 1명, 주학 1명)8. 대표적 인물
조선시대에 상신(相臣) 1명, 대제학 1명, 호당2명 청백리3명 문과 급제자 59명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 단종 때 우의정에 올랐다가 계유정난으로 사사(賜死)된 정분(鄭苯)을 들 수 있으며, 이밖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우고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낸 정경세(鄭經世), 임진왜란 때 순사(殉死)한 정사제(鄭思悌), 세종에서 세조 대에 걸쳐 충청도관찰사와 중추원지사를 지내고 서예로 이름 높았던 정척(鄭陟), 척의 아들로 성종 때 효행과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정성근(鄭誠謹), 선조 때 울산부사 무신 정기룡(정무수), 숙종 때 문신 정필달(鄭必達) 등이 있다.
현대의 인물로는 정일형(유엔총회 한국대표, 국회의원, 외무장관, 신민당부총재) 박사와 그의 아들 정대철(국회의원)이 있으며, 그외 국회의원으로 정세환, 정헌주, 정준, 정상용, 정균환, 정동호, 정상열, 정갑주, 정재완, 정순덕, 정성호 등이 있고, 서울시장을 역임한 정상천 변호사도 진주정씨이다. 또한 법조계에서는 정기승(대법판사), 정창훈 (검찰총장)과 변호사로 정덕기, 정창훈 등이 있다.
학계에서는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원식 총리가 있으며, 정정환(부산대 대학원장), 정운오(미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정재환(법학박사, 동아대 총장), 정수봉(법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재각(문학박사, 동국대 총장), 정동규(약학박사, 숙명여대 약대 학장), 정요한(이학박사, 조선대 교수) 등이 있고, 재계에서는 정주영(부산상공회의소 회장), 정재구(제일제당 사장) 등이 있다.
9. 집성촌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구천리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 정포리
전라남도 광양시 골약동 중동리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조양리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 서유리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덕산리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덕임리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
강원도 홍천군 서면 길곡리
전라북도 익산시 남중동 인북로
10. 항렬
- 충장공파
- 은열공파
11. 인구
1985년 55,464가구 231,289명
2000년 74,777가구, 238,505명
2015년 진주 정씨 197,242명 + 진양 정씨 127,279명 = '''324,521명'''
12.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
인종 후궁 혜빈 정씨
석보군(정종의 서자) 사위 정윤서
익양군(성종의 서자) 사위 정지하
의령옹주(태조의 서녀) 사위 정소
13. 참조
https://www.segye.com/newsView/20130101022008
[1] 조일신이 배경이라 집안 말아먹을 뻔 했다.[2] 다만 문익점의 목화 붓두껍 반입 이야기는 후대에 최무선의 일화를 보고 베낀 것일 가능성이 높다.[3] 정을보의 증손, 정분의 부친으로 시문으로 명망이 높다. 여말선초에 고려와 같이 망할뻔하던 집안을 동향 동갑내기인 하륜과 태종 줄을 잘 타서 살려놨다.[4] 그 유명한 창경궁 통명전 지당 구리수통 사건의 주인공.[5]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