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술원

 


성명
정술원(鄭述源)
자 / 호
중덕(仲德, 重德)/ 소송(小松)
본관
연일 정씨
생몰
1860년 10월 12일 ~ 1931년 3월 15일
출생지
충청도 청풍도호부 북면 월림리
(현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1]
사망지
충청북도 제천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술원은 1860년 10월 12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북면 월림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출신이다. 그는 유인석의 문인으로, 1896년 정월 초하루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의 막하로 달려와 참여했다. 그는 곧바로 정월 5일 안홍원(安鴻遠)과 함께 정탐을 나가 의병진에 보고했다. 그리고 이춘영(李春永)의 종사관이 되어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뒤이은 전투에서 이춘영이 전사했고, 1896년 4월에는 고종의 의병 해산 조칙이 내려지자 의병대가 해산되었다. 이후 그는 유인석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여 후일을 기약했다.
1905년 6월, 유인석에 의해 약장(約長)으로 임명된 그는 정운경이 그 해 9월 의병을 일으켰을 때 종사관으로 참여했다. 정운경 의진은 단양·제천·영춘·청풍의 4개 군 일대에서 3∼4백 명의 장병들이 모여들었으며, 이 때 정운경은 의병진의 부서를 정하고 인근 각지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일 전투를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전투태세가 정비되기 전에 원주진위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붙잡혔다. 정운경이 군부로 압송되어 유배를 가자, 정술원은 다시 이강년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사한재서(司翰裁書)를 담당하면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강년이 청풍 작성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처형되자, 그는 이강년의 가족을 자신의 동리로 데려와 돌봤으며, 이후엔 자택에서 은거하다 1931년 3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정술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연일 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정운경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