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경(독립운동가)

 


성명
정운경(鄭雲慶)
자 / 호
화백(和百) / 송운(松雲)
본관
연일 정씨
생몰
1861년 2월 9일 ~ 1939년 2월 2일
출생지
충청도 청풍도호부 북면 월림리
(현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1]#
사망지
충청북도 제천군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운경은 1861년 2월 9일 충청도 청풍도호부 북면 월림리(현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동림리)에서 송강 정철의 후손인 아버지 정희원(鄭羲源)과 어머니 원주 원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재종숙 정일원(鄭一源)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24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부인 한산 이씨가 두 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르려는 뜻을 접고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891년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고향을 떠나 단양군 어상천면 연곡리로 이주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동학은 겉으로는 의병을 주창하면서도 안으로는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자"로 규정하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그해 9월 인근의 유생들과 의논하여 통문을 돌려 동학농민군에 대항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수령을 찾아가 계책을 논의헀으나 신통한 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에 적극 동조하는 유생인 허준, 권진 등과 함께 야음을 틈타 궐기하여 동학도 네 사람을 체포하여 수령에게 바쳤다. 그러나 수령이 그 해결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자신이 직접 동학도 4명을 죽이고 경내의 동학접소를 모조리 불태우고 교도들을 귀가시켰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벌어지자, 그는 '격고사림문'(檄告士林文)을 지어 주민들에게 거병을 촉구했다. 이후 무리 수백 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결성한 뒤 1896년 1월 유인석의 제천의진에 가담해 전군장을 맡아 청풍의 북창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1896년 4월 13일 제천에서 장기렴이 이끈 관군에게 의병대가 패한 뒤 전세가 크게 기울자, 그는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후 유인석의 지시에 따라 청나라로부터 군사 원조를 얻기 위하여 박정수, 이종호와 함께 천진, 북경 등으로 파견되기도 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이후 그는 반년 남짓한 동안 만주를 전전하다가 황해도 평산에 머물면서 학동들을 가르치며 생활하다가 1897년 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은거 생활을 하던 그는 1903년 국가에서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경매하려 하자, 농민의 입장에 서서 부당한 관권에 대항하였다. 1904년에는 제천을 중심으로 일진회가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유인석의 지도에 따라 반외세적 성향의 향약을 실시하며 문란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민중의 항일정신 고취하는데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그는 의병을 재차 일으켜 원용팔과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원용팔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단독으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모집하고, 종사와 포수들을 사방으로 보내 병력을 모으니 포군과 민군이 도합 300~400명에 이르렀다.
한편 그는 중앙과의 관계에 영향력이 있던 심상훈(沈相薰)의 명성과 후광을 빌려보려고 장익환을 시켜 심상훈을 찾아가 그를 의병진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심상훈이 단양의 매포에 이르러 의진을 이탈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또한 그의 부대는 읍내로 진출하며 이강년에게도 사람을 보내서 호응을 청하였다. 그러나 10월 13일에 급히 출동한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의병은 해산되고 그도 체포되어 영춘에 구금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는 압송 후 미결수 상태에서 1년 가까이 구금되었다가 1906년 9월 평리원에서 1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황해도 황주에 있는 외딴섬인 철도(鐵島)로 귀양을 떠났다. 그는 유배되어 있던 동안 견룡재(見龍齋)에서 학동을 가르치며 동료들과 서신을 통하여 교류하거나, 제천의 지인들이 다녀가는 편에는 동지들에게 편지를 전하여 의병 실패의 울분을 나누기도 하였다.
1907년 11월, 고종의 은사령을 받아 유배생활을 마치고 귀향할 수 있었으나 여비가 부족하여 황주에 머물다 1908년 2월에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선유사에게 주는 글을 쓴다거나, 남의 부탁을 받아 의병을 독려하는 격고문을 쓰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영춘에서 종중의 위토를 경작하기 위하여 제천 하소리로 옮겨 살다가 만년에는 고향인 월림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1939년 2월 2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운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연일 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정술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