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석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종석'''
'''鄭鍾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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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5년 9월 21일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
<color=#fff> '''사망'''
1973년 1월 20일
충청북도 옥천군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종석은 1905년 9월 21일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1월 3일 당시 광주 부동정에 소재했던 최규창의 하숙방에서 장재성, 왕재일 등 광주고보생, 광주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성진회의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서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와 동지포섭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회원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회원 정남균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1928년 2월, 그는 졸업을 앞두고 최규창·이동선(李東宣) 등 광주내 각 학교 학생지도자 12명과 함께 지용수(池龍洙)의 집에 모여 졸업 후 교직 등 사회에 나가서도 연락을 긴밀히 하고 항일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1928년 3월 졸업 후, 그는 광주농고 독서회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성진회 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붙잡혔다.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옥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3년 1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정종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991년 4월 13일 광복회 충북지부는 동이면 평산리 갈골 마을에 정종석 추모비 제막식을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