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성
1. 개요
한국의 공산주의자이다. 한국의 항일운동가이다.
2. 생애
장재성은 1908년경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 금계리(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에서 아버지 장원용과 어머니 최예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광주서석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6년 11월에 한국 최초의 학생 비밀 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해 사회과학을 연구했으며 회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성진회는 이듬해 3월에 비밀 유지 목적으로 형식상 해산되고 각 학교 별로 학생운동의 지도부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직 책임자가 되었다.
광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장재성은 일본 중앙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8년 4월 광주고등보통학교 및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경유학생 모교 분규사건 대책강구회의 특파원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후 성진회 회원을 중심으로 동맹휴학중앙본부를 설치하고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이 일이 문제가 되면서 1929년 6월 중앙대학에서 퇴학당한 그는 귀국한 뒤 차재정이 책임비서로 있던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또한 광주의 여러 학생 조직들을 독서회로 통합시키고 각 학교의 독서회를 통제하는 중앙지도기관으로 독서회중앙본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책임비서가 되어 광주 일대의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한, 일 학생 사이에 충돌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장재성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어 독서회 중앙본부의 조직망을 통해 학생을 동원하고 격문을 배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장석천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광주 학생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와 함께 학생 시위를 이끌었던 강석원은 후에 "장재성이 학생들의 투쟁대상을 광주중학교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독립으로 전환시켰다"고 회고했다.
장재성 등이 이끄는 시위 지도부는 시위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했다. 11월 12일부터 벌어진 2차 시위는 12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고 간도지방까지 번져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이로 인해 26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된 장재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고, 대구 고등법원에서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 관련자 중 최고 형량이었다.
1934년 4월 만기 출옥한 장재성은 일본으로 가서 니혼대학 상경과를 졸업했다. 이후 1936년 6월에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합회 결설에 참가했고 다카쓰 마사미치(高津正道)의 지도를 받으며 인민전선 전술에 입각한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귀국 후 광주학생항일운동 주동자들과 비밀리에 조직을 결성하려 했으나 1938년 2월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일제 당국에게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철저한 감시를 받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광복 직후, 장재성은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위원,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역임했으며, 1945년 12월에는 광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46년 2월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전남대표로 참석했으며, 1946년 3월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전남지부 결성준비회의 총무부에서 활동했다. 이후 좌익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48년 남한 만의 단독선거가 진행되자 이에 반발하고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고자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에도 3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다가 1949년 7월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다가 당국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그는 1950년 7월 5일 좌익 수형자 120명과 함께 무등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3. 기타
장재성의 여동생 장매성은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가담한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반면 장재성은 1962년 독립유공자 표창 대상자 208명에 포함되었지만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되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2018년 독립유공자 훈포장 선정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정부는 2019년 3월 보류 처리했다. 국가보훈처는 이에 대해 "광복 이후 행적 이상으로 보류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