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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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왕재일(王在一)
본관
개성 왕씨
생몰
1904년 1월 19일 ~ 1961년 2월 14일
출생지
전라남도 구례군 방광면 천변리
(현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 천변마을)[1]
사망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왕재일은 1904년 1월 19일 전라남도 구례군 방광면 천변리(현 광의면 지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6년 9월 식민지배하의 민족차별에 대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교생 장재성, 광주농업학교 재학생 박인생 등과 동지가 되어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계획하였다.
이후 1926년 11월 3일 광주 부동정에 소재한 최규창의 집에서 그를 비롯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생 16명이 모여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다. 그는 성진회의 총무를 맡았으며,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와 동지포섭 등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회원 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었고, 주동학생인 그와 장재성·박인생 등의 졸업으로 인하여 조직 내용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27년 3월에 회원 정남균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벌어지자, 일제 경찰은 성진회와 관련된 인사들을 시위의 배후로 지목하여 전격 체포했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고,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자 이에 항소하여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광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1년 2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왕재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헀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개성 왕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