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준'''
鄭儁'''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9년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동부동
<color=#fff> '''사망'''
1919년 4월 8일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정준은 1889년생이며 평안북도 강계꾼 강계읍 동부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당시 강계읍내 영실학교(英實學校) 교사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3.1 운동 소식을 접한 그는 동료 교사 김경하와 읍내 교회의 장로이자 명신학교 회계인 한봉민과 협의하여 뜻을 같이 하고 21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4일 영실학교 사무실에 모여 만세운동에 책임지고 희생할 것을 각오한다는 내용의 연판장(連判狀)을 작성하였고 태극기 원판을 새겨 하룻밤 사이에 태극기 2천장을 찍어내는 등 주도면밀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거사준비에 착수한 지 2주일만인 1919년 4월 8일 약속된 오전 11시 남장대(南將臺) 예배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이골목 저골목에 매복하여 있던 학생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한아름씩 안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집집마다 돌리며 내닫기 시작하였다. 마침 장날이어서 장꾼이 이에 합세하므로써 군중의 수는 증가되었다.
길거리는 태극기의 물결로 뒤덮였고 만세시위 대열은 예정대로 남문(南門)에서 북문(北門)까지의 큰 거리를 행진하였다. 이때 그는 명신학교·영실중학교 등 학생대열의 선두에서 시위행렬을 지휘하며 열광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정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