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독PD
1. 개요
반제 반독점 민중 민주주의(Anti Monopoly Capitalism. '''AMC''')을 주장하던 그룹. '''제독PD''', '''반독점PD'''라고도 불린다.
2. 사상
NLPDR계파의 한 분파이며, 대한민국 사회를 일제 시기와는 다른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로 규정한다. 신식민지사회는 '예속의 심화'에 기반한 자본주의발전을 불러오며, 1980년대 시점에서 한국자본주의 정도는 그 착취성에 따라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민족모순은 남아 있기에 대한민국은 본질적으로 반식민반자본주의사회이며, 따라서 역시 당대 혁명의 단계를 봉건성과 독점자본주의성을 모두 해결하는 민중민주주의혁명으로 보았다. 이론적으로는 박현채의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 및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이들은 NL과 달리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동시에 강조한다. 이 계파의 이론은 엄밀히 말하여 NLPDR의 하위 범주에 속했으나, NLPDR 외의 계파에 속한 운동가들에게도 일정 영향을 주었지만, 제3차 사회구성체 논쟁에선 소수였다. 당시 단체로는 서울사회과학연구소가 있었으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및 철학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3. 역사
80년대 말 노동계급의 노동운동가들은 인민노련과 함께 한국노동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가들은 자체적으로 활동하다가 92년 '대장정학생연합'(약칭 '''대장정''')이라는 학생 정치조직을 결성하며 제파PD그룹을 제치고 PD그룹 다수파로 성장한다. 이들은 NL그룹을 비판하면서도, 이들이 주도하는 한총련에 참여하는데[1] , 고려대, 성균관대, 성신여대 등 서울 북부지구에서 강세를 보여 한총련의 지역조직인 북부총련 의장(박용진)을 배출하기도 했다.[2] 연세대 사태 등에서 한총련 주류를 비판하는 등 한총련 내 야당의 역할을 하였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마오이즘의 영향을 받은 알튀세르주의를 받아들여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는 이탈하게 되며, 페미니즘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운동 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소위 백인위)를 주도하며 고려대 총학생회장, 참여연대 활동가 등의 성폭력 고발을 주도한 것도 이들이다.
결국은 한총련 개혁을 포기하고 좌파학생운동 결집을 목표로 '전국학생연대회의'(일명 YD)를 건설한다.[3] 서울대에서는 21세기와 교대로 총학생회를 수권할 정도로 서울지역 학생운동에는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PD그룹 전체를 묶어내는 데는 실패하고, 90년대 후반 이후에는 단일 정파 조직이 되어 사회당계열의 전학협과 PD학생운동을 양분하다가, 다른 PD 정파들이 모조리 망하고...결국 홀로 남아 전국학생행진이 되었다.
4. 현황
사회진보연대[4] 에 이 그룹 출신들이 많이 진출하였고, AMC 그룹 자체는 진보정당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5] 대학 졸업 후 개별적으로 진보정당 건설에 뛰어들어 현재 정의당에서 활동중인 김종철, 강상구 등 90년대 학번들도 대장정 그룹 출신이다.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민주노총에서 활동 중인 활동가도 많다.
[1] NL도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함께 투쟁해야 할 동지라고 보았다. 이제 반대해 NL과는 상종하지 않은 그룹이 아래 나오는 전학련-전학협 계열 [2] 좌파 계열 의장도 배출되던 전대협 시절과는 달리 NL이 절대 다수였던 한총련에서 지구의장이 PD에서 배출된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3] 이후에도 NL 혁신그룹 소위 노선대(반미구국 노학연대선봉대)그룹와 행동을 같이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NL의 패권주의에 학을 때며 더 이상의 연대를 포기하기도. 이때의 혁신그룹이 이후 통합진보당 사태의 메인 빌런이 된 경기동부연합이 되어 과거 자신들이 비판하던 한총련 주류보다 더한 짓을 했으니 차라리 잘된 것일지도...[4] '현실과 과학'에 참여하던 윤소영 교수 등이 주도[5] 백기완 선본, 민중당 등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