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영공
1. 개요
제나라의 제24대 군주. 제경공(齊頃公)의 아들. 제장공의 아버지.[1] 이때 내나라가 멸망했다고 한다.[2]
2. 진(晉)나라와의 관계
제영공 원년(기원전 581년), 진(晉)나라의 군주 진여공(晉厲公)은 정나라를 쳤다.
제영공 4년(기원전 578년), 진 여공은 진(秦)나라를 쳤다.
제영공 6년(기원전 576년), 제영공은 국좌를 보내 진 여공과 척땅에서 회맹했다. 같은 해 겨울 고무 를 보내 진(晉)나라의 대부 사섭과 함께 오(吳)나라 종리 땅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7년(기원전 575년), 제영공은 진 여공과 사수 땅에서 회맹했는데, 그 결과 국좌에게 진 여공과 함께 정나라를 치게 했다.
제영공 8년(기원전 574년), 제영공은 진 여공과 함께 정나라를 치고 진나라는 가릉 땅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였다. 같은 해 겨울 제영공은 또 사람을 보내 진 여공과 함께 정나라를 쳤다.
제영공 9년(기원전 573년), 진나라 대부 난서(欒書)가 진여공을 시해하고 공손 주(周)를 올리니 그가 바로 진도공(晉悼公)이다. 이때 제영공은 최저(崔杼)와 함게 허정 땅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10년(기원전 572년), 진 도공이 송나라의 팽성을 칠 때 제나라가 오지 않자 진 도공이 제나라를 치니 제영공은 태자 광을 인질로 보냈다. 같은 해 여름 제영공은 최저를 보내 진나라가 정나라를 칠 때 참여했다.
제영공 11년(기원전 571년), 가을 진나라 대부 순앵(荀罌)[3] 이 제후들과 적땅에서 회맹했는데, 제나라, 등(滕)나라, 설나라, 소주(小邾)가 참여하지 못했다. 다시 회맹해 정나라를 칠 때 노나라 대부 중손멸이 순앵에게 정나라 땅 호뢰에서 성을 쌓자고 건의해 순앵이 거기에 따랐다.
제영공 12년(기원전 570년), 진 도공은 정나라를 복속시키고, 오나라와 화친했고, 제후들과 계택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16년(기원전 566년), 태자 광과 진 도공은 척땅에서 회맹해 진(陳)나라를 구했다.
제영공 17년(기원전 565년), 대부 고후와 진 도공은 형구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18년(기원전 564년), 겨울 태자 광이 진 도공과 희땅에서 회맹했다.
제영공 19년(기원전 563년), 대부 고후와 태자 광이 진 도공과 오나라의 지 땅에서 회맹했다. 같은 해 태자 광이 진 도공과 함께 정나라를 쳤다.
제영공 22년(기원전 560년), 대부 최저는 진 도공과 진(秦)나라를 쳤다.
제영공 23년(기원전 559년), 주영왕이 제영공에게 하사품을 내렸다.
3. 노나라와의 치열한 전쟁
제 영공 24년(기원전 558년) 여름, 노나라의 북비 땅을 쳤다.
제 영공 25년(기원전 557년) 봄, 다시 노나라의 북비 땅을 쳤다. 가을에도 마찬가지.
제 영공 26년(기원전 556년) 가을, 제나라는 그 길로 노나라의 도 땅을 쳤다. 고후는 노나라의 방 땅을 포위하고 같은 해 겨울 주(邾)나라와 함께 노나라를 쳤다.
제 영공 27년(기원전 555년) 가을, 또 노나라의 북비 땅을 쳤다.[4] 그러자 진(晉)나라는 그 꼴을 그냥 놔두지 않고 노나라를 돕기 위해 송나라, 위나라, 정나라, 조나라, 거나라, 주나라, 등나라, 설나라, 기(杞)나라 소주 등과 함께 제나라를 치니 제나라는 평음 땅에서 막았다. 그러자 한 사람이 간했는데, 제영공은 듣지 않았고, 결국 패해 임치로 달아났다. 안영이 그 일을 두고 또 간했으나 듣지 않아 임치성은 지켰으나 성이 불에 타는 것은 막지 못했다.
4. 제영공의 죽음
제영공 28년(기원전 554년), 노나라 여자 안의희의 잉첩 성희에게서 태자 광을 낳았는데, 중희가 아를 낳자 융희를 총애한 그는 아를 그녀에게 맡겼다. 그리고 융희는 아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중희가 반대했고, 제영공이 반대했다. 그러다가 제영공이 병나자 최저가 태자 광을 세우니 그가 바로 제장공이다.
[1] 그는 달리 제 후장공이라고도 한다.[2] 즉 산동 반도 지역을 완전 장악했다는 말이다.[3] 씨를 지씨로 해서 지앵이라고도 불린다. 지백의 조상이다.[4] 여태껏 북비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