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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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주시대, 춘추시대에 장강 하류에 존재했던 국가. 초반에는 공오(工吳), 구오(句吳)와 같은 명칭으로 불렸다. 수도는 오.
2. 역사
《사기》권30 오태백세가에 의하면 고공단보의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 중옹이 삼남 계력(季歷: 주문왕의 아버지)에게 제후의 자리를 양보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국가이다. 태백이 죽고 그에게 자식이 없어 중옹이 뒤를 이었고, 그의 후손들이 대를 이었다고 한다. 무왕(주)은 큰할아버지 태백과 작은할아버지 중옹의 자손을 찾다가 마침내 중옹의 자손인 주장(周章)을 찾아내 그를 오에 정식으로 봉하고 주장의 아우 우중(虞仲)은 우나라(虞)에 봉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본래 주 왕실과 같은 희성의 제후였던 우(虞)의 시조 태백에 가탁한 것으로 실제로는 중원 지역의 거주민과는 이질적인 민족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오월 지방의 토착민들은 중원 사람들과 풍속이 상이하여 단발 머리를 하고 문신을 했다고 하며, 피부색이 검고 키가 작은 민족이었다고 한다. 이 지역으로 이주한 황하 중류의 화하인과 월인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월인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전신인 구오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국가 명칭이 중원 국가와는 달리 1음절이 아닌 2음절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절강성에서 발견된 오나라의 유물에는 오나라 왕의 성씨가 희성 고발씨(姬姓姑發氏)라고 적혀 있어서, 일단은 오나라 왕실이 주나라 왕실과 같은 집안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사실 아닌 게 아니라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도 웬만큼 확실하지 않고서야 생면부지의 족속을 같은 일족, 그것도 윗대 큰어른의 자손으로 인정할 리가 없다[4] .
제19대 군주 수몽 때부터 중원국과는 달리 초나라처럼 왕호를 사용하였다. 초의 견제 세력을 후방에 두기 위해서 진(晉)나라에서 여러 인재와 중원에서 쓰이던 전차를 도입했다. 그 결과 기원전 6세기경부터 나라가 크게 흥성하기 시작했고 오왕 수몽 사후에 오왕 제번 때에 이르러 수도를 오로 천도하였으며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대에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한다.[5]
쿠데타로 집권한 합려는 선진적인 중원의 문물이나 인적 자원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제나라 사람으로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 또한 합려에 의해 초빙되어 중용되었다. 합려는 초나라로부터의 망명객인 오자서를 등용하여 초나라를 멸망 직전으로까지 몰아넣는 등의 활약을 펼쳤으나, 초나라 신하인 신포서의 간곡한 부탁으로 지원하러 온 진(秦)나라의 지원군과 국가가 빈 틈을 노린 월나라 왕 윤상의 기습 및 동생 부개가 일으킨 봉기에 의해 후퇴해야 했다. 합려는 이를 설욕하기 위해 윤상의 아들 구천에게 전쟁을 걸다가 전사하였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공격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으며, 각고의 노력 끝에 월왕 구천을 물리치고 위에 붙어있던 대국 제를 조져버리며 큰 회맹을 열어 패자의 칭호를 받기까지에 이르렀으나, 그 틈을 노린 구천의 공격으로 인해 부차는 자결하고, 오나라는 기원전 473년에 멸망하고 만다. 즉 '''전성기와 멸망 시기가 같다.'''
3. 전략과 전술
타국의 군주가 죽어 상중(喪中)을 틈타 공격하는 게 오나라의 상투적인 전략이었다. 한 나라의 정권이 교체된 틈을 타 공격하는 것이 비겁한 것 같지만 이 또한 하나의 전략이다. 합려는 초평왕이 죽자 그 틈을 타 초나라를 공격했고, 월나라 윤상이 죽자 그 틈을 타 월나라를 공격했다. 그의 아들 부차 역시 제나라 포목이 군주 도공을 시해한 틈을 타 제나라를 공격했다.
오나라는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나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나라인데, 기존의 춘추시대에서는 전쟁의 주역은 '전차를 몰 줄 아는 소수의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오나라는 다른 중원의 국가들과는 달리 영토가 평지보다는 늪, 숲 등의 지형이 많았고 따라서 다수의 평민 보병들이 전쟁의 주역이었다. 이것은 보병 전술을 강조하는 손무와 환상의 시너지를 이루어서 손무의 시기에 주변국들을 완전히 털어버렸고, 이후(전국 시대) 중국의 전쟁 패러다임 자체가 보병 위주로 완전히 변화하였다.
4. 역대 군주
《사기》권30 오태백세가에 따르면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5. 기타
이 오나라의 이름으로부터 장쑤성 일대를 오(吳)라고 부르는 관례가 생겼으며, 후일 등장한 오나라들과 성씨 오씨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나라가 망한 이후 주 천자가 부차의 후손에게 오성을 하사했기 때문. 다만 본래 국성인 희성이 아닌 오성을 내린 것은 주나라 왕족으로서의 신분을 박탈했다는 의미도 있다.
오월 지방에 철광산이 있었는지 당시 우수한 철기 무기를 가진 것으로 이름났다. 간장, 막야의 원산지이기도 하다.[8]
일본 히로시마 현에 있는 구레(吳)라는 도시도 이 한자를 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오나라 사람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거나 밀고 험악한 문신을 많이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수전(水戰)을 위해서는 머리가 짧은편이 무척 유리하고, 교룡을 쫓기 위해 문신을 했다고 한다. 이는 오왕 합려가 왕자 시절 초나라와 싸울때 계략을 위해 초나라처럼 머리가 긴 사람을 굳이 찾았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9][10]
과거에는 풍습이나 묘사 등이 일본과 비슷하다는 의견도 있었고, 소중화 사상을 가졌던 몇몇 일본인들이 이를 인용해 일본의 시조인 진무가 오나라 출신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11] 이외에도 몇몇 일본 우익들은 야요이인 들은 중국 장강 유역 출신이고 한반도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유전적인 검사결과에 의하면 일본과는 관계가 없지는 않고 일본 서부지역에 어느정도 영향을 끼친것은 분명한 사실인듯하다. 물론 이 당시에는 일본으로 직행하기보다는 한반도를 거쳐 가는것이 더 많았고, 애초에 야요이 시대보다 후기인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에도 한반도 출신 이주민들이 일본으로 많이 흘러들어간 사실이 일본서기에서도 나타나고있는지라 일본 극우들이 주장하는 한반도와 관련이 없다는 썰 자체는 자국의 기록도 무시한 멍청한 소리이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ŋʷˤa/. 현대 발음은 wú. 吳는 현대의 한자이며 금문 표기는 이렇다. 참조[2]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오나라 희성은 고발씨(姑發氏)다.[3] 춘추좌씨전에 오나라의 언어가 중원의 언어와 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체로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이나 타이카다이어족이라는 추정이 나온다. [4] 이처럼 비(非) 한족계가 대다수인 나라를 한족 왕실이 통치한 사례로는 전국시대 국가인 중산국(中山國)이 있는데, 이민족인 백적(白狄)이 세운 국가이지만, 오나라처럼 군주의 성씨가 희성(姬姓)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런 사례가 몇번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훨씬 후대인 서기 6,7세기 경에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투르판 일대에 존속한 고창국(高昌國)이었다. 고창국은 한족 왕이 통치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의 절대다수가 토하라인이었다.[5] 이 시기에 춘추 전국 시대 최강의 강대국 중 하나인 초나라와 나름 대국 중 하나인 제나라를 털었고, 특히 초나라는 영혼까지 갈려나갔다. 물론 두 대국 이외에도 추나라, 노나라, 월나라 등 수많은 나라들이 오나라의 패권에 고개를 숙였다.[6] 이 시기에 진헌공이 우나라와 괵을 쳤다.[7] 《세본》과 《춘추#s-4》에 따르면 여매의 아들, 《사기》에 따르면 제번의 아들이다.[8] 이 철은 '초철'이라 불렸다. 초나라의 철이라는 뜻. 위에 언급되었듯이 오, 초 지역은 서로 가까이 있었다.[9] 오왕 료 2년의 전쟁.[10] 이 부분이 후대인들에게도 이채로웠는지 소설 동주열국지에서는 제나라와 오나라가 붙은 애릉 전투에 임하는 제나라 장군들이 전의를 고취시키기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오나라놈들의 머리는 짧아 목을 베어도 들고갈수가 없으니 각자 저놈들의 머리를 꿰 들고갈 줄을 준비해라." 다만 애릉전투에서는 제나라가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고 저 말을 한 장군도 죽는다.[11] 소중화 사상은 조선만이 가졌던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