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결집

 


1. 개요
2. 전개


1. 개요


석가모니 입멸 이후 400년경,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인도 건타라국(乾陀羅國)[1] 쿠샨 왕조가니슈카 대제(재위 73~103) 치세에[2] 파르슈와 존자[3]와 세우의 건의로 삼장에 정통한 5백 명의 비구들을 모아 카슈미르의 환림사라는 사원에서 행한 불경 결집.
4차 결집의 경우는 단순히 경전과 계율만 모은 것이 아니라 경전에 대한 후대 승려들의 주석까지 모았는데, 이때 모인 주석서는 총 2백 권, 30만 송 660만 언에 달했다. 그 주석서의 이름이 아비달마대비바사론으로 7세기 현장에 의해 처음 한역되어 동아시아에 전해졌는데, 사실상 이 책 하나를 편집하기 위해 이루어진 결집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4] 또한 4차 결집을 전후해서 처음으로 '''산스크리트어로 불경을 기록'''하게 된다.
다만 3차 결집과 4차 결집은 불교의 여러 문헌에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특정 문헌에서만 보인다.[5]

2. 전개


가니슈카 대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왕은 정무의 여가에 언제나 불경을 학습하고 날마다 한 승도에게 부탁해 궁전에 와서 설법하게 했는데, 여러 가지 다른 논의가 있고 따르는 부파도 같지 않아서 깊은 의념에 의혹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파르시바 존자가 나서서 "여래가 이 세상을 떠나신 뒤로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습니다. 제자들의 부파, 사제의 이론은 각기 보고들은 바에 따라 서로 모순되어 있습니다."라고 지적했고, 가니슈카 대제는 "과분하게도 권세의 여복을 받아 조상의 유업을 이어받았습니다. 여래의 적멸 후 시간은 지났습니다만 아직 남기신 법을 들을 행운은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범용함도 잊고 불법을 흥륭시키고자 합니다. 스스로의 부파에 따라 상세하게 경율론 삼장을 주석해 주십시오."라고 존자에게 요청했다.
그래서 왕은 사방에 영을 내려 학행이 뛰어난 현인과 성자를 모으고 이레에 걸쳐 사사공양[6]을 한 다음 법을 설교하려 했으나 또 뭔가 뒤섞일까 고민한 가니슈카 대제는 다시 모인 승도들을 이래저래 솎아냈다.
1) 번뇌가 남은 자는 돌아가라.
2) 나한과를 얻지 못했고 배울 것이 남은 유학자는 돌아가라.
3) 삼명과 육통을 갖춘 자만 남아라.
4) 내학은 삼장에 통하고 외학은 오명에 통달한 자만 남아라.
이렇게 해서 499명을 얻었다고 한다. 처음에 가니슈카 대제는 자신의 본국인 간다라 국에서 결집을 행하려 했지만 마침 날이 덥고 습해서 제1차 결집이 이루어졌던 칠엽굴에서 결집을 행하려 했는데, 파르슈와 존자가 "그곳은 다른 종교가 많아서 이론이 분분할 것"이라고 반대해서 여러 나한과 함께 간다라 국에서 카시미르로 와서 가람을 세우고 삼장을 결집해 여기에 비바사론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때 세우라는 존자가 문밖에 있었는데, 다른 아라한들이 "번뇌가 아직 제거되지 않은 자는 의론을 헷갈리게 할 뿐이니 당신은 여기서 멀리 떠나 있으라."고 내쫓았지만 세우는 "나는 슬기롭지도 않고 영리하지도 못합니다만 부처님의 미묘한 말씀에 거의 통달하고 경율논 삼장의 심오한 문채, 오명의 지극한 이치도 어느 정도 연구해 그 지취를 터득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고, 나한들은 그런 세우를 불손하다며 가서 공부 더 하고 오라고 하자 세우 존자는 다시금 "나는 무학의 나한 보기를 진정 눈물이나 침과 같이 작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납의 뭉텅이를 던져 그것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반드시 무학과를 증득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나한들은 거푸 세우를 증상만[7]이라고 비난했는데, 세우는 그 자리에서 납의 뭉텅이를 공중으로 던졌고 공중의 천인들이 그것을 손으로 받으며 세우를 찬양하자 나한들은 이 현상을 보고 자기들의 책망을 사죄하고 그 덕을 믿어 상좌에 앉혔다.
그렇게 해서 이들 5백 명의 나한은 먼저 10만 송의 우파데샤론을 만들고 수트람장을 주석하였다. 다음에 10만 송의 비나야비바사론을 만들고 비나야장을 주석하였다. 마지막으로 10만 송의 아비달마비바사론을 만들고 아비달마장에 주석을 붙였다. 이는 전 30만 송, 960만 언이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에는 카니쉬카 대제가 이때 구리로 판을 만들어 승려들이 논한 내용을 새기고 돌로 만든 함에 넣고 봉한 뒤 수토파를 세우고 그안에 안치하였으며, 야차신에게 명하여 이 나라를 둘러 지키게 하고 불교 외의 다른 학문을 배우는 자가 이 논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면서 학습하고자 하는 자는 이 안에서 학업하도록 했으며, 그런 다음 수도의 서문 밖에 나가 동으로 향해 꿇어앉아 아쇼카 왕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이 나라를 모두 승도들에게 보시하였다고 한다.[8]

[1] 지금의 인도 펀자브 북쪽, 카불 동쪽에 있던 고대 국가이다.[2] 가니슈카 대제도 아소카 대왕 못지 않은 불교 신자였다.[3] 파르슈와는 '갈비뼈'라는 뜻인데, 대당서역기에는 파르슈와 존자는 나이 여든에 집을 버리고 옷을 물들여 출가하였으므로 젊은이들로부터 "나이 먹어서 출가는 무슨 출가"라는 비웃음을 샀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삼장의 이치에 통하지 못하고 삼계(일체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삼종의 세계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욕을 끊지 못하며 육신통(육종의 신통력으로 천안, 천이, 타심, 숙명, 신족, 누진)을 얻지 못하고 팔해탈(팔종의 정에 의해 번뇌에 묶여있는 상태에서 탈하여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갖추지 못한다면 죽을 때까지 갈비뼈를 자리에 붙이지 않겠다(눕지 않겠다)."는 독한 각오로 날이 모자라도록 걸으면서 사물을 생각하고 좌선해서는 사색에 잠기며, 낮에는 교리를 연구하고 밤에는 고요히 명상하며 3년이 지난 뒤 삼장에 통하고 삼계의 욕을 끊었으며 삼명(천안, 숙명, 누진)의 지혜를 얻게 되었으므로 그러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4]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5~46쪽[5] 자현 비구는 아소카 왕의 시대는 근본 분열의 시대를 지나 다시금 재분열이 왕성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고, 이들 결집은 불교 교단 전체가 아닌 특정한 부파, 즉 본상좌부(분별설부)와 설일체유부에서 자기 정리를 위해 일어났다고 보는 관점이 타당하다고 보았다(자현 <불교사 100장면> 111쪽)[6] 음식, 의복, 복구, 탕약의 네 가지 공양[7] 아직 증과를 얻지도 못하고서 얻었다고 오만을 부리는 인간.[8] 군왕이 자기 스스로를 절에 노예로(...) 팔고 나서 신하들이 절에 재물을 기증하고 군왕을 다시 사서 데려오는 의식 절차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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