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결집

 


1. 개요
2. 상세
3. 결집 과정
4. 상좌부와 대중부
5. 같이 보기


1. 개요


기원전 5세기 또는 6세기의 어느 해에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한 뒤 돌아온 첫 번째 우기에 석가모니의 제자였던 마하가섭의 주도로 당시 마가다 왕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왕사성)의 칠엽굴에 마하가섭존자를 필두로 하는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 5백 명이 모여서 그의 가르침(경장)과 계율(율장)을 함께 외워서 기억하는 형식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과 승단의 계율을 정리했던[1] 사건을 말한다. 결집에 참여했던 사문의 숫자가 5백 명이었던 데서 '오백결집'이라고도 한다.

2. 상세


모임을 이끌었던 상좌는 마하카쉬파야(마하가섭존자)였고, 아난다(아난존자)가 먼저 암송하면 모두 따라서 합송하는 형식으로 완성하였다. 특히 아난다는 교리 부분을 암송한 반면, 계율 부분은 우팔리가 선창을 담당하였다고 전한다.[2] 대당서역기는 이때가 안거의 첫 보름(즉 안거 시작 전날인 5월 15일)이었다고 적었다.
석가모니 부처의 사후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이미 석가모니 부처는 그의 제자 아난다에게 '자등명법등명'으로 알려진 유명한 법어를 통해서 ''''내 입멸한 후에 교단의 지도자는 없다.''''고 단언했던 것이다(석가모니/일생 항목 참조). 석가모니 부처는 입멸하기까지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쉬임없이 노력하면서도 승단의 지도자를 자처하지 않고 오로지 유익한 조언을 해 주는 것으로 만족했고, 특히 이곳저곳 떠돌면서 일상사의 이런 저런 어려움에 직면하면서 불자가 아닌 사람들의 가혹한 비판을 감당해야 했던 승단의 수도승들에게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승단에서도 석가모니 부처가 생존한 동안에는 불법이 건재하므로 우선 포교와 덕행으로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석가모니 생전에 승단은 급속히 팽창했지만 일원적 조직체계를 갖추지 않고, 오히려 규모가 서로 다른 여러 세력으로 구성된 편이었다. 이들은 같은 믿음을 추구한다는 공통분모는 있었지만, 각 지역 문화의 개별적 영향 때문에 공통된 계획이나 공식적인 강령 등은 없었다. 더구나 석가모니 자신이 '내 입멸 뒤에 교단의 지도자는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기에, 석가모니가 사망하자 각 세력은 더욱 중심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위기에 처했다. 석가모니의 말씀을 한 데 모아 놓은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상을 한층 가속화했다. 게다가 어느 한 제자가 석가모니 부처의 모든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 가지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 첫째. 세존의 언행을 한 데 집결해야 하고,
  • 둘째, 승단 내부의 분열[3]과 논쟁을 끝내기 위해
승단의 계율을 집대성,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업이 필요함은 누구나 동의했다. 이제 중대한 과업을 수행할 적임자를 찾는 것이 문제로 떠올랐다.[4]

3. 결집 과정


7세기 의 승려 현장은 천축 즉 지금의 인도를 순례하면서 석가모니가 설법한 장소 중 죽림정사를 찾았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죽림정사 서남쪽으로 5~6리 가면 남북쪽 큰 대나무 숲 속에 커다란 석실이 있다고 언급하고, 이곳이 여래가 열반에 든 뒤 마하가섭 존자가 대아라한 999명과 함께 삼장을 결집했던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곳이 칠엽굴[5]로, 현장의 언급에 따르면 그 앞에는 당시 마가다 왕국을 다스리던 아자타사트루 왕이 경전 결집을 위해 모인 대아라한들을 위해 세운 건물의 터도 남아 있었다고 한다.[6]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무렵, 제1차 결집을 주도한 가섭존자(마하카샤파)는 쿠시나가라로 향하던 석가모니 부처의 행렬에서 조금 뒤처져서 산림에서 좌선 중이었다. 대당서역기 및 대반열반경에 따르면 이때 마하가섭은 문득 광명이 번뜩이더니 대지가 진동하는 것을 보고는 "무슨 일로 이런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서 천안통으로 보았더니 석가모니 부처가 쿠시나가라의 두 그루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들려는 중이었다. 마하가섭은 서둘러 제자에게 명해 쿠시나가라 성으로 가게 했으나, 제자는 가던 도중에 손에 아름다운 천계의 꽃을 들고 오는 브라만들과 만났다. 브라만은 "석가모니 부처께서 입멸하시어 큰 공양을 벌였는데 이 꽃도 그때 공양된 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미 석가모니 부처는 그 시점에서 열반에 든 것이었다.
가섭존자는 석가모니의 열반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면서 제자들에게 "밝은 해가[7] 저물었도다. 세계는 어두워졌도다. 중생을 선도할 분께서 저 멀리 이 세상을 떠나 버리셨으니, 중생은 타락할 것이다."라고 말했고, 함께 했던 비구들도 "세존께서는 너무 빨리 열반에 드셨구나. 눈을 가진 분이 너무도 급하게 세상에서 사라지셨도다."라며 통곡하고 슬퍼하거나 혹은 애써 담담함을 유지했는데, 수밧다라는 자가 이런 말을 했다.

도반들이여. 이제 그만하십시오. 그렇게 울면서 슬퍼할 것 없습니다. 저 대사문(석가모니)은 지금까지 '이것은 해야만 한다,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잔소리가 매우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매우 기뻐해야만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수밧다 존자의 이 말을 들은 가섭존자는 이 시점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한 데 모으고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에 준거해 승단 내에서 죄를 범한 자들을 단속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쿠시나가라로 가서 석가모니 부처의 장례에 참석했다.[8] 장례를 마친 뒤, 마하가섭은 수메르산에 올라 큰 징을 치면서 "이제 왕사성(라자그리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성과를 중한 사람들은 곧장 집합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사람들을 모았는데,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마하가섭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여래께서 적멸하시어 세계가 공허하게 되었으므로 법장을 결집하여 불은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함에 있어서는 간이하게 하면서 또한 정숙하게 할 일입니다. 사람 수에 의지하게 될 때 이 성법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삼명을 갖추고 육신통을 지녔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알고 있고 변재에 막힘이 없는 상덕의 사람들만 결집에 참가했으면 합니다. 그 밖에 아라한과를 증한 사람이나 학습 중인 사람은 그대로 돌아가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남은 승려가 5백 명이었으니, 이들이 1차 불경 결집을 하였다.[9] 석가모니의 십대 제자 가운데 마하가섭이 1차 경전 결집을 주도한 것은 브라만 계급으로 근엄하고 철저한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마하가섭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의 십대제자로 유명했고,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기까지 25년이나 가까이 모시면서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듣고 아는 아난다는 아직 학지[10]였다.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하는 순간까지도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11]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남으라고 했는데 아라한과에 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아난다를 배제하자니 그가 평소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들은 제자였기 때문에 뺄 수도 없다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마하가섭은 아난을 불러 "그대는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하지 않았는가. 성과를 증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어서 나가도록 하라."라고 말했고, 아난 존자는 "저는 여래를 모시고서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만 교법에 관한 회의가 있을 때마다 한 번도 빠진 일이 없습니다.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함에 있어 제가 배척당한다고 하면, 부처님이 적멸해 버린 오늘날 저는 의지할 곳이 없게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하가섭은 "그런 것은 네가 걱정할 것 없다. 그대가 부처님 가까이에 있어 참으로 부처님 말씀을 많이 듣긴 했지만 애욕은 아직 남아 있고 번뇌의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기어이 아난을 쫓아냈다.
아난은 할 말이 없게 되어 거기서 나와 조용한 곳으로 물러간 다음 무학[12]의 경지에 들어서려고 노력했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피로에 지쳐 자리에 누우려는데 '''머리가 베개에 닿는 순간 아라한과를 얻었다.''' 결집이 열리는 칠엽굴로 나가 문을 두드리며 도착을 알렸더니, 마하가섭은 "그대가 번뇌를 씻어냈다고? 그랬다면 신통력으로써 문을 통과하지 말고 들어와."라고 대답했다. 아난은 이 말을 듣고 열쇠 구멍으로 들어와 다른 승려들에게 인사하며 자리에 참석했다.
이때 아난이 법을 암송하기 전에 다시, 장로들이 나서서 아난다의 잘못을 열거했다.[13] 그리고 이를 악작죄(惡作罪 둑카타)에 해당한다고 책하였다.
  • 첫째. 소소계가 무엇인지에 대해[14] 석가모니 부처께 여쭤보지 않은 것.
  • 둘째. 바느질을 하다가 석가모니 부처의 우욕의를 밟은 것.
  • 셋째. 석가모니 부처께서 열반하신 뒤에 여인들이 먼저 그 시신을 뵙게 해서 그들의 눈물로 세존의 법체를 더럽히게 한 것.[15]
  • 넷째. 석가모니 부처께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물러 주시라고 간청하지 않은 것.[16]
  • 다섯째. 석가모니 부처께 여성의 출가를 간청해 석가모니 부처께서 이를 허락하시게 한 것.
아난다는 이때 자신이 다섯 가지 잘못들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받자 조용히 항변했다.
  • 소소계 문제는 자신은 실념하였기 때문에 묻지 않았던 것이다.
  • 우욕의를 밟은 것은 옷 자체가 워낙 넓어서 발로 밟지 않으면 바느질이 어려워서였지 석가모니 부처를 무시한 것이 아니다.
  • 석가모니 부처의 유신을 여인들에게 먼저 예배하게 한 것은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 석가모니 부처께 1겁 동안 머물러주시라 원하지 않은 것은 그때 마라 파피야스 때문에 마음이 가려져서였다.
  • 석가모니 부처께 여인으로서 처음으로 출가를 청하셨던 마하파자파티는 석가모니 부처의 이모이자 의붓어머니[17]이시니 석가모니 부처를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출가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난다는 "'''네, 제가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존자님들에 대한 신뢰가 있으니, 이것이 잘못된 행동이었음을 인정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고백한 다음[18] 말석에 물러나 앉았다고 한다. 이에 마하가섭은 소리 높여 말했다.

잘 생각하고 분명히 듣기 바랍니다. 아난다가 부처님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었음은 여래께서도 칭찬하셨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수트람의 장(경장)을 결집하고 우팔리[19]

는 율을 극명하게 연구하고 있음을 증인이 아는 일이므로 그가 비나야의 장(율장)을 결집하고, 나 카샤파는 아비다르마의 장(논장)을 결집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계의 석 달 동안, 즉 5월 16일에 시작되어 8월 16일에 끝나는 3개월 우안거 동안에 삼장을 결집시켰으니, 이것이 1차 결집이며, 1차 경전 결집을 주도한 마하가섭이 당시 모든 승도 중의 상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이 결집을 '상좌부 결집'이라고 한다.[20]
결집된 경전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는 그 당시 귀족층이 쓰던 고급 언어였던 산스크리트어뿐 아니라 베다 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에게 설법을 할 때는 주로 속어였던 마가다어[21]를 사용했으리라 추정하고, 1차 결집 때에도 마찬가지로 마가다어를 썼으리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지만 근거가 없다. 초기 경전 언어로 기록이 남우 팔리어[22] 속에 몇몇 잔영이 남아있을 뿐이다.[23]
1차 결집이 끝나자 마하가섭은 석가모니 부처가 했던 대로 여러 지방을 여행하면서 불법을 전파했고[24] 아난다는 승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편찬된 제1차 결집의 내용은 후대 불교사의 지침이 되는 근본 경전으로서 지금도 매우 중요하다.
아난다가 가르친 제자 중에는 야사란 사람이 있었는데, 야사는 석가모니 부처를 직접 보고 알았기 때문에 제2차 결집이 소집되었을 때, 비록 고령이었지만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5]

4. 상좌부와 대중부


또한 대당서역기에 따르면 아난 증과 수토파에서 서쪽으로 20여 리 가면 수토파가 있는데, 아소카 대왕이 세운 것으로 대중부가 결집한 곳이라는 전승을 전했다. 학습 중인 자, 증과를 얻은 자 등 수백 수천 명은 마하가섭이 주도한 1차 결집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는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똑같이 스승으로 모시고 배워왔건만, 법왕(여래)께서 입멸하시고 우리는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나 불은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해야 할 것이다.

라고 서로들 말했다. 그리하여 범승, 성승이 모두 회합하고 어리석은 자, 지혜로운 자 모두가 출석하여 여기서도 수트람장, 비나야장, 아비다르마장, 잡집장, 금주장을 집대성하여 별도로 오장이라 했다. 그리고 이 결집은 범성양중이 했기 때문에 이를 '대중부 결집'이라고 한다.[26] 물론 상좌부와 대중부가 서로 갈라지는 이른바 '근본분열'은 2차 결집 때 사건으로 본다.

5. 같이 보기


  • 여시아문: 한국어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혹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도 번역되는, 결집에서 아난다가 자신이 암송하던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말하기 앞서 서두로 삼았던 유명한 구절이다.

[1] (곽철환, ‘초기불교와 그 자료’ 7쪽[2]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1~42쪽[3] 이런 현상은 석가모니 부처 생존시에도 이미 기미를 보였다. 데바닷타 항목 참조. [4]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4쪽[5] 산스크리트어로는 삿사파니(Sattapanni)라고 한다.[6] 현장 <대당서역기> 권9[7] 맹암의 세계를 비추는 지혜를 지니신 자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높여 부르는 말[8] 마하가섭이 장례식장에 당도했을 때엔 이미 석가모니의 시신을 전륜성왕의 장례 예법에 따라 관에 넣은 뒤였는데, 갑자기 관에서 석가모니의 발이 나와 마하가섭이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석가모니가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했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한자로 곽시쌍부(槨示雙趺: 관에서 두 발을 보임)라는 사자성어가 나왔다. 다만 이는 후대 중국 선종불교가 번성하며 나온 이야기로, 관련 문헌 자료를 추적해볼 때 아무리 높게 잡아도 당대 중기 이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9] 현장 <대당서역기>권9[10]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학습 중인 상태[11] 이 때문에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하기 전에 "아직 내 깨달음도 다 이루지 못했는데 벌써 석가모니 부처님이 돌아가신다니." 하고 한탄하며 울었는데, 석가모니가 이를 듣고 아난다를 달래며 "너는 내가 열반에 들고 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고 아라한과에 들 것이다." 하고 수기를 주었다고 한다.[12] 배울 것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13] 팔리어 율장 오백건도에는 다섯 가지로 나오는데, <오분율>이나 <사분율>, <십송율> 및 <마하승기율>, <근본설일체유부잡사> 등에는 여섯 가지, 일곱 가지, 여덟 가지로 조금씩 늘어난다.[14]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기 전에, "내가 설법한 계율 가운데 자잘한 것(소소계)은 굳이 지킬 필요 없고 바꿔서 행해도 좋다"고 아난에게 말했다는 것인데, 그 '자잘한 것'이 대체 무엇이냐를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던 것. 결국 마하가섭은 석가모니 부처께서 말하신 소소계가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석가모니 부처께서 정하신 율장의 내용은 고치지도 바꾸지 않는다.'는 불제불개변(佛制不改變) 원칙을 세웠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모든 불교에서는 율장을 바꾸거나 필요에 의해 특정 구절을 빼거나 넣는 것은 원칙적으로 절대 금지된다. 이것을 소소계 논쟁이라고 한다. ## [15] 전승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의 장례에 찾아온 마하가섭 앞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관이 열려 부처의 발이 드러났을 때에 비구니들이 흘린 눈물 자국이 발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자현 비구는 장례를 위해서 시신을 염습하는 과정을 거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발에 묻은 눈물 자국이 입관된 뒤까지 남아 있었다는 전승을 두고 누군가가 오고 있기에 서둘러 장례를 치러야 했던 모종의 상황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지적하였다.[16] 상좌부 불교에서 전승되는 대반열반경(디가 니까야 16경)에 따르면 "사신족을 닦은 자는 1겁 동안 세상에 머물 수 있다." 하고 말했을 때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럼 1겁 동안 세상에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석가모니는 열반에 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17] 실제로 마하파자파티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의 동생이다. 마야가 석가모니를 낳은 지 이레 만에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정반왕은 처제와 재혼하였다.[18] 이렇게 하여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스스로 자백하는 절차는 승단의 기본규정이 되었다.[19] 지계제일, 즉 계율을 가장 잘 지키는 십대제자였다. 석가족의 왕실 이발사 출신이라서 십대제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수드라 계급이었다.[20] 현장 <대당서역기> 권9[21] 인도 북동부에서 사용되던 속어[22] 언어학상으로는 피샤차어로 분류되며 마가다어와는 달리 인도 중서부 지역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속어[23] 김미숙 <인도불교사-붓다에서 암베드카르까지> 41~42쪽[24] 이 사실은 팔리어 경전에 언급된다.[25]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붓다, 꺼지지 않는 등불> 116~118쪽[26] 현장 <대당서역기> 권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