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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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조이자 창시자이다.
atta dīpā vihar atha atta saraṇā an añña saraṇā ,스스로를 섬으로 삼아 스스로에 의지하며 살아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dhamma dīpā dhamma saraṇā an añña saraṇā 진리를 섬으로 삼아 진리에 의지하라.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디가 니까야 16경 <대반열반경>과 26경 <전륜성왕사자후경>[3]
본명은 고타마 싯타르타. 고타마가 성씨이며 싯타르타가 이름이다. 석가모니는 산스크리트어 '샤카무니'를 음역한 것으로 '''샤카족'''(석가)'''의 성자'''라는 뜻.[4] 고대 인도의 샤캬 부족의 소왕국 '카필라'의 왕[5] 인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왕자로 태어났으나, 인간의 삶이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고자, 이후 왕세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많은 수행 끝에 '감정이라는 악마'의 유혹을 견뎌내고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인도 북부를 중심으로 가르침을 펼치고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마지막 제자인 쑤밧다를 교화하고 80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의 가르침이 현대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리스, 로마를 거쳐 서구 전역으로 전파되어 오늘날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과 같이,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6] 를 거쳐 북쪽으론 중국, 동쪽으로 티베트, 남쪽으로 남인도와 스리랑카, 이후 동남아시아인 미얀마, 태국, 베트남으로 전해졌으며, 중국으로 전해진 불교는 다시 한국, 일본으로 퍼져서 각국의 역사와 문화에 오늘날까지 지대한 영향을 남기고 있다.
2. 생애
3.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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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상의 위대함은 역시 인류가 '''혹독한 삶으로 고통받는 근본 원인을 진단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였다'''는 데 있다. 그 가르침이 바로 불경이며, 이는 후대에 그를 따른 수많은 이들에 의해 정립되고 확장되었다.[7]
석가모니는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허덕이는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성, 위엄, 절대의 모습보단, 제자에게 신통력을 내보이지 말고[8] 수행에 정진하라고 가르치는 등 인간적인 면모가 강하다.
당시 인도는 수많은 종교와 수많은 사상들이 혼잡하게 있어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석가모니는 많은 질문들을 받았는데 이들 사이의 대화 내용이 결국 불교의 경전이 된다. 대화 내용 중에는 민감한 내용을 직설적으로 물어보거나 석가모니를 테스트하기 위한 질문도 많았다. 석가모니는 일관적으로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는 것을 설하였다.
역사학적으로 따져보자면, 석가모니는 그 당시 브라만교의 카스트에 반대한 인간 평등을 주장한 지식인에 가깝다. 힌두교는 영원불멸하는 영혼인 '아트만'이 있다고 주장하여 죽은 이후에도 이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카르마에 따라 윤회한다고 하였는데, 불교는 이러한 '아트만'에 반대하여 '안-아트만', 즉 무아를 주장하였다. 무아는 윤회하는 영혼은 없으니 '나'라는 것에 집착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어서, 무아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난 현세의 깨달음을 중시하게 된다. 이것으로써 불교는 아트만의 윤회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는 힌두교의 카스트제도에 반대하고, 현세의 계급에 상관없이 수행을 함으로써 여성이나 천민 등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삶의 끝없는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붓다가 께사뿟따라는 깔라마들의 성읍(북인도의 조그만 도시)을 방문했을 때 그곳 사람들이 붓다에게 물었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수행자와 성직자들)이 께사뿟따에 옵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칭찬합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은 매도하고 욕하고 업신여기고 경멸합니다. 이런 존경하는 사문들 가운데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그들에 대해서 저희들은 미덥지 못하고 의심스럽습니다."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경전에 써 있다고 해서, 추측이 그렇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리라고 그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스스로 깨닫고 알게 되면 그때에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 깔라마 경 중에서[9]
4. 호칭
이름은 성이 고타마, 이름이 싯다르타. 호칭 석가모니는 '샤카무니'를 음역한 것으로 '샤카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대표적인 호칭은 '깨달은 자'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붓다(佛陀, 불타), 즉 부처이다.[14]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석존, 불, 여래 등의 10가지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10가지보다 더 많아졌지만, 대승불교에서는 하여간 숫자에 의미를 부여해서 10가지라고 일컫는다.
불경에서는 석가모니의 제자들이 석가모니를 향해 질문을 할 때 석가모니를 세존(世尊)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이 등장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 '바가완'을 번역한 단어로 인도에서는 불교 외에 다른 정신적인 위인에게도 많이 사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 밖에 석가세존(釋迦世尊, 석가족의 큰어른) 또는 석존(釋尊)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래(如來)는 산스크리트어 따타가따(tathāgata)를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어 타싸가타는 해석하기에 따라 '~에서 오는자' 혹은 '~로 가는 자'로 해석할 수 있는데, 如來는 그 두 가지 뜻을 동시에 나타낸 번역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온 곳/혹은 석가모니가 향해서 가는 곳은 다름 아닌 진리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라고 칭한다.
한국에서는 으레 석가모니라는 이름을 줄여서 '석가'라고도 부르고 부처님 오신날을 2017년까지도 '석가탄신일'이라고도 불렀는데, 이에 대해서 한국 불교계에서는 오랫동안 해당 용어에 문제점이 있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명칭을 석가탄신일에서 '부처님오신날'로 바꾸는 데에 성공하였다(부처님오신날 항목 참조). 석가는 석가모니 자신이 태어난 종족 '샤카'를 음역한 것으로, '''고타마 싯타르타를 석가라고 부르는 것은 '김씨', '박씨'라고 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조선 시대 유교측에서 불교를 비판하면서 깎아내리는데에 사용한 호칭이다.'''는 입장이므로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고려시대에 지어진 팔만대장경을 보더라도 '석가'라는 말은 흔할 뿐 아니라, 구담실달다(瞿曇悉達多), 구담(瞿曇), 고답마(喬答摩) 등 직접적으로 성씨를 이용해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석가'라는 말이 과거에 깍아내려고 쓰였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오히려 '석가라는 말이 깍아내리는 용어'라는 입장이야말로 '유교적 관점'에서 석가를 바라보는 일인 셈이다.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에서 축건태자(竺乾太子)라고 불렀는데, 축건은 천축 즉 인도를 가리키는 한자어로 '인도 왕자님'이라는 뜻이다.
5. 가족
아버지 슈도다나과 어머니 마야부인,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 아내 야소다라, 아들 라훌라가 있다. 야소다라와는 16세 때 결혼했다.
후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돌아왔을 때 라훌라는 모친인 야소다라를 통해 '왕이 되려 하니 보물을(유산을) 주십시오.'라는 요청을 전하게 했다. 이에 석가모니는 즉석에서 라훌라를 출가시켜 불도를 닦게 하였다.
아버지 슈도다나가 죽자, 새어머니 마하파자파티와 아내 야소다라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15] 사촌 형제로 아난다와 아나율, 이복동생으로 난다가 있는데, 이들 셋 다 석가모니를 따라서 출가했다.[16] 참고로 석가모니를 일생의 원수로 삼고 그를 해하려 했다 알려진 데바닷타 역시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이다.
이렇게 왕족 중 뛰어난 남자는 대부분 석가모니를 따라 출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슈도다나 왕이 아들에게 왕위를 이을 후계자 문제를 제기, 이후 승단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이끌 장남은 출가할 수 없으며, 출가 시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을 새로 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슈도다나 왕의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다 출가했기 때문에 슈도다나 왕 사후 샤카 족은 석가모니 당대에 인접한 강국 코살라(사위국)[17] 의 침공으로 멸망하나, 출가한 샤카 족이 있었기에 샤카 족이 아예 멸절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전대에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다. 증일아함경 등견품에 그 내막이 실려 있다. 석가모니가 막 깨달음을 얻었을 때, 당시 코살라 국에서도 막 새로 왕위에 오른 파세나디(바사닉)가 카필라 국에 사돈을 맺자고 여자를 보내달라고 하자, 코살라 국이 힘만 센 야만스런 나라라고 경멸하던 샤카 족은 말리카라는 비천한 출신의 여자를 왕족이라고 속이고 시집보냈다. 그 여자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비루타카였다. 비루타카가 아직 왕자일 적에 카필라 국을 방문했는데, 석가모니가 앉을 자리에 앉았다가 "저 '''종년의 자식'''이 감히 어디를 앉아?" 라며 그를 흠씬 때려서 내쫓자 앙심을 품었고[18] 결국 왕위에 오른 뒤에 카필라 국을 침공했다. 이때 석가모니는 세 번에 걸쳐 군대 앞을 가로막아 설득하여 돌려보냈으나, 그래도 다시 군대를 보내자 네 번째는 카필라 국의 멸망은 결국 샤카 족이 치를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치러야 하는 과보임을 알고 슬퍼하면서도 막지 않았다.
이때의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코살라 국 군사들이 샤카 족을 학살하자[19] 마지막 왕이었던 마하나마는 '내가 저 호수에 들어가 있는 동안이라도 학살을 멈춰달라'라고 간청했다. 비루다카는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봤자 얼마나 오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이를 허락했는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마하나마가 나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들어가 보게 했다. 그런데 마하나마는 호수 바닥에 자신의 몸을 묶어 둔 채 죽어 있었다는 이야기.[20] 비루타카 왕도 얼마 뒤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증일아함경에는 석가모니가 비루다카에게 죽은 기타 태자와 샤카 족의 여인 5백 명을 위해 설법을 베풀고 난 뒤 "비루다카는 앞으로 이레 뒤에 죽을 것이며, 나는 오늘 이후 다시는 니구류 원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그곳을 떠났다. 비루다카 왕은 그 말을 듣고 이레 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다가 이레가 지나서야 안심하고 병사와 시녀들을 데리고 강가에서 놀다 그곳에서 묵었는데, 그날 밤 갑자기 비구름이 일어나고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쳐서 강가에서 묵던 비루다카 왕과 그 일행은 모조리 물에 휩쓸렸고, 죽어서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21]
달리 말하면 여래의 가르침이 의외로 현실세계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된다. 또한 수행에 있어서 엄숙함이나 교조주의를 최대한 배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이는 초기의 불교 전파에 매우 큰 강점이 되었다. 풍속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 풍속을 지키며 불법을 따르고 싶다"고 하니 다 허락하는가 하면,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다가 출가한 제자가 발에서 피를 흘리자[22] 모든 비구들에게 신발을 신게 하기도 했다. 또 라훌라가 탁발갔다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숙소를 뺏겨 화장실에서 자는 걸 보고 당시 계율이던 '1인 1실'을 '2인 1실'도 허용하는 것으로 바꾸기도 했다. 또한 라훌라가 1일 1식을 견디지 못하고 배가 고파서 훌쩍거리자 어리거나 병든 수행자에게는 조식을 허용했다.[23]
6. 제자
7. 한국에서의 인식
종교인들 다수가 종교를 믿는 이유가 기복신앙인(…) 한국에서는 가끔 존재감이 아미타불이나 미륵, 관세음보살 등에 밀리기도 한다. 기원할 때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하고 석가모니불 독송은 빠뜨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불교의 창시자이자 교조이므로 대부분의 절은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고[24] , 가장 많이 신앙하고 있다.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도, '부처'하면 우선 석가모니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 불교계에서는 불경을 독송하거나 할 때 석가모니를 '서가모니'라고 읽기도 한다. 석가여래 역시 '서가여래'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관습이 영향을 끼쳐서 무당들이 무가를 부르며 서가세존이라고 하는 사례가 있고[25] 원불교에서는 아예 '서가모니'라고만 쓰며, 불교 쪽 영향을 받은 소규모 종교에서도 서가모니/서가여래라고 씀이 관례로 정착한 사례가 있다.
어째서인지 무속에서는 현재 인간 세계를 다스리는 최고신으로 인식된 것 같다.[26] 이는 석가모니가 이 시대의 부처(현존불)라는 가르침이 변질된 것으로 추측된다. 미륵을 더 높이 치기도 하는데, 실제 불교에서도 미륵이 이 세계에 내려오려다 석가에게 순서를 양보하고 더 완전한 세계의 부처가 되기로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미륵의 위치가 높긴 하다.
물론 불교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그런 거 없고, 그냥 세상을 일찍 깨우친 불교 신도 중 하나로 추앙하는 것밖에 없다.
8. 서구 사회에서의 인식
부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이 선한 삶을 얻도록 돕는 것이지만, 고통의 근원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이 세계 자체와 그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주장 뿐 아니라 사람의 본성에 관한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형이상학과 인식론에서 다양한 정교한 이론을 발전시키고 옹호하는 철학적 전통의 기초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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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대담하게도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중략'') 붓다는 자신의 사상이 독재적 승직을 갖는 무미건조하고 흔해빠진 종교로 저하되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신의 견해는 타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이런 관점에서는 예외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과거 수천 년 동안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자기들이 최고 지상의 실체라고 생각한 것을 추구해 왔다는 점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이 실체를 하나의 인격의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그 인격은 인간이 지배하는 권력을 가진 것으로 생각한 인격입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그들이 아주 어렸을 때 자기 부친이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 권력입니다.
버트런드 러셀(B. Russell). 1962. 5. 13. '사람은 왜 신을 만들었나?'
석가모니의 사상이 워낙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다른 언어의 사유 구조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유일신을 주장하는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아브라함계 종교가 모두 같은 아프리카아시아어족의 셈족에게 나왔듯이, 같은 어족에서 비슷한 사유가 나오는 경우가 있고 그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연구도 있는 것이 사실. 무려 3,372개의 언어와 다양한 인종이 존재하는 인도[27] 에서[28] 태어난 석가모니가 실제 모어로서 사용했던 언어는 무엇일까 하는 의구심은 충분히 들 수 있다. 일단 현존하는 불경들은 모두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부처는 다른 식으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은 바로 복수심과 혐오감 그리고 원한을 경계하라는 것이다
염세주의의 대부인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인도철학의 기반에서 자신의 사상을 만들었는데,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근본은 자연을 신으로 보는 범신론적 사상이며 불교가 기반이 되는 부분이 많다. 다만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허무의 종교로 보았는데 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다소 왜곡시킨 것에 가깝다. 불교는 '''중도의 종교'''이고 애초에 석가모니가 설법하면서 이런 허무주의를 단견이라고 하며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어 설했고, 더불어 영혼의 실존 같은 평범한 종교관적 사고로 치우침 또한 상견이라고 하며 역시나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둘 중 어느 것도 답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에서 공통분모가 있다면 '''집착하지 말라'''는 것. 하지만 불교에서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맹목적으로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지 "어차피 허무하니 매달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29] 그리고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불교관은 현대에까지 불교에 대한 상당한 오해와 편견을 남겼다. 이는 불교를 영지주의 비슷하게 잘못 해석한 것 같은데, 실제로 지금도 서구권의 종단들은 신자들이 공부하는 도중에 영지주의 비슷하게 결론을 내는 것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고 한다. 또한 서구권에선 이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알고선 불교관을 낮잡게 혹은 우습게 보는 시각을 가진 이들이 상당히 많다.
헤르만 헤세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소재로 하는 <싯다르타>라는 소설을 썼으며[30]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숫타니파타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의 철학자 보르헤스는 그 자신이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의 철학을 설명하는 <보르헤스의 불교강의>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한국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다만 이 책은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다.
9. 외모
10. 기타
- 석가모니의 생몰년도는 옛 인도 기록이 불확실하여 정확히 답을 내기 어려우며, 단지 열반 당시 나이가 80세라는 점만 알 수 있다. 남방불교에서는 기원전 624-기원전 544년, 북방불교에서는 기원전 1026-기원전 949년으로 보아 그 차이가 대단히 크다. 학자들의 연구에서는 기원전 560-기원전 480년 / 기원전 460- 기원전 380년 설이 있다.[31]
- 일생에 워낙 신비한 전설이 많이 섞여 있는지라 한 때 서양학자들은 그 실존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1895년에 독일의 고고학자 포이러(Alois Anton Feuhrer)가 네팔 남부 지역을 탐험하다가 우연히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발견하였고, 석주에 세겨진 문장을 해독했는데, 거기에 '아소카 왕이 석가모니불의 탄생지인 이곳에 와서 참배하고 석주를 세웠다. 또한 부처님이 탄생한 장소를 기념해 이곳 룸비니 마을의 세금을 감면하여 8분의 1만 거둔다'라 쓰여있었다. 이로써 역사상의 실존 인물임이 확정. 그리고 이로써 룸비니 동산의 위치도 확정되었다.[32] 게다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당대의 문자와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다. 석가모니의 사리용기
- 석가모니는 인도인이라고 많이 알려져있는데 확실하게 인도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석가모니의 탄생지로 유명한 룸비니가 네팔 남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팔인들은 석가모니를 네팔 출신이라고 여긴다고 한다. 이걸 두고 항상 인도랑 자기 나라 위인이라고 싸운다. 실제로 석가모니 관련 유튜브 다큐멘터리를 보면 댓글로 석가모니는 인도인이 아니라 네팔인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33]
- 불교에서 사용하는 불기(불멸기원)는 상좌부 불교(남방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때가 아니라 입적한 때를 기준으로(석가모니 생몰년을 서기전 624-서기전 544년으로 잡고) 서기전 544년을 원년으로 삼고, 다만 대승불교(북방불교)에서 사용하는 불기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석가모니 생몰년을 1026-서기전 949년으로 잡고) 서기전 1026년을 원년으로 삼는데, 한국 불교는 1956년 부처 입멸 2500년을 기념하여 열린 세계불교대회에서 대부분의 불교국가의 불기가 남방불기 기준으로 통합된 이래 남방불교의 불기를 채택하고 있어서 북방불기는 역사자료를 연구하다 북방불기 관련 연도를 계산해야 할 때(즉 1956년 이전)를 제외하면 쓰지 않고 있다. 불멸기원 항목 참조.
- 힌두교에서는 석가모니가 비슈누의 9번째 화신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맞지 않으며, 당연히 불교쪽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애초에 석가모니가 생존했던 당시의 바라문교(힌두교의 원류)의 사상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가르침이 불교이다. [34]
- 현존불이기 때문에 각종 고전 및 현대문학, 그리고 창작물에 등장하지만 최강이 아닌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서유기.
- 환빠들은 석가모니불 또한 단군의 자손이라 주장한다(애초에 단군은 특정인물도 아니지만, 이들은 그렇다고 우긴다)(…). 주장의 출처는 한국외대 학사, 뉴욕 시립대학교 석사학위, 동국대 철학과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강상원[35] 인데, 옥스퍼드 산스크리트어 영문 대사전 509페이지 석가모니 항목에 나와 있는 산스크리트어를 해석하면 "석가모니는 단군의 자손"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전혀 신빙성이 없고 근거도 명확하지 않다. 어차피 자기 분야가 역사학도 아니고, 철학과 박사가 이런 주장 해 봐야 학술적으로 의미 없는 짓이다.
- 석가모니불과 다른 모든 열반한 부처님들이 다시 환생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중국의 불교학자인 남회근 선생이 있다. 이에 근거로 능가경 1권에 '열반한 부처도 없고 부처가 열반함도 없다[無有涅槃佛, 無有佛涅槃].' 라는 구절이 있다.[36]
- 스리랑카에서는 석가모니의 열반 이후 5000년이 지나면, 전 세계에 퍼진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그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나무 아래에 저절로 집결되어 생전의 붓다와 같은 형상으로 나타난 뒤, 그 불사리가 짧은 시간 동안 천신들에게 법을 설한 후 스스로 화장되면서 소멸할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 현대에도 석가모니와 비슷하게 높은 사회적 명예를 내려놓고 출가한 사람이 있다. 말레이시아 3대 부호인 아난다 크리슈난의 외아들이 승려이다. 18살 때 태국인 어머니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태국을 방문했으며, 당시 찾아간 태국의 사찰에서 수도승으로서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20년 이상 승려의 삶을 살고 있다.#
11. 미디어에서의 언급
-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붓다는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 자체가 석가모니에 대한 전기 만화이다.
- 1961년 일본 다이에이 영화사에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영화화했다. 제목은 이름 그대로 석가(釈迦)였고, 당시 영화사 소속 최고 스타였던 혼고 코지로(本郷功次郎)가 타이틀 롤을 맡았다. 그리고 훗날 자토이치 등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카쓰 신타로(勝新太郎)가 악랄한 다이바 닷타 역을 맡았다. 막대한 비용을 들였기에, 훗날 비슷한 역사극 몇 편과 더불어 다이에이 몰락의 원인으로도 꼽힌다.
- 1964년에는 바로 한국에서도 영화로 나왔다. 신영균이 석가모니, 박노식이 다이바 닷타로 나왔으며 당시, 후진국이던 한국에서 상당한 돈을 들여 만든 대작인데 고증은 그야말로 로마풍에 뒤죽박죽이다. https://neostar.net/1584
- 디지몬 시리즈의 샤카몬이 석가모니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 세인트 영멘에서는 세기말을 무사히 보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일본에 내려와 휴가 중이다.
- Fate/EXTRA에서 최종보스로 등장. 세이비어(Fate/EXTRA) 문서를 참조.
- 근육소녀대의 악곡 석가(근육소녀대)의 제목이기도 하다. 단, 가사는 종교적인 내용과 별 관계가 없는 (결말이 좀 많이 끔찍한) 사랑 노래.
- 신드로이아 연대기 - 박건 작가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으로써 최상위급의 신성을 획득한 초월자중 한명.
- OH, MY GOD!에서 다른 신들과 더불어 이사로 근무중이다.
-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는 인민의 눈을 멀게 한 악인으로 엄청나게 까인다. 석가모니만 까이는 건 아니고 메이저 종교 지도자들은 다 까인다.(예수, 공자 등)
- 서유기에서는 불교성향의 이야기답게 가장 강한 존재로 나오며 선신의 최고위인 옥황상제도 어쩌지 못하는 손오공을 제압하거나 선인들이나 보살들조차 잡지못하는 강력한 적을 잡는 존재로 나온다.
- 세인트 세이야에 등장하는 골드세인트 아스미타 및 샤캬, 시지마는 설정상 신불의 환생이다. 다만, 석가여래를 콕 집어서 설정한 것은 아니고 부처 혹은 아라한이나 사다함 등 일정한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환생했다고 보아도 무방.
- 일본 드라마 서유기(2006) 마지막화에서는 손오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잠깐 보여줬으나 어쩐 일인지 납치되어 삼장법사 일행은 재결성, 여래를 구출하러 간다.[37]
- 일본의 DMM사에서 제작한 게임 및 이를 원작으로 만든 애니메이션 나무아미타불: 연대 UTENA에서는 십삼불의 한 명으로 등장한다. 성우는 모리쿠보 쇼타로.
- 2019년 9월 5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석가모니의 출가와 깨달음의 과정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각색한 뮤지컬 '싯다르타'(극본,연출 김승원)가 상연되었다. 싯다르타 역은 뮤지컬 배우 이유와 가수 곽동현이 분했다.#
- 샤먼킹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역대 샤먼킹(샤먼킹)들 하나로 나온다.
-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 마지막에 가구야를 천계로 데려가는 장면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