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 개요
2. 콘스탄티노플 공성(907)
2.1. 개요
2.2. 전개
2.2.1. 공성
2.2.2. 평화협정
3. 콘스탄티노플 공성(941)
3.1. 전개
3.2. 방어와 이후의 전개
3.3. 결말


1. 개요


10세기에 키예프 공국 출신으로 보이는 루스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사건. 관련 기록이 부족하고 교차검증이 안되어서 역사적 사실인지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이 말은 다음에 나오는 기록들이 그저 허풍섞인 무용담일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일단 연대기 기록을 존중해서 두번의 콘스탄티노플 공성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관련 사건들을 나열해 보면 군사적인 작전이라기 보다는 바이킹 계통이 의레 그러하듯 평소에는 상업이고 여차해서 상대가 방어상태가 불량하면 약탈을 하는 정도의 사건이었던 것 같다.

2. 콘스탄티노플 공성(907)



2.1. 개요


루스 연대기의 기록상으로는 키예프 대공인 '노브고르드의 올렉' 지휘하는 키예프 루스가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지만 동로마 제국 쪽 기록은 없어서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2.2. 전개



2.2.1. 공성


루스 연대기는 루스 사이에서 세대를 거쳐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던 내용을 기술한 것으로 907년의 콘스탄티노플 습격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연대기는 올레그가 어떻게 동로마 제국의 암살시도를 넘겼는지 부터 말한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레온 6세 이고 루스 연대기에도 상대가 '현명왕 레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올레그는 신탁을 통해 적의 음모를 알아차렸고 독이 든 잔을 건내받지 않음으로써 위기를 넘겼다고 기록한다.
연대기의 기록은 올레그가 콘스탄티노플이 보이는 곳까지 항해해 온 시점을 다시 기록하는 데 그 시점에서 성문은 닫혀있고 보스포러스 해협에는 철쇄가 깔려 있었다고 되어 있다.
신빙성이 좀 애매한 부분을 건너뛰면 올레그가 '바퀴가 달려있는 배' 2,000척에 나누어 타고 있는 부하들을 독려해 방패를 든채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공격했다고 되어 있고 무용담을 기록해 나간다.

2.2.2. 평화협정


그 뒤에 키예프 공국과 동로마 제국은 양자간의 분쟁을 평화협정을 맺어 정리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907년의 평화협정을 말하는 데 이것도 신빙성이 불분명하지만 911년의 루스-로마 평화조약의 예비적인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협정이 바랑기안 가드의 거주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 협정은 바랑기안 용병들이 성에 출입하면서 지켜야 하는 내용을 서술하는 면서, 특정된 성문으로만 입성할 수 있고 무기를 소지해서는 안되며 한번에 50명 이상 동시에 진입할 수 없고 거주지도 지정된다.
이 평화협정은 지금껏 전쟁을 말하던 내용이 갑자기 평화로운 이야기와 우호적인 분위기로 연결되어 있던 그 성격과 실존여부 등에 의견이 분분하다. 학자들은 907년이 공성전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어떤 군사적 행동을 했지만 트리폴리와 싸우고 있던 동로마 제국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또는 40여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혼동하고 있다는 등의 해석을 한다.
한편 911년에 루스와 동로마 제국은 재차 평화조약을 맺는데 여기서는 동로마 황제의 서명이 포함되어 있다. 루스 거주지에서 일어난 형사 사건에 대한 처리와 해상 무역에 관한 통상 법률들이 기록되어 있는 이 조약은 보다 본격적인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즈음해서 루스 또는 북방 계통 용병들이 동로마 제국의 군대에 편성되는 기록들이 상당수 등장하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예컨데 902년의 크레타 원정에 루스 용병 700명이 참전했다거나 936년의 이탈리아 원정에 바랑기안 가드 415명이 동원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떤 형태로든 루스인들과 접촉이 있었고 연대기의 모티브가 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 볼 수 있다.

3. 콘스탄티노플 공성(941)


키예프 공국 이고르의 치세에 루스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고 한다.
이에 관해 하자르 칸국의 기록에 의하면 이는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1세의 유대인 박해에 대한 복수로 루스 인들에게 지원을 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게 한 것이라 한다.

3.1. 전개


이 시기에 루스페체네그는 서로 협력해서 동로마 제국 치하의 소아시아 북부를 공격해 941년까지 터키 북부 비티니아를 휩쓸고 있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수도 방위는 공백상태나 다름없었는데 제국의 함대는 남쪽에서 이슬람 세력을 견재하고 있었고 육군은 동부 국경 지역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런 절호의 기회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라기 보다는 과거에도 그러했듯 공격한 측이 어떤 형태로는 동로마 제국 방어가 느슨하다는 정보를 잘 알고 움직였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3.2. 방어와 이후의 전개


육지쪽운 3중 성벽으로 방어되었고 바다쪽의 공격만 막으면 된다고 판단한 콘스탄티노플은 퇴역함 15척을 모아 이물과 고물에 그리스의 불을 탑재시키고 이것으로 방어에 활용했다. 기록으로는 루스 인들은 배에 불이 붙자 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타 죽는 것 보다는 물에 빠져 죽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이런 방법으로 콘스탄티노플 방어는 성공했지만 퇴역함들은 후퇴하는 루스 선박들을 쫓아가지 못했다. 후퇴한 루스들은 분풀이로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포로가 된 거주민들의 마리에 못을 박거나 십자가에 메달았다고 한다.

3.3. 결말


이듬해가 되자 동로마 제국은 요한 쿠르큐아스와 바르다스 포카스, 2명의 장군을 수도로 소환하여 아직 머물고 있는 루스를 쫓아내었다.
루스 인들은 반격에 밀려 주변의 트라키아로 목표를 옮기기로 하고 함대도 거기로 이동시키려 했으나 때맞춰 테노파네스의 제국 함대가 이들을 기습해 거의 전 선박을 파괴해 버렸다.
이제 근거지인 크리미아로 돌아갈 배가 거의 남지 않게된 루스는 토벌대에 쫓겨다니는 처지가 되어 대부분의 포로들이 참수되어 성벽에 내걸렸으며 극히 일부만이 소형선박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하자르 칸국의 기록으로는 루스 들은 카스피 해로 도망쳐서 아랍과 싸우게 되었다고 하며 동로마 제국은 이고르가 도주한 뒤에 다뉴브 강에 머물러 있는 동안 사절을 보내어 새로운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렇게 체결된 945년의 평화협정은 과거와 유사하게 상호간 무역에 대한 절차를 언급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