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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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소피아 성당에 그려진 벽화. 왼쪽에 엎드려 있는 인물이 레온 6세. 중앙에 앉아있는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어 Λέων ΣΤ΄ ὁ Σοφός, Leōn VI ho Sophos[1][2]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2.2. 황제 레온 6세
2.2.1. 내치
2.2.2. 외치
2.2.3. 네 번 결혼한 황제
2.3. 말년
3. 참고 자료

생몰 기간 : 866년 9월 19일 ~ 912년 5월 11일
재위 기간 : 886년 8월 29일 ~ 912년 5월 11일

1. 개요


바실리오스 1세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뒤 즉위하여 26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동로마 제국의 문예 부흥을 이끌었고 법전을 현실에 맞게 개정했으나,[3] 트라키아에서 불가르 족에게,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아랍인에게 패하며 영토가 축소되었다. 하지만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분전으로 남이탈리아 랑고바르드족 지배 지역의 핵심이던 베네벤토를 탈환하여 '롱고바르디아' 테마를 창설하기도 하는 등 외세에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았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레온은 866년 9월 19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바실리오스 1세이고 어머니는 에브도키아 잉게리나(Ευδοκία Ιγγερίνα)였다. 하지만 바실리오스 본인은 레온을 지독히 싫어했다. 아내 에브도키아 잉게리나는 전대 황제 미하일 3세의 정부였다가 미하일 3세가 바실리오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하면서 그에게 넘겨진 여인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에 레온이 바실리오스의 아들이 아니라 미하일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바실리오스는 이를 사실로 여기고 레온을 미워했다고 한다. 바실리오스는 첫번째 부인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들인 콘스탄티노스를 총애하고 잉게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레온을 비롯한 자식들을 비교적 미워했다.
879년 9월, 콘스탄티노스가 돌연사했다. 그래서 레온이 대신 차기 황제가 되었지만 바실리오스는 그를 미워하다 못해 증오했다. 레온은 이 시기 조이 자우치나(Ζωή Ζαούτζαινα)라는 미녀와 정분을 나눴는데, 바실리오스는 조이를 다른 남자와 결혼시켜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보내버리고 레온에게는 테오파노라는 여자와 결혼시켰다. 테오파노는 신앙심이 매우 두터웠지만 못생겼고, 레온은 그런 그녀에게 질색해 한 침대에 함께 눕는 것조차 거부했다.
바실리오스 1세 치세 말기, 레온은 아버지를 상대로 반역 음모를 꾸몄다는 고발을 받고 긴급 체포되었다. 바실리오스는 아들의 두 눈을 뽑으려 했지만 아내와 신료들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두고 감옥에 가둬뒀다. 그러다가 886년 8월 29일, 바실리오스는 사냥 도중 사고로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바실리오스는 사냥 도중에 사슴의 뿔에 찔러 죽었고 한참동안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아서, 일부 학자들은 레온이 원로원과 힘을 합쳐 아버지를 암살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레온은 즉위 후 미하일 3세를 황제의 예우로 장례를 치뤄줬고 아버지의 관을 벗겨버렸다.

2.2. 황제 레온 6세



2.2.1. 내치


레온은 즉위 후 애인 조이의 아버지인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Στυλιανὸς Ζαούτζης)에게 각종 칭호를 하사하는 한편, 체신부 장관(Logothetes tou dromou)이라는 요직에 임명해 제국의 대내외 정책을 총지휘하게 했다. 반면 전 황제 바실리오스 1세와 밀접한 관계였던 총대주교 포티오스를 퇴임시키고 886년 크리스마스에 막내동생 스테파노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했다.[4] 이후 레온은 899년에 종교회의를 소집해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이렇듯 종교 문제를 해결한 뒤, 레온은 로마법을 개정하고 재편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바실리오스 1세가 구성한 법률위원회의 프로토스파타리오스인 심바티오스의 도움을 받아 법 개정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학식이 풍부한 황제여서 이런 일에 적합했다. 그 결과 <바실리카 법전>이 몇 년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 법전은 대체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칙법휘찬>과 <학설휘찬>에 바탕을 두었지만 <프로케이론> 같은 후대의 법전도 포함되었다. 이 <바실리카 법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로 법규들을 기록했다.
또한 레온은 <신법령>을 제정했다. 이 법전은 정치와 종교의 이념이 변화한 상황에 맞춰서 낡은 법들을 개정하거나 폐지한 113개 조의 법령집이다. <신법령>은 황제가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사람으로 규정했지만 교회서열로는 평신도에 지나지 않으며 교회의 지도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라고 밝혔다. 물론 황제가 총대주교를 임명하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성직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또한 황제는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야 했고 교리 문제에 대한 황제의 의무는 정교회 신앙을 규정된 대로 보호하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종교 외의 다른 분야에서의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원로원은 입법 기능을 박탈당하고 단지 자문 기능만 수행할 수 있었다. 황제는 12사도와 동격이며 제국 정부의 주인이고, 군대의 총사령관이며, 유일한 입법자이자 최고 판사였다. 그의 결정은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따라야 했다.
또한 레온은 공공 건물 건설에도 박차를 가했다. 특히 이 시기에 건설된 키프로스 라르나카의 라자로스 교회는 비잔틴 건축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리고 레온은 <총독의 책(Book of the Eparch)>과 <필로테오스의 글레토롤로그온(Kletorologion of Philotheos)>을 발간했다. 총독의 책은 콘스탄티노플의 무역 및 무역 조직에 관한 규칙과 규정이 기술되어 있고, 글레토롤로그온은 동로마 제국 법원의 관리와 집행 체계를 표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레온은 <탁티카(Tactica)>의 저자 또는 후원자로 여겨지며, 이 책은 동로마 제국의 군사 조직과 전술, 그리고 외적에 대한 동로마의 대응 방식 등이 기술된 중요한 군사 사료다.

2.2.2. 외치


894년, 레온의 최측근인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는 자기 심복 두명에게 불가리아 무역의 독점권을 내주었다. 그들은 제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물품에 대해 불가리아 상인들이 지불하는 관세를 대폭 인상하고 물자 집산지를 콘스탄티노플에서 테살로니키로 옮겼다. 그러자 불가리아와 제국간 무역로가 붕괴되었고, 불가리아 국왕 시메온은 즉각 항의했지만 레온은 듣지 않았다. 이에 시메온은 무력 행사를 하기로 결심하고 트라키아를 침공해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
레온은 남부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던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급히 소환해 시메온의 공세를 저지하게 하는 한편 마자르족에게 도움을 요청해 불가리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자 시메온은 또다른 유목민족인 페체네그족에게 막대한 양의 황금을 바치고 마자르족의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마자르족의 영역은 페체네그족에게 큰 타격을 입었고, 마자르족은 시메온과 페체네그족의 협공을 피해 카르파티아 고개를 넘어 판노니아 대평원으로 들어갔다.[5] 마자르족이 완전히 물러가자, 시메온은 다시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896년, 그는 불가로피곤 전투(Battle of Boulgarophygon)에서 제국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결국 레온은 5년간 평화 협상 끝에 매년 많은 공물을 바치기로 하고 강화를 맺었다.
니키포로스 포카스가 발칸 반도로 가서 시메온과 맞서던 사이, 사라센은 남부 이탈리아로 쳐들어왔다. 902년 8월 1일, 시칠리아에 남아있던 제국의 마지막 거점인 타오르미나가 함락되었다. 그리고 제국 동방에서는 아르메니아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 빠졌으며 킬리키아도 위험해졌다. 그리고 테살리아의 테메트리아스가 파괴되었다. 904년, 트리폴리의 레온이라는 이름의 그리스인이 사라센 함대를 이끌고 헬레스폰트를 거쳐 마르마라 해로 진입했다가 격퇴되자 테살로니키로 진군해 904년 7월29일 제국 제2의 대도시였던 테살로니키를 함락하고 일주일간 살육을 자행하고 귀중한 전리품과 3만여 포로를 싣고 떠났다.
레온은 테살로니키가 파괴된 것에 대한 보복을 결심했다. 그는 우선 파괴된 테살로니키의 요새를 재건하고 강화한 뒤 선박을 대량으로 건조하여 대규모 함대를 구성했다. 그는 905년 가을에 이메리오스 장군이 지휘하는 함대를 출격시켜 아탈레이아로 가서 현지 군대 총독인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지휘하는 육군을 태운후 타르소스로 진군하는 작전을 수립했다. 타르소스는 사라센의 거점이자 테살로니키와 맞먹는 항구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메리오스는 아탈레이아로 진군했는데, 두카스는 자신보다 아래 계급이라고 여긴 이메리오스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반발하여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제국에 대해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메리오스 장군은 작전을 강행하기로 마음먹고 타르소스로 진군해 사라센 함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일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한편,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가 토벌대를 피해 이코니온 부근의 한 요새로 도망쳤다. 그는 여기서 906년 3월까지 머물다가 제국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함께 사라센 영토로 넘어가서 파괴된 타르소스에 잠시 체류한다음 바그다드로 피신했다. 이에 레온은 바그다드로 사절단을 보내 포로 교환 협상을 벌였다. 이때 황제는 사절단에게 비밀 서신을 맡겨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에게 전하게 했다. 그 서신의 내용은 예전처럼 충성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원대 복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서신은 도중에 발각되었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처형을 피했지만 철저한 감시를 받다가 얼마 후에 사망했다.
한편, 레온은 제국 서방에서도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분전으로 남이탈리아 랑고바르드 지배 지역의 핵심이던 베네벤토 (베네벤툼)을 탈환하여 '롱고바르디아' 테마를 창설하는 등 마냥 밀리지만은 않은 모습을 보였다.

2.2.3. 네 번 결혼한 황제


레온은 황제 즉위 전에 테오파노와 결혼했고 황제 즉위 후 그녀를 황후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테오파노를 싫어했다. 테오파노는 종교에 깊이 빠져 하루종일 기도를 올렸고, 심지어 밤에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방 한구석에서 거친 요를 깔고 자다가 매 시간 일어나 기도를 올렷다. 이러니 후계자 생산이 요원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두 사람간의 유일한 혈육인 에브도키아가 892년 겨울 사망하자, 테오파노는 은둔 생활에 더욱 깊이 빠졌고 블라헤르나에 법궁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속한 수녀원에 들어가더니 897년 11월 10일 딸의 뒤를 따라갔다.
레온은 테오파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러준 뒤 즉위 전부터 연인으로 삼았던 조이 자우치나와 898년에 결혼했다. 사실 그녀는 바실리오스 1세에 의해 테오도로스(Theodore Gouniatzizes)와 결혼했으니 레온과 맺어질 수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테오도로스는 바로 이 시점에서 사망했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시점에서 죽었기에 황제에게 모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증거는 없다. 아무튼 황제와 결혼한 조이는 곧 임신했고, 레온은 아들을 기대했지만 막상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고 안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레온이 겪게 될 불행의 시작이었다.
899년 봄, 조이의 아버지이자 레온의 최측근 스틸리아노스 자우치스가 사망했다. 레온은 장인에게 바실레오파토르라는 직함을 부여해 명복을 기렸다. 그리고 그해 겨울, 조이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레온은 깊은 슬픔에 잠겼지만 또 다시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그에겐 마땅한 아들이 없었고 명목상 공동 황제인 알렉산드로스 2세는 술과 방탕한 생활로 인해 레온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국교인 정교회는 삼혼을 '점잖은 간통'으로 간주했으며 4년 동안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영성체는 신의 은총을 정기적으로 받는 행사였으니 황제가 그걸 받지 못한다면 국가 전체의 중대한 문제였다.
당시 총대주교인 안토니오스 2세 카울리아스[6]는 레온을 위해 특별히 삼혼을 허락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900년 여름, 레온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신부 전시회'를 통해 프리기아 출신의 에브도키아 베아나를 새 아내로 맞이했다. 901년 4월 12일 부활절, 에우도키아는 마침내 레온에게 아들을 선사했다. 그런데 그녀는 출산의 고통으로 얼마 안가 죽었고 아이마저 며칠 뒤에 사망했다. 이때 성 라자로스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은 에브도키아가 삼혼이라는 죄악을 저질렀으니 자기 수도원의 경내에 매장하는 걸 단호하게 반대해 가뜩이나 슬픔에 잠긴 황제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레온은 이제 네 번째 결혼을 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네 번째 결혼은 지난 3차례의 결혼 때에 비할 수 없이 극심한 반발을 살 우려가 있었다. 정교회 교리에 따르면, 사혼은 간통보다 나쁜 일부다처의 죄이며, 사혼을 한 인간은 '인간이 아닌 금수와 같은 존재'로 취급되어 8년 동안 영성체를 하지 못하는 벌이 부과되었다. 그래서 레온은 일단 이메리오스 장군의 조카딸 조이 카르보노프시나를 정부로 삼았다. 그 후 905년 9월, 조이가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안토니오스 총대주교는 이 아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해 달라는 레온의 요청에 장기간 고민한 끝에 조이를 황궁에서 내보내는 대신 태어난 아들에게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906년 1월 6일, 아기 황태자는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고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스는 법적으로 '사생아' 취급이었기 때문에 이대로는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레온은 어떻게든 조이를 정식 황후로 삼아야 했다. 이에 레온은 황궁 내의 조그만 예배당에서 평범한 교구 사제를 앞에 두고 조이와 함께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린 후 이 사실을 공표하고 조이를 황후로 선포했다. 그러자 황제의 전횡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게다가 하필 이 시기에 온순했던 안토니오스 총대주교가 사망하고 새 총대주교에 등극한 니콜라오스는 당대 최고의 학자인 케사리아의 주교 아레타스의 맹공을 받고 있어서 황제를 돕기 힘든 처지였다.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입지가 좁아지고 자신에 대한 비난이 폭주하자, 레온은 초조해졌다. 그는 어떻게든 특면장을 얻어내 사혼을 인정받고 싶었지만 니콜라오스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이에 황제는 906년 가을에 프사마티아 수도원의 대수도원장인 에우타미오스와 일종의 밀약을 맺었다. 그를 새 총대주교로 선출할 테니 특면장을 발급해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레온은 교황 세르지오 3세에게 사혼 문제에 관한 질문서를 보내 동방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길 희망하던 교황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니콜라오스 총대주교를 몰아낼 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906년 크리스마스, 레온은 조이를 데리고 행사에 참여했다. 이때 니콜라오스는 황제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 들어오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황제는 이에 항의하지 않고 잠자코 황궁으로 돌아왔지만 907년 2월 교황 특사가 수도에 도착하기 전날 밤에 니콜라오스가 반역자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와 비밀 연락을 주고받은 혐의가 있다며 그를 긴급 체포해 강제로 총대주교직에서 몰아냈다. 이후 교황의 사절이 교황의 승인을 담은 서신을 황제에게 전해줬고, 에우타미오스는 총대주교에 올라 황제가 그토록 고대하던 특면장을 부여했다.[7]
이렇게 해서 마침내 사혼을 달성하고 후계자 생산에 성공한 레온은 이제 열여덟 달이 된 아기 콘스탄티노스에게 '포르피로옌니토스', 즉 적장자 황태자라는 어엿한 신분을 부여했다.

2.3. 말년


910년, 레온은 이메리오스 장군에게 시리아의 라오디키아 항구를 공략하게 했다. 이메리오스는 임무를 충실히 완수한 후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고 무사히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그후 레온은 911년 가을 크레타 섬을 공략하기 위해 이메리오스를 파견했다. 하지만 사라센군이 크레타 섬의 방어를 강화했기 때문에 섬 공략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메리오스 장군은 911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 여섯달 동안 포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912년 4월, 수도로부터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어 오래가기 어렵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포위를 풀고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그의 함대가 히오스 섬을 돌았을 때, 갑자기 대규모의 사라센 함대가 그들을 포위했다. 이 사라센 함대의 지휘관은 바로 테살로니키를 파괴했던 트리폴리의 레오였다. 동로마 제국의 함대는 이 전투에서 궤멸되었고 이메리오스는 간신히 미틸리니로 피했다가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다. 이 재앙이 황궁에 전해졌을 때, 레온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 고개를 벽으로 돌려버렸고 912년 5월 11일 밤에 사망했다.

3. 참고 자료


  • 워렌 트레드골드 : <비잔틴 제국의 역사>
  •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 <비잔티움 제국사>
  • 존 줄리어스 노리치 : <비잔티움 연대기>
[1] '현제', '현명한 자'라는 뜻이다(영어로는 The wise) 그런데 사실 그 속뜻은(물론 범용한 군주보다야 훨씬 낫지만, 세종대왕급이나 로마의 대제(Magnus, Megas)급으로 보기엔 꽤 무리라는 것.)무의 재능은 그냥 그렇고 문치에 치중해 있다는 학자-지식인 타입의 군주라는 뜻으로 붙었다. 나랏일에는 학식과 결부된 것(제도 정비, 법전, 종교 업무 등) 이 있고 아닌 것(주로 국방/군사 업무)이 있는데, 전자에 한정하면 꽤 성과를 이루었지만, 전자와 후자를 통틀어서 평가할 때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2] 현제라 불릴만하고 보는 쪽에서는 전대 황제를 비롯해 당대 문맹이 다수이던 시대상을 감안했을때 제국의 군주가 최신 사조를 받아들일 정도로 깨어있고 학식있는 군주라는 점에서 현제라 불릴만 했다고 본다.[3] 사문화된지 오래인 집정관 제도를 이 시기에 폐지했다.[4]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매우 장시간 지속된 아리우스파아타나시우스파 간의 논쟁에 모두가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5] 이 지역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마자르족의 고향인 헝가리다.[6] 레온의 동생 스테파노스 총대주교는 893년에 사망했다.[7] 다만 사혼 자체는 재가하지 않아서, 레온은 조이와 함께 사는 동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는 고해자의 자격으로만 들어갈 수 있었고, 성소에는 입장이 불허되었으며 성무 중에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