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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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어원
3. 역사
3.1. 기원
3.2. 제2의 게르만족 대침입
3.3. 쇠퇴 및 재평가
4. 생활상
4.1. 식생활
5. 군사
5.1. 전설의 바이킹 명검 Ulfberht
6. 바이킹의 항해
7. 매체
8. 유명한 바이킹들
9. 바이킹계열의 유명한 후손들
10. 미디어의 바이킹들, 혹은 모티브로 한 것들
11. 같이 보기


1. 개요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갤러리에서 바이킹과 노르드 신화를 주제로 만든 뮤직 비디오
바이킹은 유럽 중앙의 주민들이 8세기 말에서 11세기 중반에 걸쳐 북쪽에서[1] 내려온 게르만족의 일파인 노르드인들을 통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북부에 한정되어 생활하던 노르드인이 유럽 각지로 뻗어나갈 수 있었으며 노르드의 신화, 언어 등의 문화가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치고 많이 보존될 수 있었다.

2. 어원


Víkingr
고대 노르드어로 만(灣)을 뜻하는 단어 VIK어디 출신 사람인지를 뜻하는 단어 ingr의 합성어로 만에서 온 사람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직까지 확실한 정설은 아니다. 이 용어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19세기 범스칸디나비아주의가 발흥하면서 발견되는 바 당시 민족주의 사상에서 나온 명칭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발견된 바이킹 문자는 1차 문자와 2차 문자로 나뉘는데 1차 문자는 아직 해독되지 않았다.(이에 관해서는 룬 문자 참조)
참고로 바이킹(ˈvaɪ.kɪŋ)이라는 발음을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뿐이다.
프랑스,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의 여타 모든 유럽 국가에서 부르는 명칭은 비킹. 하지만 당시 노르드어로 발음하면 위킹그르가 될 것이다.

3. 역사



3.1. 기원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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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사진들을 보면 알겠지만 기원전 1700년경부터 고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는 노르딕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으며, 이후 이들이 차츰 남하하면서 게르만족으로 불렸다.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의 영토 내에 왕국을 세우는 시기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유럽인들의 역사관에 포함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고,[2] 고향 땅에 남아있던 북게르만족은 8세기 이후 남하하여 과거의 동족들을 포함한 유럽 각 지역에 영향을 미치면서 유럽인들의 역사관에 포함되었다.
8세기 이후, 유럽은 점진적인 농업 기술의 발달과 함께 "Medieval Warm Period"라고 불리는 따뜻한 기후에 힘입어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는 추운 북유럽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인구는 유례없이 크게 늘어났지만, 한정된 자원을 넘어서까지 계속 늘어나는 인구를 제어할 수는 없었으며 농업만으로는 불어난 인구를 유지하기 어려운 시점까지 도달했다. [3]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식량 공급원을 찾고자 하는 이들과 보다 나은 삶의 터전을 찾아나서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 조직적으로 전 유럽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단 몇세대 만에 잔인한 광전사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
바이킹은 크게 스웨덴계와 덴마크계로 나뉘는데, 스웨덴계는 고틀란드를 중심으로 발트 해에서 볼가 강과 드네프르 강으로 들어가는 동쪽 루트를 선호했으며, 덴마크계는 영국과 프랑스 남부를 위시하는 대서양으로 항해했다.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로, 최초의 성문화된 영문학 작품인 《베오울프》와 헤이스팅스 전투 이전까지 영국에 존재했던 데인 로(Dane Law)가 있다.[4]

3.2. 제2의 게르만족 대침입


[image]
바이킹의 활동 범위 및 이동 경로 (숫자는 최초 진출년도)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가진 바이킹은 8세기~11세기 사이의 2차 민족 대침공의 주역이었다. 그들은 잉글랜드, 프랑스 등지의 해안 지방은 물론이고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플 근교, 러시아 부근,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페르시아까지[5] 약탈했다. 카롤링거 왕조가 동프랑크와 서프랑크로 분열되고, 그 내부에서도 친족 간의 골육상잔이 벌어지고 있었던 상황에서, 프랑스 지역은 바이킹의 약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상황은 더 심각해서, 잉글랜드의 경우 한때 웨식스를 제외한 모든 왕국들이 바이킹에게 넘어간 적이 있었고,[6] 아일랜드를 침략한 바이킹들은 더블린, 코크 등지에 여러 작은 왕국들을 세웠다. 다만 바이킹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만큼은 후우마이야 왕조의 반격으로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해적으로서의 야만스러운 바이킹의 인상이 깊게 남아있어서 '거대한 도끼(또는 양날 도끼)를 들고 뿔투구를 쓴 잔인하고 마초적인 바바리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탁월한 항해사이자 탐험가, 상인이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편견과 달리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다. 자유민들은 매년 의회(althing)를 소집하여 법을 제정하거나 분쟁을 해결했다. 이러한 의회 문화는 영국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아이슬란드에서 국회(의사당)은 '알씽기'라 불린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유럽 대륙 문화의 영향을 받아 나중에는 서프랑크 왕으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하사받아 10세기경 노르망디 공국을 건립하였고, 잉글랜드에 정복왕 윌리엄을 시조로 하는 노르만 왕조를 열었으며, 시칠리아를 시작으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탈리아 남부를 빼앗아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러시아의 강을 타고 내려간 루스족은 하자르 칸국을 격파한 후 북유럽과 흑해 그리고 중동을 잇는 무역로를 장악하였다. 류리크가 이끄는 3 명의 추장들은 862년경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루스 카간국을 수립했다. 아랍 은화들이 노브고르드와 핀란드, 스웨덴, 유틀란트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바이킹들이 압바스 왕조와의 모피와 노예, 꿀, 밀랍 등을 수출한 뒤 동방 물산을 수입하여 서유럽에 되판 돈으로 얻은 수입은 대략 1000만에서 1억 닢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류리크와 그의 후손인 류리코비치 가문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기원이다.
882년경 류리크의 후계자 올렉은 아시아계 유목민들로부터 키예프를 정복하고, 루스 카간국을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거대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비록 이후 슬라브족에 동화되기는 하지만, 일단 러시아 역사의 기원으로 평가되는 키예프 공국이 류릭의 후손들에 의해 세워졌고, 키예프가 갈려나간 뒤 러시아의 새로운 중심지로 대두한 모스크바 공국 역시 류릭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다. 분할 상속 전통 때문에 영토가 쪼개져서 군소국가군이 난립하기는 했지만, 류릭의 후손들이 통치한 영지를 합치면 대충 유럽 러시아 중심부 + 벨라루스 + 우크라이나가 나온다. 또한 왕조로써의 류리크 가문은 1598년 이반 4세의 삽질로 단절되기까지 700년 동안 러시아를 지배했고, 이후 류리크 왕조의 단절 이후 러시아가 혼란 시대로 빠져든 원인 자체가 '류리크 가문의 직계가 아닌 이상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어서'였다. 혼란 시대를 거쳐 탄생한 로마노프 왕조 역시 류리크 가문과의 혼인을 근거로 왕위를 요구했던 것까지 요구할 정도로 바이킹 왕조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러시아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명칭이 Pyccкий 즉 루스인이다.
[image]
8세기 ~ 11세기 스칸디나비아인의 정착
이들은 무슬림 (사라센) 토후국이 지배하고 있던 시칠리아 섬과 동로마 제국이 지배 중이던 칼라브리아[7]를 정복했고, 이탈리아 남부 영토를 통해 서방 교회에 간섭하던 동방 교회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다. 이탈리아 남부를 통한 서방 세계에 대한 동로마의 간섭은 결국 바이킹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이탈리아 남부를 동로마가 영구히 상실하면서 끝났다.
주로 바이킹의 정착에서 남이탈리아가 많이 언급되는데 이미 그들은 노르망디에 정착한 지 한 세기 이상이 된지라 그리스도교화 및 프랑스화가 된 상태였다. 프랑스 문화와 정체성을 가지고 프랑스어를 쓰고 군대도 바이킹 특유의 롱보트를 타고 다니는 땡보병 군대에서 중기병 기사 중심의 프랑스식 군대로 완벽히 변화했는데, 노르만인들이 갑자기 바이킹으로 변모해서 국가를 세운 양 시칠리아 왕국이 바이킹의 정착이라 부르면 전후 결과가 뒤바뀌게 된 거랑 별 차이가 없다.
이미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 총독부의 성상파괴운동 때문에 국내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짓밟은[8] 상태라서 사실상 로마 교회에 대한 압력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했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남부 영토도 노르만 덕분에 잃어버리고, 노르만이 교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다음에는 자기 영토 확보+교황에 대한 충성으로 아예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최후의 거점 바리까지 밀어버렸다.(...) 여기에 나름대로 동로마를 살리려고 서방 세계를 이용해 먹은 알렉시오스 황제의 계략이 결과적으로 4차 십자군이란 결과로 이어짐으로써[9] 이번엔 완전히 망했어요.
한편 9~10세기에 남하해서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에 정착한 북게르만족의 일파들은 바랑인 친위대로 동로마군에 복무하였다. 반란과 배신이 판을 치던 난세에 용병으로서는 보기 드문 충성심 그리고 바랑인 특유의 무자비함과 용맹을 발휘하며 동로마 최정예 근위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들의 항해술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아이슬란드그린란드는 물론이고 캐나다 동부와 뉴펀들랜드까지 바이킹이 진출하여 빈란드라 이름붙이고 식민지 란세오메도스(L'Anse aux Meadows)를 건설한 흔적이 남아있다. 하지만 원주민들과의 마찰과[10] 기후의 변화로 결국 그린란드로 돌아가야 했다. 아메리카에서의 정착을 단념하고 철수한 후에도 바이킹들이 캐나다를 방문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는 배를 만들기에 적합한 양질의 목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3.3. 쇠퇴 및 재평가


물론 바이킹의 공격이 당시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바이킹의 공격으로 서유럽의 많은 도시와 마을, 수도원 등이 파괴되고 약탈되었으며, 상당한 인명과 경제적인 피해를 입었다.
바이킹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로, 이때부터는 해안 방어 체계가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약탈의 주 수입인 노예 무역이 농노제로 효용이 떨어지고 바이킹 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11][12] 또한 11세기에 정점을 찍었던 온난한 기후도 다시 악화되어 점차 소빙기 기후로 변해갔다. 그린란드는 더 이상 푸르를 수 없었고, 바이킹의 주 근거지는 유빙으로 항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것보다 이 소빙기가 가장 결정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본진 자원이 말라붙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리고 약탈에 있어서도, 상륙하는 해적만 보면 말타고 달려와 몸통박치기를 날리는 유럽 기사들에게 기존의 보병 방진이 짓밟히며 점점 시원찮아진다. 아예 현지에 정착해 본인들이 봉건기사가 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전통적인 바이킹은 현지인이든 동화된 바이킹이건 봉건기사에게 막혔다.
역사소설가 세실리아 홀랜드는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프랑스화한 노르만 바이킹인 노르만 기사들이 승리하고, 뒤이어 잉글랜드를 점령하면서 바이킹의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평한다. 만약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왕 헤럴드가 눈에 화살을 맞고 죽지 않았더라면 잉글랜드는 라틴 문명이 아닌 바이킹 문명 하에 좀 더 남아있었을 것이고, 브리튼 섬을 교두보로 바이킹이 융성했을 것이라는 대체역사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하던 고대 노르드어영어에 약 139개의 단어를 남겨놓았다.[13][14]
바이킹은 근대 이전만 해도 유럽과 중동에서 잔인하고 냉혹한 이교도 야만족의 대명사였고, 현재와 같은 "진취적인 해양민족"이라는 이미지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근대에 민족주의 및 제국주의가 고양되면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바이킹에 대한 재평가에 들어간 나라는 주로 스칸디나비아, 독일, 영국이었다. 바이킹의 고향이었던 스칸디나비아는 사실 서유럽 주류에서 떨어져 있었던 데다가, 역사시대에 들어간 것도 다른 서유럽 국가보다 한참 늦은 9세기경일 정도로 역사적으로 내세울 만한 것이 거의 없었지만, 무언가 자신들의 전통에서 주목할 만한 것을 찾다보니 자신들의 조상이었던 바이킹에 대한 재평가에 들어갔다. 여기에 독일은 서유럽 주류문화였던 로마-프랑스 문화에 대비되는 게르만 문화의 본류로 바이킹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바이킹에게 가장 호되게 당한 나라지만, 바이킹과 비슷한 해양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에 이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세기가 되자, 바이킹은 전면적인 재평가를 받게 되었으며, 바이킹 및 여러 북유럽 사가(saga)들, 북유럽 신화를 주제로 하거나 미화한 여러 작품들이 여러개 나왔다. 이로써 현재와 같은 "용맹한 해양민족"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다.[15]

4.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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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640px-Varangian_routes.png
바이킹은 동방과도 많은 교역을 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발굴되는 바이킹 무덤의 부장품에 8세기경 인도 동북부에서 제작된 불상, 알라라고 새겨진 반지, 이슬람 동전 등 수천 점의 동방의 물품이 같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의 동방 교역을 연구한 결과, 볼가강을 따라 카스피해를 지나서 지금의 이란에 도달하는 Volga Trade Route 라고 부르는 바이킹의 교역로가 밝혀졌다. (위 그림의 붉은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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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는 모르지만 뿔투구를 쓰고 다닌다는 인식이 박혀있는데,[16] 이러한 투구들은 위의 유물 사진들에서 나타나는 형태로 바이킹들의 무덤에서 간간이 발견되기는 하나(참고: #), 실용적으로 사용되기에는 무리인 수준의 그 크기나 장식의 화려함으로 인해 신라와 가야의 금관처럼 매장품으로 제작된 것이거나 종교적인 용도로 쓰였다고 생각되며, 이 뿔투구를 쓴 인물을 묘사한 유물들은 덴마크의 시랜드섬에서 출토된 쌍둥이 신 알치의 모습으로 주조된 깃대 장식주물이나 뿔 자체를 신비로운 신앙의 상징으로 여긴 당시 기록이나 묘사들에서 그러한 점을 확신할 수 있다.[17] 실제 전투를 묘사한 당시의 그림들에서는 이런 뿔투구의 모습은 볼 수 없고, 보통은 위가 뚫린 골무 모양의 노르만 투구나 원뿔 모양의 투구에 덧붙여 찰갑과 눈이나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 모양의 얼굴 보호구가 달린 투구를 많이 썼다. 위 그림에서 초창기 바이킹들의 투구 양식을 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토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이킹들은 뿔투구가 아닌 그냥 투구를 썼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양날도끼와도 연관이 많다고 여겨지지만, 바이킹들은 던지기 좋은 가벼운 손도끼나 자루가 긴 외날 도끼인 데인 액스를 좋아했고, 양날도끼는 제의 의식에나 사용했다는 것이 당대의 성상화나 조각품들에서 드러나고 있다.[18]
우리가 아는 스테레오타입 바이킹은 1870년대 니벨룽에 반지의 오페라에서 복장 디자이너인 Carl Emil Doepler 바이킹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쓰게 했다. 이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스테레오타입이 등장했다.
꽤 독특한 유물도 있는데 뼈를 갈아 짤막하게 만든 스케이트화도 있다. 다만 지금같이 얼음을 미끄러져 가는 것이 아니라 짧은 스키와 비슷한 용도로 본다. 이러한 물건은 긴 스키가 비로소 등장하는 근대까지도 쓰여졌다. 물건들에 장식을 많이 했는데 높은 신분의 물건뿐만 아니라 낚시줄을 감아놓는 막대나 빨래 펴는 판에도 장식이 가득 새겨져 있다. 주로 선호된 장식은 노끈이 기하학적으로 겹쳐져 매듭처럼 얽힌 무늬.
바이킹의 놀이는 흔히 생각하는 음주와 싸움 무훈자랑에서 사냥이나 노래, 타블룻이라는 고누와 비슷한 장기도 있었다.
가옥은 청동기 유적이나 울릉도 초갓집에서 볼법한 일체형 주택인데 목적은 앞의 둘과 같이 보온의 이유가 가장 커보인다. 이런 폐쇄적인 형태는 안이 어둡고 습하고 냄새가 난다는 점에서 큰 단점이 있다. 아이슬란드와 같이 나무가 모자란 동네에서는 돌로 벽을 쌓고 서까래같이 틀만을 나무로 만들고 그 위로 흙을 덮었다. 그래서 가옥 유적을 보면 마치 고래등 같은 집 위로 이끼가 잔뜩 뒤덮은 것 같이 보인다. 나무마저도 구하지 못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은 밧줄 같은 걸로 서까래를 지었다고 한다.
왠지 지저분했을 것 같다는 편견과는 달리, 세계적으로도 위생을 무척 중시하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바이킹들의 거주지가 있던 곳에서는 과 귀이개, 족집개, 면도칼이 잇따라 출토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원시적인 형태의 비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19] 바이킹들의 노략질에 시달렸던 잉글랜드 측의 기록에도 바이킹들은 굉장히 깨끗하게 정리정돈을 하며 산다고 적혀 있다. 또한 오늘날의 사우나처럼 온천의 증기로 목욕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20]
다만 아랍인인 파들란의 기록에서 매우 부정적이게 묘사하는데, 식사 후 손을 닦지도 않고 대소변을 가려보지도 않으며 야생 당나귀 같다고 묘사하고 주인이 세수를 하면 그 물에 가래를 뱉고 그 물로 다음사람이 이어서 세수를 한다는 점을 경멸스럽게 보았다.
게다가 바이킹 하면 흔히 헝클어진 장발과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야만적인 남성을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머리를 짧게 잘랐으며 면도를 했다. 머리에 양쪽 귀를 두르는 선을 기준으로 그 밑에 머리는 다 짧게 자른 머리 모양[21]을 깔끔하다고 좋아했다. 면도도 했는데, 당시에는 거품 비누도 없고 좋은 면도날도 없으니 도끼날로 다듬었는데, 워낙 하기가 힘든 일이라서 고급 문화로 여겼다고 한다.
술집에서는 서로에게 모욕을 주는 욕설 배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의 랩배틀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고. 아무 욕지꺼리나 하는 것이 아니라 라임, 리듬을 중요시하는 시적 표현으로 싸웠으며 상대방이 발언하면 그 말을 받아서 연관된 단어로 대처해야 하는 등 여러 규칙들이 있었다. 특히 랩배틀에서 상대를 찍어누르는 소위 '펀치 라인'이 존재하기도 했다. 즉, 그냥 말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놀이 문화였으며 세간의 인식과 달리 몸싸움이 아닌 말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도 명예롭게 여겼다.
또한 의외의 사실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덴마크 국립 박물관에 의하면 당대의 바이킹들은 코미인들을 비롯한 북극 문화권의 민족들과는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시대에 따라서는 이들의 문화를 일종의 유행처럼 받아들인 적도 있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훗날 같은 종교관을 공유하게 될 남쪽의 기독교 국가들을 오히려 더 적대시했다는 점이 매우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사실 어떻게 보면 바이킹들은 추운 지역에서 항해하는 일도 잦았고 거기다 그런 기후에서도 갑판 생활을 지속해야 할 수도 있었으니 북극 문화권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야 할 간절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22]
마초적인 이미지와 달리, 나름대로 여성 인권 또한 강한 축에 속했다. 일부 여성들은 '방패 처녀[23]'라고 불리며 남성과 동등하게 전투를 수행했으며, 그중에는 (희귀하긴 하지만) 고위직 군사지도자도 있었다고 한다. # 실제로도 무장들과 방패들, 군마 두필과 함께 매장된 고위직 바이킹 방패 처녀 한명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바이킹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다만 이혼을 하려면 결혼 당시에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지참금을 다시 돌려줘야 했다. 바이킹 여성들이 이처럼 권리가 강했던 까닭은, 남성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면서 집을 비우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 기간 동안 아내가 집을 관리하고 재산과 농토를 지키는 등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4]
바이킹들의 장례식은 지역의 관습[25]이나 망자의 신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단순히 간단한 부장품과 함께 매장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만일 죽은 사람이 부유하고 지체높은 사람이라면 특별히 배와 함께 장례식을 치러주는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덴마크 바이킹인 데인족의 경우에는 그들의 시조인 쉴드 섀핑(Scyld Scefing)의 경우처럼 망자의 시신을 보물과 함께 배에 실어서 바다로 떠내려 보냈는데, 이 광경은 서사시 《베오울프》에 잘 묘사되어 있다.
아랍인인 이븐 파들란(Ibn Fadlan)이 남긴 목격담에 따르면, 러시아 바이킹[26]들의 경우에는 부유한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 마찬가지로 그의 시신을 배에 실은 후, 망자가 거느리던 노예들 중 지원자[27] 한 사람을 받아 그를 죽여서 마찬가지로 망자의 시신 옆에 눕히고, 최후에는 배에 불을 질러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순장의 일종인 셈이다. 이때 순장에 처해질 노예의 심장에 칼을 박아 확인사살을 하는 일은 덩치 좋고 힘이 센 노파가 맡았는데, 이들은 일명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라 불렸다.
척박한 지방에서 살아서 약탈을 주된 생활사로 아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반농 쪽에 가까웠다. 거기서 재배할 수 있는 곡식과 야채를 재배하였고, 낙농업도 어느 정도는 시행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는 중국의 흉노 등의 외부 민족들의 생활사와 유사하다.

4.1. 식생활




바이킹의 여행식을 소개한 영상. 말린 청어와 육포, 버터밀크로 구운 쿠키 등 이동에 유리한 보존식 위주의 음식들을 볼 수 있다. 다만 당시의 보관 기술의 한계로 일상식 또한 보존식의 비율이 높았기에 어마어마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뱃사람들이 먹던 뻑뻑한 말린 어포 수준은 아니지만 훈제나 염장 정도의 처리는 필수였고 같은 이유로 소세지 또한 만들어 먹었다.
일상식으로는 화덕에 구운 플랫브레드에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식재료를 곁들여 먹었다. 농장에서 직접 기른 야채와 돼지(주로 집에서 직접 절인 베이컨)로 만든 스튜를 몇 날 며칠 씩 끓여먹었으며 계절에 따라 남자들이 숲에서 잡아온 짐승의 고기나 아이들이 주워온 열매와 견과류를 같이 먹기도 했다. 코티지 치즈또한 우유를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널리 사용됐다. 해안에 인접한 공동체의 경우 여기에 대구나 청어, 어패류 같은 해산물이 추가된다. 음료는 맹물이나 음식에 쓰고 남은 버터밀크를 주로 마셨으며 가끔 약한 에일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과수원에서 기른 자두 따위의 과일은 (대부분의 자유민 입장에서) 나름 귀한 별식 취급이었기에 일상에 후식으로 나오는 경우보다는 축일에 꿀을 곁들인 신선한 빵과 같이 먹는 경우가 많았다.
잔칫날에는 온 가족이 롱하우스에 모인다. 먹는 음식들은 일상식이 양과 질을 늘린 형태를 띠는데 옛신들에게 제물로 바친 신선한 말 고기를 케밥과 유사한 꼬치구이로 만들어 먹기도 하고 기독교를 믿는 가정의 경우 전통 축일에도 어린 양고기를 먹기도 했다. 이런 날도 훈제나 염장 고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구운 고기또한 생고기보다는 조금 오래 가는 만큼 여유가 되는 대로 생고기를 구워먹었다. 목을 축일 봉밀주와 맥주는 덤.

5. 군사


모든 바이킹 남자들은 관습적으로 적어도 하나 이상의 무기는 가지고 있었고, 부유한 사람이라면 헬멧[28]사슬갑옷, 방패을 다 지녔다. 바이킹 유물 중에서는 정교하게 잘 제련된 검이 많이 출토되고 부무장으로 단검이나 검을 소지한 전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검은 만들기 어렵고 비싸다 보니 어디까지나 부무장 또는 의장용 성격이 강했고 실제로 전쟁터에서 애용된 무기는 둥근 방패이었다. 창의 길이는 보통 2~3미터가량이었으며, 들고 찌르는 것 외에도 투창용으로도 많이 쓰였다. 방패는 주로 린덴 나무로 제작하였으나 그 밖에 전나무오리나무로 만들기도 했다. 참나무속 나무들은 방패로 만들었을 때 칼날로 내리치면 결대로 쪼개지는 데 비해 이들 수종은 칼날로 내려치면 목재의 섬유질이 빽빽해지며 파고든 칼날을 붙잡는 경향이 있어 칼날이 방패에 더 깊히 박혀 빼기 어려웠다. 방패의 크기는 높이 45~120cm에 지름(폭)은 보통 75~90cm였다.
방패와 창 등을 주로 썼던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래서 바이킹들의 전투는 방진을 이룬 보병 육박전이 많았다. 배를 많이 이용하는 생활상 말을 타는 문화나 기마병은 꽤 나중에서야 등장하였다.
탁 트인 개활지에서의 야전이나 해전에서는 활도 많이 이용했지만 보통 활을 쓰는 것보다 냉병기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을 더 명예롭게 여겼다. 고고학적으로는 도끼 유물이 많이 발굴되고, 당시에 바이킹을 그린 벽화나 회화에서 도끼를 든 전사의 모습을 많이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이 쓴 도끼를 데인액스로 부르는데, 정작 크누트 대왕의 친위부대인 허스칼 전사들이나 동로마 제국에서 활약한 바랑기아 친위대들을 제외하고는 전사들 대부분이 주무장으로 도끼를 장비한 경우는 별로 없었고 어디까지나 창병들의 보조로서나 드물게 사용되거나, 13~14세기에 이르러서야 자루가 긴 폴암 형태의 도끼들이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일단 가난한 지역이라는 한계 탓에, 농민들이 농기구 들고 싸우듯 나무베는 데 쓰던 생활도구인 도끼를 쓰는 개념이었다.
바이킹인들은 명예롭게 싸우다 죽으면 죽은 뒤에 오딘의 궁전인 발할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믿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자주 보였으며, 개중에서는 트랜스 상태에서 싸우는 버서커 등이 활약하기도 했다.
복부에 자상을 입었을 경우, 양파와 향신료를 섞은 수프를 먹였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배에 양파 냄새가 나는지 여부를 확인해서 장에 구멍이 났는지 여부를 확인했다고 전해진다. 배에서 양파 냄새가 나면 복부 장기에 치명타를 입은 것으로 확인은 할 수 있었으나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살릴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죽은 것으로 간주했다.

5.1. 전설의 바이킹 명검 Ulfberht



Man at Arms에서 제작한 울프베르트의 재현품.
전투종족 바이킹은 도끼를 비롯한 여러 무기를 사용했지만, 그중에 Ulfberht 라는 바이킹 소드가 유명하다. 국내에서는 울프베르트 혹은 볼프베르히트로 불리며, 서기 800 ~ 1000년경에 현대의 고탄소강에 필적하는 탄소 함유량이 높으면서 철의 순도도 높은, 당시로서는 오버테크놀러지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Ulfberht에 사용된 것과 같은 순도 높은 철을 얻으려면 노에서 1700도 이상으로 철을 가열하여 불순물을 없애야 하며,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시기인 1700년대 중반 이후에나 이러한 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800 ~ 1000년경에 이러한 강철을 사용하여 칼을 만든 것이다.
이러한 순도 높은 고탄소강으로 검을 만들면, 탄성이 좋아서 충격을 받아도 날이 잘 부러지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날의 가운데가 파인 특유의 디자인은 보다 적은 양의 철로 검을 만들 수 있게 되어 더 가벼우면서 구조적으로 충격에도 더 강하게 된다.
바이킹이 활동하던 당시 유럽에서는 좋은 품질의 철괴를 구할 수 없었고, 무기를 만들 정도로 대량으로 사용했다면 어딘가에는 분명 이를 제련한 흔적이나 유적이 있어야 하는데 유럽 어디에서도 일절 발견되지 않아서, 검에 사용된 품질 좋은 광석들은 볼가강 교역로를 통해 이란, 중앙 아시아에서 수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Ulfberht 는 칼날에 VLFBERHT 라고 각인되어 있는데, +VLFBERHT+ 와 +VLFBERH+T 로 2가지 종류의 각인이 출토된다고 한다. +VLFBERH+T 가 탄소 함량이 높은 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것이 진품이고 나머지는 복제품 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재질과 더불어, 칼을 제련할 때 연철과 강철을 꼬아 접어 두드리는, 페턴웰디드 접쇠 기법을 쓰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주조한 경우 검신에 물결 무늬가 드러나고 각 철강의 장단점들이 서로 보완되어 강도가 월등한 물건이 나온다. [29]
유튜브에서 "Secrets of the Viking Sword" 라고 검색하면 Ulfberht 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다.

6. 바이킹의 항해


[image]
바이킹의 배 (Knarr)
바이킹의 배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탐험, 무역, 전투 등의 다목적 선박인 랑스킵(Langskip)[30][31]와 무역, 수송 및 대서양 항해에 특화된 크나르(Knarr)가 있었다(크노르 Knorr 또는 Knörr 라고도 함). 랑스킵의 경우, 재질이 가볍고 선체가 안정적이어서 기동성이 당대의 다른 배들보다 우월했고, 노를 저어 강을 역류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현대의 고무보트처럼 전사들이 들고 이동하기도 했다. 바이킹은 유럽을 약탈할 때에도 수로를 많이 이용했는데, 노르드인들은 이러한 뛰어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전술을 구사해 당시의 다른 민족(게르만 계통의 고트족, 프랑크족부터 켈트족에 이르기까지)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크나르는 수송이 주목적이어서 롱쉽과 비교하여 더 짧으면서 넓고 더 깊게 지어졌다.(길쭉한 롱쉽과 달리 비교적 둥글둥글하게 지어졌다는 얘기다.) 최대 24톤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한다.
랑스킵의 종류는 크게 3가지인데, 평시에는 낚시배, 무역선으로 사용하다가 전시에 동원되는 카르베(karvi), 소형 전투선 스네크야, 대형 전투선이자 수송선 스케이드가 있다. 바이킹 전설에서 유명한 용머리 배 드라카르는 스케이드에 장식이 달린 배를 의미한다. 카르베는 13열의 노열을 가지고 있고, 26명의 노잡이, 1명의 콕스(선장)이 탑승했다. 짐을 싣기 위한 배였기 때문에 다른 배에 비하면 통통한 편[32]이었고 길이는 23m였다. 스네크야는 가장 작은 전투선으로 카르베보다 짧은 17m였지만, 노열은 20열로, 총 41명의 전사가 탈 수 있는 엄연한 전투선이었다. 가장 큰 전투선이자 수송선이었던 스케이드는 30~40m의 배길이와 30열의 노열을 가졌고 전사가 추가로 승선했던 걸로 보인다.
랑스킵의 속도에 대한 입증된 기록으로는 1893년에 바이킹 선을 재현해 대서양을 횡단한 사례가 있다.[33] 이 항해는 28일 만에 성공했는데 이는 하루에 평균 185km를 이동한 것이다. 유럽을 공격했을 때 몽골군의 이동속도가 3일에 280km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경악할 만한 수준이다.[34]
랑스킵은 수위가 낮은 강에서도 사용될 수 있었으며, 반대로 대양을 건너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빈란드 사가[35]에 기록된 전설적인 붉은 에리크(Erik the red)가 신대륙을 발견해낸 항해에서 사용했던 배도 이 종류의 배다. 군사적 목적 이외에도 무역, 이주 목적의 항해에도 사용된, 바이킹의 상징과도 같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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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 빈란드 사가에서 묘사된 롱쉽의 모습.
유명한 바이킹 배로는 노르웨이 오세베르그에서 발견된 잘 보존된 바이킹 배로 '오세베르그 배'라고 불린다. 무덤 근처에서 발견되었고, 젊은 여성과 나이 든 여성 두 명의 유골도 있으며[36], 사치스러운 부장품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의식용으로 만든 배라는 게 정설이다. 결정적인 증거로는 배에 있는 장식 등은 너무나 정교하게 만든 반면 실용성은 별로라고 한다. 항해보다는 아마 해안에서 열리는 의식에 활용된 배라고 보고 있다.
당시에는 나침반이 없었기에 일장석(Sunstone)이 비춰주는 일정한 빛을 따라 향해를 했다는 역사가들의 추측이 존재한다.

7. 매체


만화빈란드 사가》에서 바로 바이킹과 북미대륙 개척에 대해서 다루는 내용이기도 하다.
영화 패스파인더는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 키워진 바이킹 소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바이킹들은 무슨 모르도르의 오크 군단 같은(...) 악의 야만족 무리로 나온다.
레드 제플린의 노래 Immigrant Song은 바이킹에 관한 노래다. 가사에서도 신의 망치, 발할라 등의 명사가 나온다.[37] 레드 제플린 말고도 다른 헤비메탈 장르의 노래에 많이 등장한다.
캐나다 드라마 바이킹스는 바이킹의 유럽 진출을 전설적인 바이킹 왕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2020년 현재 시즌 6까지 방영
영국 드라마 라스트 킹덤은 바이킹에게 호되게 당하는 앵글로색슨의 영웅 우트레드 베밴버그와 웨식스알프레드 대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쌔신 크리드: 발할라는 바이킹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8. 유명한 바이킹들




9. 바이킹계열의 유명한 후손들



10. 미디어의 바이킹들, 혹은 모티브로 한 것들


볼드체는 바이킹이 주역인 작품들


11. 같이 보기



[1] 북쪽의 기준은 그들이 활동하던 구 로마의 영역, 현재의 동/서 유럽을 기준으로 한다. 이 당시 유럽의 기준에선 북프랑스와 독일도 북쪽에 포함된다.[2] 다만 고대 로마와 약간의 교류는 했다.[3] 또한 이 시기에 단기적 기후 냉각 즉, 일종의 짧은 소빙기가 있었으리라고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4] 영어로 'Dane'은 '덴마크의, 덴마크식의' 라는 의미를 내포한다.[5] 러시아 북부 일대에서 볼가 강을 따라 쭉 내려와 카스피해로 나온 후, 페르시아 해안을 약탈한 것.[6] 이 지역을 '데인로'(Danelaw)로 부른다.[7] 대 그리스, 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도 불리는 지역이다.[8] 이 사건은 온갖 야만인들의 침공으로 서로마가 증발하면서 터진 헬게이트를 로마 교회가 뼈저리는 노력을 들여 야만인을 개종시키는 것으로 버틴 서방 교회에 대한 동방 교회의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쌓이고 쌓인 악감정을 뻥 터트리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로마가 랑고바르드족에 의해 함락될 뻔했다.(...) 결국 동서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고 만다.[9] 알렉시오스는 확실히 서방 세계를 잘 써먹어서 위기에 처한 동로마를 부흥시키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동로마는 서방 세계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했다.[10]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들에게 우유를 선물로 받았다가 유당불내증으로 인해 소화불량에 걸린 원주민들이 우유를 독으로 오해해 적대적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지금 이에 대해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11] 같은 그리스도교 신자, 정확히는 같은 종파에 속한 그리스도교인들을 노예로 부려먹을 수는 없으니까.[12] 다만 서유럽에서 로마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기독교로 개종한 아일랜드에서는 서기 12세기까지도 노예 제도가 엄연히 존재했다. 출처: 바다의 늑대/ 라스 브라운워스 저/ 김홍옥 역/ 에코리브르/ 2018년 7월[13] http://www.babbel.com/magazine/139-norse-words[14] 영어의 요일명, 즉, 티르의 화요일, 오딘의 수요일, 토르의 목요일, 프레이야의 금요일이다. 사실상 바이킹들이 언어로 남겨놓은 유산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바이킹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영국에 발을 디딘 앵글로색슨족도 처음에는 바이킹이 믿던 오딘, 토르를 주신으로 하는 북유럽 다신교를 믿고 있었으니, 이들이 만든 이름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유래가 바이킹인지 앵글로색슨인지는 불분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15] 참고로 영국(데인로. 채널 제도), 아일랜드, 프랑스(노르망디), 러시아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그대로 그곳의 주민들과 동화되어 언어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도 잃어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마디로 말해서 중세 초기 전 유럽에 정치적인 파장을 불러온 바이킹은 문화적으로는 그다지 유산을 남기지 못했며, 거의 수백 년간 그 존재가 "야만인'의 대명사였을 정도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의 역사와 생활사를 문자화시켜 남긴 것은 거의 없이 구두로 전승되었고, 그들에 대한 기록은 침략당한 쪽의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지다 보니 악명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16] 이런 고정관념은 중세 이후에 고착화되었는데, 추정키로는 바이킹을 악마와 동일시한 유럽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뿔 장식은 11세기 때 그레이트 헬름의 장식물로 널리 쓰이긴 했다.[17] 폴 조르주 상소네티, '성배와 연금술', 2005, 문학동네 교양선, 106P[18] 위의 책, 106P[19] 재료는 마로니에 열매의 속살. 이것을 으깨서 물을 섞어 반죽을 하고, 다시 물기를 짜내서 쓰기 좋은 모양으로 빚어낸 후에 햇빛에 건조시켜 만들었다고 한다.[20] 실제로 노르웨이에서는 사우나 시설을 'badstue'라고 부른다. 이미 자기네들에게 익숙했던 관습이라고 본 것.[21] 이렇게 하면 귀X컷(...)이나 투블럭과 비슷해진다.[22] 이는 먼 훗날인 20세기에 딱 노르웨이 혈통의 탐험가인 로알 아문센이 재현하기도 했다.[23] shield maiden, 노르드어로는 skjaldmær(스캴드메르)[24] 이 점은 스파르타와도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 군사원정을 위해 남성들이 대규모로 동원되고 가장의 부재 중 여성이 육체노동의 상당량을 감당해야 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25] 바이킹족의 근원지였던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대만 하더라도 지역간의 관습이 달랐고, 또 그린란드나 러시아 등 해외로 이주해서 사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같은 바이킹들이라도 사는 곳마다 관습이 다른 경우가 더러 있었다,[26] 스칸디나비아에서 러시아로 이주해간 바이킹들이다.[27] 대체로 망자의 애첩이었을 것이다. 이 여성은 두 시종에게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바란다는 듯이 술을 마시고 노래 불렀다. 딱히 정절의 의무도 없어서 순장되기 전에 주인과 가까운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28] 대중매체로 알려진 뿔투구가 아닌 눈을 감싸는 모양의 고글헬멧[29] 물론 현대에서 접쇠 방법은 미학적 장점 이외에는 현대의 초강법을 능가하는 점이 없다.[30] 영어로 롱쉽(Longship)이다.[31] 이전에 기술되어 있던 드라카르(Drakkars)는 랑스킵 중 하나로 대형선인 스케이드에 용 혹은 뱀의 머리 장식을 단 배를 일컫는다.[32] 기존의 전투선이 세로가로비가 7:1이면, 카르베는 9:2였다.[33] 다만 이런 일이 바이킹의 배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며, 1978년 7월 27일 아일랜드의 역사가 팀 세버린은 자신이 직접 고대 아일랜드의 전통 배인 코라클(나무판자에 소가죽을 덮어씌운 배)을 만들어 타고서 실제로 아일랜드에서 미국까지 항해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바다의 짠 소금기가 소가죽에 닿으면 가죽이 오히려 더 딱딱해져서 물이 전혀 스며들지 않고 방수에 좋았다고 한다.링크[34] 단, 수로와 육로의 차이는 감안해야 할 점이다. 기원전부터 해로에 의한 이동거리가 육로에 의한 이동거리보다 훨씬 길었다. 사실 몽골군의 이동 속도도 전차와 항공기가 일상화된 20세기 이전의 전쟁에서는 경이적인 속도였다.[35] 동명의 만화는 같은 소재를 다룬 것이다.[36] 나이 든 여성은 높은 계급의 여성이라는 게 확실시 되나 낮은 계급의 여성은 불확실하다고 한다. 혈육은 아니나 비슷한 음식을 먹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나이 든 여성의 하녀를 순장처럼 같이 죽인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37] 가사를 봐서는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공을 배경으로 한다. [38] 작품의 배경인 가상의 왕국 아렌델은 19세기 노르웨이를 모티브로 하였고, 작중에 등장하는 교회 등 건물의 양식이 바이킹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대관식 등 제례에서 노르드어를 사용하는 등 문화적으로 바이킹 문화의 영향을 많이 보인다.[39]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이치로가 어렸을 적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해적 문화를 동경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40]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바이킹임을 강조하는 대사를 수도 없이 한다. 또한 바이킹 전통 장례식(배에 시신을 안치하고 바다에 띄운 뒤 불을 붙여 화장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등 바이킹의 문화도 곳곳에서 보여 준다. 다만 실제 바이킹의 생활상을 충실히 고증했다기보단 만화적으로 과장한 부분이 많아, 버크 섬 주민들의 상당수가 거칠고 호전적이며 야성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남자 성인들은 대부분 수염이 텁수룩하고, 생활 습관이 상당히 비위생적(...)인 등장인물도 있고... 상술했듯 바이킹들은 면도와 이발을 하고 원시적인 비누를 사용하는 등 위생에 신경을 많이 썼다.[41] 위의 로스트 바이킹의 패러디[42] 붉은 머리 에리크가 모티브다.[43] "바이킨(세균) + 바이킹 + King"의 말장난.[44] 로한 기마병(로히림)은 헤이스팅스 전투의 노르만 기병을 모티브로 하였다.[45] 건물 양식이 전형적인 북유럽 양식이다. 단 너른골은 호빗 실사 영화판에서는 동유럽풍의 건물 양식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