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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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Ρωμανός Α΄ Λακαπηνός, Rōmanos I Lakapēnos
라틴어 : Romanus I Lecapenus
생몰 : 870년 ~ 948년
재위 기간 : 920년 ~ 944년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제국의 해군 사령관이었다가 919년 3월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해 제국의 실권자로 부상하고 4월에 딸 헬레네를 콘스탄티노스 7세와 결혼시켜 바실레오파토르가 되었다. 그해 12월에 다시 부황제로 승격했고 정적들을 제거한 뒤 920년 공동 황제로 등극했으며 921년과 924년에 연이어 자신의 아들 3명을 황제로 등극시켰다. 이로서 제국은 로마노스, 콘스탄티노스 7세, 로마노스의 세 아들들의 다섯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다. 이후 외세의 침략을 제압하고 훌륭한 통치를 선보였지만 말년에 신앙에 깊이 빠져들다가 두 아들에게 폐위되어 수도원에 보내져 말년을 수도사로서 살았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이전
로마노스는 870년 경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르메니아 출신 농민으로 "망나니 테오필락토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테프리케에서 바실리오스 1세를 사라센에게 구해낸 공로로 황실 친위대의 일원이 되었다. 로마노스는 이런 아버지의 밑에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로마 해군에 입대 후 레온 6세 시기에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해 911년에는 해군 테마인 사모스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여 912년에 콘스탄티노스 7세의 모후가 되는 조이의 숙부 이메리오스(Ὶμέριος: Himerios)의 후임으로 해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917년, 조이 황태후는 불가리아에 대한 선제 공격을 하기로 결심했다. 케르손의 장군 요안니스 보가스는 황태후의 밀명을 받들어 한 때 시메온의 동맹 세력이었던 페체네그족을 매수하여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침공하게 했다. 제국의 함대는 페체네그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줄 것이며, 그동안 제국 육군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진군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대규모 협공에 걸려든 시메온은 강화를 제의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을 터였다. 로마노스는 이에 따라 다뉴브 강에 수송 함대를 이끌고 가서 페체네그 족을 싣고 강 건너편으로 수송해 그들이 불가리아를 침략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로마노스는 요안니스 보가스와 서로 자신의 권한이 우월하다며 심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군대 수송을 거부해버렸다. 이로 인해 페체네그족은 자신들을 수송할 제국 함대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회군해버렸다. 한편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육군은 수도를 떠나 흑해 연안을 따라 행군했다. 이들은 불가리아로 진입했다가 8월 20일 새벽에 앙키알로스 항구의 외곽에 진지를 차렸다. 시메온은 이들을 기습해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이날 원정군은 거의 전멸했고 레온 포카스를 비롯한 소수의 병사들만이 가까스로 수도로 귀환했다.
재앙의 소식이 수도로 전해지자,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를 공식 심문에 회부하여 실명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그의 친구들이 중재에 나서 준 덕분에, 로마노스는 간신히 처벌을 면했다. 이후 해군 기지로 돌아가 있던 로마노스는 콘스탄티노스 7세의 가정 교사인 테오도로스에게 수도로 와서 황제를 보호해달라는 서한을 받았다. 로마노스는 어린 황제를 보호하겠다고 선언하고 919년 3월 25일 함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군했다. 그는 부콜레온 궁으로 와서 해상 대문을 통해 황궁에 들어가 제국의 정권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한달 후인 919년 4월, 그는 자신의 딸 헬레네와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결혼식을 성 소피아 성당에서 치르고 그 자신은 바실레오파토르가 됨으로써 황제의 후견인이 되었다.
조이 황태후의 최측근이었던 레온 포카스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근거지인 아나톨리아 테마로 가서 크리소폴리스에서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제위를 찬탈하려는 바실레오파토르의 손아귀에서 어린 황제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에 로마노스는 사제와 창녀를 비밀 첩자로 활용하여 황제의 위조 서명이 있는 문서를 널리 퍼트리게 했다. 그 내용은 콘스탄티노스가 장인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며, 레온 포카스는 반역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제는 곧 체포되었으나 창녀는 임무를 잘 완수해 레오의 병사 수백명이 무기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레온은 거사가 실패했다는 걸 깨닫고 도망치려 했다가 비티니아의 어느 마을에서 붙잡혀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인 채 콘스탄티노플로 끌려왔다. 반역자로 몰락한 가련한 레온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노새를 타고 광장을 돌았다.
920년 여름, 로마노스는 니콜라오스 총대주교의 협조하에 수도에서 정식 종교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결혼에 관한 최종적으로 수정된 교회법이 포함된 '토무스 우니오니스(Tomus Unionis)'가 발표되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재혼은 완전히 합법적이고 삼혼도 나이 마흔 살 미만의 아이 없는 홀아비의 경우 회개하는 조건 하에 허락되지만 사혼은 어떤 상황에서도 금지되며 사혼을 한 사람은 그 배우자와 영구히 결별할 때까지 파문에 처하는 형벌을 받는다. 이 법은 소급 적용되지 않았지만 선대 황제인 레온 6세의 삼혼과 사혼은 훨씬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았고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7세의 위상은 훼손되었다.
한달 후, 조이 황태후는 로마노스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삭발당하고 성 유페미아 수녀원에 유폐되었다. 그리고 로마노스를 초청했던 테오도로스도 동생 시메온과 함께 체포되어 아나톨리아 북서부로 유배되었다. 이제 소황제의 아군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15번째 생일 며칠 뒤에 로마노스를 부제로 임명했고 석달 뒤인 920년 12월 17일에 로마노스의 머리에 제관을 씌워줬다. 이로서 로마노스 레카피노스는 로마노스 1세로서 로마 제국의 제위에 등극했다.
2.2. 황제 로마노스 1세
2.2.1. 외치
2.2.1.1. 서방 - 북방 관계
황제로 즉위한 로마노스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불가리아의 국왕 시메온이었다. 시메온은 스스로를 차르로 칭하고 있었으며 이전부터 콘스탄티노스 7세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으로서 로마 황제로서의 제위 계승권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로마노스가 이를 차지하는 바람에 제위에서 멀어지자, 그는 로마노스와 갈등을 빚었다. 로마노스는 즉위 초부터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시메온과 우호 관계를 회복하려 했지만 시메온은 로마노스가 퇴위하지 않으면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나왔다.
919년, 시메온은 헬레스폰트까지 진군해 제국을 압박했고 921년에는 카사시르타이까지 전진했다. 또 922년에는 보스포러스의 유럽 쪽 해안까지 진군해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황금뿔만 건너편의 스테논(Stenon) 일대를 약탈했고, 로마노스가 아끼던 페게(Pegai)의 궁전들을 불태워 버렸다. 923년에는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한 뒤 끝까지 저항하다가 붙잡힌 모롤레온 총독을 고문 후 처형했다. 하지만 그는 육로 방면으로는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할 수 없었다. 이에 시메온은 924년 파티마 왕조와 협상하여 함대를 지원받고 해상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 했다. 그러나 아랍 대표들을 데리고 귀국하던 불가리아 사절들은 공해상에서 로마 제국 함대에게 사로잡혀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다. 로마노스는 불가리아 사절을 억류하고 아랍인들에게는 선물을 안겨주면서 칼리프에게 화친의 의사를 전하고 시메온이 주겠다는 선물보다 더 많은 공물을 매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로 인해 파티마 왕조는 시메온을 돕지 않기로 했다.
시메온은 일이 틀어지자 로마노스와 평화 협상을 갖기로 했다. 924년 9월 9일, 로마노스는 친히 협상 자리에 나와서 시메온과 대면했다. 그는 이어진 회의에서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평화를 구걸하기보다는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선한 본성에 호소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생각을 바꾸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또한 그는 연례 공물을 늘리겠다고 제안하면서도 그 제안을 설교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자신이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자애로운 후원자가 선뜻 도와주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당대 문헌에 따르면, 그 순간 독수리 두 마리가 하늘 높이 날아 함께 선회하더니 서로 떨어져서 한 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망루 위로 급강하하고 다른 한 마리는 서쪽의 트라키아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불가리아와 로마 제국은 하나로 뭉칠 수 없다는 신의 계시라고 여겼다고 한다.
평화 협상 결과, 제국은 매년 최고급의 공물을 불가리아에게 보내주는 대신 시메온은 제국의 영토에서 철수하고 그동안 점령한 흑해 연안의 요새들을 반환하기로 했다. 그리고 3년 후, 시메온이 사망하고 페타르 1세가 즉위했다. 페타르 1세는 재차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이에 로마노스 1세는 결혼 동맹을 제안하는 한편 세르비아와의 동맹을 추진해 불가리아를 견제하려 했다. 927년 페타르 1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노스의 손녀 마리아와 결혼해 불가리아와의 대립을 마무리했다. 불가리아 제국 황제가 불가리아 인과 로마 인의 황제를 자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쟁의 소지가 남아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협상을 통해 일단 불가리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는 현상 유지하는 형태의 40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교황과의 대립을 일단 해소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그 외에도 루스, 마자르 등과도 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혼인 동맹을 통해 분쟁을 줄이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일단 양면 전선 중 한 전선 만이라도 갈등을 줄이려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2.2.1.2. 무슬림과의 관계
불가리아나 서유럽과의 관계는 주로 혼인 동맹으로 해결했지만 동방 전선에서 로마노스의 정책은 강경했다. 그는 오랜 친구인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동방에 파견했다. 요안니스는 우선 반란을 제압하고 926년에는 아바시니아에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해 934년 멜리티니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무슬림에게서 도시를 탈환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제국군이 동방에 집중해서 튀르크와 싸우는 동안 세력을 확장한 키예프 루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평화 조약이 체결되자 다시금 공세를 펼쳤다.
943년, 동로마 제국군은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에데사를 포위하고 유명한 성유물, 성의포를[1]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일련의 공세가 당장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11세기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공세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2.2.2. 내치
로마노스는 소규모 자영농에 바탕을 둔 민병대를 오래전부터 토지 겸병을 하고 있는 부유한 귀족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련의 법을 공표했다. 또한 그는 귀족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인상해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그는 제국 곳곳에서 발생한 폭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했고 928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역사상 가장 길고 추운 겨울이 찾아오자 솔선수범하여 비상 식량 공급 체계에 따랐고 빈민들을 추위로부터 구하기 위해 일련의 비상 조치를 실시했다.
2.3. 말년
로마노스는 당초 자신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아 자신의 가문이 장기적으로 집권하길 희망했다. 그는 921년과 924년에 연이어 자기 아들들을 공동 황제로 올렸고 927년에는 장자 흐리스토포로스를 서열 2위로 올리고 콘스탄티노스 7세를 서열 3위로 밀어냈다. 장자 흐리스토포로스는 명군이 될 만한 자질과 인성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931년 사망했다. 사랑과 신뢰를 베풀었던 아들이 일찍 죽자, 로마노스는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이 제위를 찬탈하면서 많은 이들을 숙청한 대가를 치렀다고 여겼다. 그는 이때부터 신앙에 깊이 빠져버렸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의 영혼을 구원받고 싶어했다.
말년의 로마노스는 신앙에 너무 매몰되어 무리수를 연달아 뒀다. 심지어 정교회 신앙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을 모두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유대인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하자르족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편, 그는 남은 두 아들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가 부도덕하고 방탕해 황제감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사위 콘스탄티노스가 그의 아들들보다 선임 황제임을 분명히 못박는 내용의 유언장을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유언장을 공개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는 즉각 행동에 나섰다. 944년 12월 20일, 두 형제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황궁으로 들이닥쳐 병상에 누워있던 황제를 끌어내 부콜레온궁 옆의 작은 항구로 끌고 갔다. 로마노스는 작은 배에 태워져 프란키포 섬에서 가장 가까운 프로티의 수도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삭발을 당하고 수도 서원을 해야 했다.
945년 1월 27일, 콘스탄티노스 7세는 로마노스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엘레니 황후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를 긴급 체포해 삭발한 후 로마노스가 있는 프로티로 추방했다.당시 크레모나의 주교이자 파비아의 사절로서 동로마 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리우트프란트는 로마노스가 두 아들들을 맞이하는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후 스페타노스와 콘스탄티노스는 각각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가 사망했다. 그 중 콘스탄티노스는 간수를 살해하고 탈출을 기도했다가 감옥 경비병들의 칼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로마노스는 공개적으로 고해와 회개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946년 예수 승천 축일에 유럽 각지에서 온 300명의 수도사들이 "키리에 엘레이손(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을 암송하는 가운데, 로마노스는 자신의 죄목을 하나하나 거명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는 제대 앞에서 젋은 견습 수도사들이 가하는 매질을 받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죄목을 적은 책자는 비티니아 올림푸스 산의 수도원에 사는 수도사 데르모카이테스에게 보내졌다. 데르모카이테스는 2주간 금식한 후 하늘에서 기도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그 후 그는 죄목이 모두 지워진 책자를 로마노스에게 돌려보냈고, 로마노스는 그 책자를 자신의 무덤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아들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로마노스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수도원 문 밖에서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내 초라한 거처에 와주니 행복하다. 나를 궁에서 내몬 그 효심이 이제 너희를 궁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구나. 너희가 나를 미리 이곳으로 보낸 것이 얼마나 다행이더냐. 이곳의 동료 수도사들과 동료 병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루하루를 영적인 일로 보내고 있으니, 황궁의 예법에 익숙한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황제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도 모를 게다. 고트족의 눈보다도 차가운 너희를 위해 여기 물을 데워 놓았다. 부드러운 콩, 온갖 종류의 야채, 갓 뜯은 리크도 있다. 저 생선 장수들이 파는 맛난 것들 가운데는 질병을 일으키는 게 전혀 없다. 여기 우리가 가진 병은 주로 단식을 자주 한 탓에 생기는 거란다. 우리의 소박한 거처는 많은 사람이나 뚱뚱한 사람을 수용할 수 없지만, 이 늙은 아버지를 버리지 않고 찾아와 준 너희가 머물기에는 충분하지."
948년, 로마노스의 측근인 테오파네스 시종장과 아들 테오필락토스 총대주교는 로마노스를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그 음모는 실행되기 전에 탄로났고, 총대주교는 간신히 직위를 지켰지만 테오파네스는 유배되었다. 로마노스는 자신을 끝까지 따르던 사람들이 몰락하는 걸 지켜보고 급속히 기력이 약해졌고 결국 948년 6월 15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로 운구되어 미렐라이온 수도원에 있는 아내의 무덤 옆에 묻혔다.
포르피로옌니토스 콘스탄티노스 7세는 이로써 어릴적부터 이어져온 꼭두각시 놀음을 벗어나 39살에 진정한 황제가 되었다. 이 역사가이며 문필가인 황제는 자신의 장인이었던 로마노스 1세에게 무식하고 야만적이았다는 혹평을 남겼지만, 그의 정책 기조를 이어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로마노스 1세가 치세 중에 남긴 성과는 적지 않았다. 서방과 내부의 적들을 상대로 훌륭한 정치 -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서서히 우위를 점했다. 동방에서는 서방이 안정된 덕에 생겨난 여유를 쏟아부어 이슬람 세력을 오히려 몰아붙였고 요안니스 쿠르쿠아스는 그의 의지를 충실히 이행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에게는 대중에게 인기를 끄는 방법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했다.
[1] 토리노의 수의와는 다르고 예수의 얼굴을 감싸서 그 얼굴이 찍혔다고 전해지는 유물. 환자를 낫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한다.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함락 때 유실 되었다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