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예프 공국

 




'''루스국'''
'''Рѹ́сьскаѧ землѧ'''

''Rusĭskaję zeml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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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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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82년 ~ 1283년
위치
동유럽
수도
키예프
정치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벨리키 크냐즈(대공)
주요 대공
올레그(882~912)
볼로디미르 1세(980~1015)
야로슬라프 1세(1019~1054)
볼로디미르 2세 모노마흐(1112~1125)
언어
고대 동슬라브어, 교회 슬라브어,
고대 노르드어
종족
루스인(동슬라브인), 노르드인, 발트인, 발트핀인, 볼가핀인
종교
정교회, 슬라브 종교[2]
통화
흐리우냐
인구
서기 1000년 기준 540만여 명
성립 이전
루스 카간국
하자르 카간국
멸망 이후
노브고로드 공화국
블라디미르-수즈달
1. 개요
2. 역사
2.1. 초기
2.2. 중기
2.3. 전성기
2.4. 쇠퇴
3. 문화
4. 경제
5. 창작물

언어별 명칭
고대 동슬라브어
Рѹ́сьскаѧ землѧ[3] / Рѹ́сь
(Rusĭskaję zemlę / Rusĭ)
우크라이나어
Київська Русь
러시아어
Ки́евская Русь
벨라루스어
Кіеўская Русь
그리스어
Κράτος των Ρως
영어
Kievan Rus'

1. 개요


동슬라브 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이다. 창시자는 노브고로드 공국의 건국자인 류리크의 친족이자 후계자인 '''올레크''' 공으로 882년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옮기면서 형성되었으며, 슬라브족의 이동 이후, 분화된 슬라브족들 중 12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있던 동슬라브 부족들이 키예프 공국에게 정복되면서 통일이 이루어졌다. 루스족과 슬라브족의 두 뿌리를 가졌으며, 루스족 우위의 체제는 지금도 이 땅이 '''루스의 땅'''(Russia)으로 불리는 이유가 되었다. 또한 루스족이 슬라브족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노예무역도 성행했다.

2. 역사



2.1. 초기


원주민인 슬라브우랄계와 북유럽에서 이주해 온 바이킹계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류리크의 뒤를 이은 '''올레그'''는 키예프 인근의 여러 동슬라브족들을 공격해 영토를 빠르게 확장하였고, 동로마 제국에 직접 원정을 가기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이고리 류리코비치'''는 941~944년에 동로마 원정에 나섰으나, 945년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키예프 공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드레블랴네인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고리 류리코비치의 아들인 스뱌토슬라프는 너무 어렸기에 이고리의 아내인 '''올가''' 대공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드레블랴네인에게 응징을 가하여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스뱌토슬라프'''가 성장하여 965년부터 군사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볼가 불가르를 복속시켜 볼가 강 일대의 무역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하자르를 공격하여 수도 이틸을 함락시켰고, 발칸 반도의 강국 불가리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거의 점령하는 등 그 강력한 군사력을 입증했다. [4] 하지만 결국 스뱌토슬라프는 불가리아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유목 민족인 페체네그인에게 살해당했다. 그 뒤를 '''야로폴크 1세'''가 이었다. 당시 페네체그 병사들은 스뱌토슬라프의 두개골로 물을 마셨다 한다. 이런 키예프 공국 병사들의 활약상을 본 동로마 제국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5]

2.2. 중기


980년 '''볼로디미르 1세'''가 반란을 일으켜 야로폴크 1세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볼로디미르 1세는 국경지대의 발트족과 동슬라브족, 핀족 등을 정벌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 동로마 제국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누이 안나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고 이후 국교로 인정되었다.
이후 정교회는 현재까지 동슬라브인들의 명실상부한 전통 종교가 되었다. 키예프 상인들은 드네프르 강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과 교역했으며 볼가 강의 아틸[6]과 불가르[7]를 거점 삼아서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와 교역했다. 볼로디미르 1세의 사후에는 야로폴크 1세의 아들인 '''스뱌토폴크 1세'''가 대공위를 계승하였다. 스뱌토폴크 1세는 정교회가 아닌 가톨릭 신자인 데다가, 권력 유지를 위해 동생들을 살해해서 민심을 잃은 끝에 '''야로슬라프 1세'''의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2.3. 전성기


야로슬라프 1세가 재위하면서 영토가 확장되고 11세기 중반에 최전성기를 이른다. 야로슬라프 1세는 자신의 세 공주들을 각각 프랑스, 헝가리, 노르웨이 왕에게 시집을 보내고, 자신의 여동생들을 폴란드 국왕, 동로마 제국의 황자와 혼인을 시켰으며, 그 자신도 스웨덴 공주와 혼인을 맺는 등 적극적인 타 유럽 국가들과의 혼인 외교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한편 중세 유럽의 문화적 패권국인 동로마 제국과의 교류를 방해하는 페체네그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적극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남긴 상처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서유럽을 능가하는 문화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당시 키예프 공국의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는 예를 들자면, 야로슬라프 1세의 딸 중 '''프랑스''' 국왕 앙리 1세에게 시집 간 안나 야로슬라프나[8]가 1050년에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 중에 '아버지께서 저를 보낸 나라는 정말 야만적인 나라예요. 주택은 어두침침하고, 성당은 끔찍하고, 문화는 미개해요.'라는 내용이 있을 지경이다.[9] 외에도 《루스카야 프라우다》라는 동슬라브 최초의 법전을 편찬하는 등 키예프 공국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며 번창하게 된다.

2.4.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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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공국으로 분열된 키예프 공국
12세기 초반부터 지중해 무역로가 더 각광을 받으면서 흑해스칸디나비아를 잇는 무역로가 쇠퇴함에 따라서 키예프 공국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 잡혀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무역 쇠퇴는 국가 경제에 있어서 치명적이었다.
더욱이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대공위 계승 시스템이 갖춰졌다기 보다는 대공위 계승자들이 각 지방 도시를 다스리며 상황에 따라 서로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봉건적인 상태였기에, 국력을 단결시키기 어려웠다. 종종 볼로디미르 2세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서 쇠퇴기에 접어든 키예프 공국을 중흥시켰을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못했다.
하자르 칸국페체네그인을 주무르던 키예프 공국이었지만, 말기에 접어들면 유목민족인 쿠만, 즉 폴로베츠족과 볼가 불가르의 침략 앞에 끙끙대기 시작한다. 키예프 루스의 중심지였던 보리스테네스 강(드네프르 강) 일대 비옥한 흑토 평야는 전성기 시절에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평야 지대 특성상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넘나들던 유목제국의 기습과 침략에 매우 취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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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분열되어 있던 키예프 공국은 13세기 중반에 '''몽골 제국'''이 침공하면서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키예프 공국의 난민들은 북쪽에 척박한 삼림 지대로 대거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프랑스를 미개한 야만인 취급하였던 빛나는 문화도 쇠퇴하고[10] 몽골의 억압에 시달린 끝에 "땅만 넓고 야만적인 미개인들" 이미지가 정착되어 버렸다.
이후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이 '''타타르의 멍에'''에 시달리게 되었다.

3.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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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로 지은 교회 건축물들이 그 아름다움과 특유의 건축 형태로 유명했으나, 수명이 짧은 목조 건물 특성상 키예프 공국의 건축물 중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건물은 없다. 다만 역사 기록과 그림을 바탕으로 키예프 공국 시대의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들을 복원한 야외 박물관이 우크라이나 키예프리비우 등에 있으며,이 외에도 러시아황금의 고리 지역에 루스의 옛 흔적이 꽤 남아 있다.
사가 문학이 발전했으며, 《이고르 대공의 원정기》 같은 수준 높은 고전 서사시 작품도 쓰여졌다. 정교회 수도사들에 의해 쓰여진 '''《원초 연대기》'''는 류리크 왕조의 기원부터 1110년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으며, 슬라브족의 초기 역사, 분파, 습속에 관한 여러 가지 구전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1146년부터 1154년 사이에 일어난 공후 이쟈슬라프 2세의 키예프 대공위 계승 투쟁을 비롯한 이야기를 담은 《키예프 연대기》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문학사에서는 키예프 공국 시대의 문학 작품을 동슬라브족 문학의 시초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13세기 후반 갈리치아-볼히니아에서 키예프 공국 시절 연대기에 영감을 받아 《볼히니아 연대기》를 편찬하였다. 열왕기이사야서의 영향을 받은 《볼히니아 연대기》는 교회와 관련된 일보다 세속적이고 군사적인 일들에 관해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연결하는 무역을 통해서 동로마 문화 및 중동의 선진 문화를 적극 흡수하면서, 당대에는 서유럽보다 더 높은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식받은 동방 정교회이콘의 전통 또한 동슬라브족 문화를 특징 짓는 키예프 공국의 유산이다. 다만 정교회 신앙이 일반 주민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키예프 공국 내에서는 정교회 교리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제대로 설명해 줄 교육받은 성직자의 수가 부족했던 연유로 인해, '''키예프 루스 주민 대다수는 정교회슬라브 토속 신앙을 둘 다 믿는 이중신앙을 가지고 살았다.'''

4. 경제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 체르니고프(체르니히우), 키예프, 류베치, 프스코프, 폴로츠크, 비텝스크 같은 키예프 대공국의 주요 도시들은 대개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흑해를 잇는 수상 교통로에 건설되었다. '''특히 흑해와 가까운 키예프와 스칸디나비아와 가까운 노브고로드는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다.''' 서유럽 출신 여행자들은 키예프 루스에 많은 도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루스를 '''도시의 나라'''라고 칭했다. 상인들의 권리는 '스메르드'라고 불리는 자유민 농민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했는데, 상인을 살해할 경우에는 자유민 농민을 살해한 경우의 벌금보다 2배 이상 되는 액수를 지불해야 했다.
상인들의 권리가 높았던 이유는 이들이 키예프 루스의 전사 계급이기도 했으며, 대외 무역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기 때문이었다. 키예프 루스의 상인들은 동로마 제국, 중부 유럽, 스칸디나비아, 이슬람 칼리파조와 교역했다. 동로마 제국에는 밀랍, 꿀, 아마, 가죽, 대마, 귀금속, 무기, 갑옷을 주로 수출했으며 이슬람 칼리파조에는 주로 노예와 모피를 수출했다. 오늘날 스페인의 후우마이야 왕조의 노예 대부분은 키예프 공국에서 중부 유럽의 유대인 상인들을 통해 수출된 슬라브족 노예였다.
키예프 공국에서는 화폐를 거의 주조하지 않았는데, 이슬람 칼리파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유입된 화폐가 많았던데다가 자체적인 농업과 공업이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11세기 이후부터는 '''흐리우냐'''[11]라는 화폐 단위가 생기는데, 이것은 400그램 중량의 은괴였다. 흐리우냐를 절반으로 자른 것을 '''루블 흐리우냐''' 또는 줄여서 '''루블'''이라고 했다. 은괴에는 중량 표기와 함께 공작의 인장을 새겼다.

5. 창작물



[1] 1000년경의 강역.[2] 다만 블라디미르 대공이 동로마를 통해 받아들인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슬라브 신들을 표현한 신상들을 모두 강에 빠뜨려 철거하면서 슬라브 신화는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정교회와 전통신앙을 동시에 믿는 이중신앙생활을 했다.[3] 루스 공국이란 뜻이 아니라 루스인들의 땅이란 뜻이다. 당시에는 '키예프'나 '공국'이란 말은 나라 이름으로 쓰이지 않았다.[4] 유목 민족이었던 폴로베츠 인들의 어머니들은 그의 이름으로 겁을 주곤 했다. 나폴레옹 사례와 비슷하다.[5] 정확히는 밑에 나오는 볼로디미르 1세가 형 야로폴크와의 내전에서 루스인 용병들을 고용해 써먹었다가 내전이 끝나자, 할 일이 없어지고, 유지비도 많이 들게 되었다. 그때 마침 바실리오스 2세의 지원 요청이 들어오자 얼씨구나 하고 보낸 6,000명의 루스인 용병들이 시초다. 그리고 병사들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이들의 충성심을 높게 평가해서 고용을 한 것. 실제로 바랑인 친위대는 외지인이어서 오직 기댈 건 황제밖에 없었던 것도 이유가 되지만 이전까지의 로마 근위대와 달리 황제를 갈아치우는 짓을 하지 않아서 그 충성심을 입증하였다.[6] 오늘날의 아스트라한 근처[7] 오늘날 타타르스탄카잔 근교[8] Anna Yaroslavna. 키예프의 안나(Anna(Anne) of Kiev)라고도 불린다.[9] 서로마 붕괴 이후 서유럽이 제법 나라꼴을 갖추게 된 계기는 십자군 전쟁으로 콘스탄티노플과 중동의 선진 문물과 인재들이 대거 영입되면서이다. 그 이전에는...칼질 잘하는 야만인들?.[10] 키예프 공주이자 프랑스 왕비였던 안나의 편지에서 야만적이라고 개무시당했던 파리는 반대로 12세기쯤부터 전성기가 오기 시작한다. 입장이 반대가 된 셈.[11] 러시아어로는 그리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