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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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3년 2월 27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10월 유신 이후 유신헌법에 의해 치러졌으며 투표율은 72.9%를 기록했다. 146석의 지역구 선출은 '''중선거구제'''로, 73석의 유신정우회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임기가 '''6년'''으로 연장(유신정우회는 3년)되고, 의원정수는 '''219명'''이었다.
유신정우회는 조금 특이한 교섭단체였는데, '''사실상 대통령의 입법부 내 친위 세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세한 건 문서 참조.
2.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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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은 무소속 후보들에게 상당수 득표를 빼았겨 8대 총선에 비해 득표율이 10.1%나 떨어져서 38.7%에 그치는 참패나 다름없는 성적이기는 했지만 73석을 차지했고, 신민당도 민주통일당으로 지지기반이 이탈하여 득표율이 크게 하락한것은 마찬가지라 52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민주통일당은 공화당과 신민당에 대한 분노와 실망으로 상대적으로 표가 쏠리며 10.1%라는 준수한 득표율을 올렸지만 2인 중선거구제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석에 그쳤다. 그 대신 무소속 의원이 상당수 당선되어 19명에 이를렀다. 유신정우회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 방식으로 선출되었다. 이전 8대 총선(지역구 기준)과 비교해볼때 공화당은 89석에서 73석, 신민당은 65석에서 52석으로 내려앉고, 공화당 지지표가 무소속으로 신민당 지지표가 민주통일당으로 상당수 이탈함으로써 유권자들이 나름대로의 심판을 한셈이지만 유신정우회의 존재로 빛을 발하지 못한 선거인 셈이다.
이 선거때부터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이전까지 총선 1당의 득표율이 40%를 넘기지 못하게 된다.[1] 또한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이 40%에도 미달하면서 박정희에 대한 민심이반이 어느 정도로 벌어질 수 있는지 알수있는 대목이다.
2.1. 여담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에서 73개 선거구에 73명이 당선되어 민주공화당이 모든 선거구에서 당선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에는 한 선거구에 정당별로 두 명까지 공천할 수 있었고 민주공화당과 신민당 모두 선거구마다 1~2명씩 공천했다. 선거 결과 민주공화당은 서울6, 충남7, 전북3, 전북4 선거구에서 당선자가 없었고, 경기7, 충북2, 경북9, 경남3 선거구에선 한 선거구에 공천한 후보 두 명이 모두 당선되어 결국 당선자 수가 선거구 수와 같아졌다. 한편 신민당은 서울 8개 선거구에서 8명이 당선되었으나 모든 선거구에서 당선된 것이 아니고, 서울 5선거구에선 당선자가 없고[2] 서울6 선거구에 공천한 후보 두 명이 모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