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응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조응순은 1885년 12월 4일 함경남도 갑산군 회사면 도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뒤 1908년 안중근, 엄인섭 등과 함께 전제익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국내로 진공해 함북 경흥에서 일본군 정찰병 4명을 사살했다. 1909년에는 연해주 노브키예포스크(煙秋) 근교에서 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였다. 이후 연해주 일대의 70여 곳에서 학교 설립에 앞장섰고, 1910년 6월에는 국민회 수청신영지방회(水淸新英地方會)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 6월경 스찬(水淸)에서 합성학교 설립에 관여하고, 같은 달 노브키예포스크에서 이범윤·최재형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관해 협의하기도 했다. 1917년에는 재중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 대한 참간장(斬奸狀)을 제출하고 처단 실행자로 활동했다. 1918년 예카테린부르크에서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한 뒤 김알렉산드라와 협의하여 노동회(勞動會)로 변경했고, 1919년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을 결성한 후 부단장으로 국내로 진격해 일본 관헌을 공격했다.
1920년 12월 2일 치타(知多)에서 열린 극동공화국 영토 내 한인 사회주의 단체들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해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결성하고 중앙집행부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또한 극동국 한인부 기관지 <노농신보>의 편집부원이 되었다. 그는 1921년 1월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관할로 넘어온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의 조직 재편을 지도하였다.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열린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립 대회에 노령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1921년 9월 자유시 참변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토문에 서명하였고, 관련자를 직접 처벌하기 위해 중국 하얼빈에서 결성된 한국의용군 결사대에 참여해 대장으로 선임되어 동지를 규합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활동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1922년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스찬에서 야학교 교사를 맡았다는 기록을 끝으로 그의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조응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