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클린턴

 




George Clinton
1739년 7월 26일 ~ 1812년 4월 20일 (만 72세)
미국의 제4대 부통령이자 초대 뉴욕 주지사이다. 대통령은 토머스 제퍼슨제임스 매디슨.[1] 그리고 미국 부통령 중 최초로 임기 중 사망한 인물.
미국 독립전쟁 세대이며, 뉴욕 토박이로 뉴욕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뉴욕 주지사로 1777~1795, 1801~1804 총 20년 이상을 재임하며 뉴욕에서 정치적 기반을 굳혔다. 버몬트 연방 가입 반대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1789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 반연방주의 세력들이 클린턴을 부통령으로 밀어주려는 의견이 맞았는데도 꼴랑 3표를 받았다(...) 뉴욕이 선거인단 구성이 늦어진 피해를 톡톡히 본 셈. 1792년에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이번에는 토머스 제퍼슨을 제치고[2] 반연방주의에서 후보로 유력하게 밀어줬지만 3등으로 존 애덤스에게 직을 뺏겼다. 1796년 선거에는 에런 버를 지지했고, 이후 뉴욕 주지사로 돌아가 1804년까지 재임하며 대권 도전을 쉬었다.
1804년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에게 부통령이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걸 방지할 목적으로 최초로 부통령 러닝메이트 제도로 시행되었다. 당시 부통령 에런 버는 어차피 당시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하고 사이 안 좋았지만 그걸 차치하더라도 알렉산더 해밀턴을 결투로 죽이고 나서 진작에 나락행 마차를 탄 상황. 재선에 도전하는 제퍼슨은 새 부통령 후보로 클린턴을 선택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자기 재임 중에 이미 뉴욕 인사 문제에 대해서 상의를 많이 하는 사이였던 점, 뉴욕에서 클린턴의 인기를 바탕으로 선거에서 우위를 노려보려는 점, 그리고 당시 69세라 제퍼슨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점찍어둔 50대 초중반의 제임스 매디슨의 자리를 위협하지 못할 거라는 점 등이었다. 그렇게 당선되어 놓고 제퍼슨은 클린턴의 위상이 못 강해지게 은근히 견제하고 무시했다.
1808년 클린턴은 민주공화당 대통령 경선에 출마한다. 그러나 매디슨이 압도적 지지를 얻는 와중에 클린턴은 꼴랑 6표(...)를 받는 데 그친다. 그런데도 매디슨은 클린턴에게 부통령직을 제안했고, 당시 연방당도 대통령 후보직을 제안했으나, 클린턴은 경선 불복의 선례를 만들고 싶지 않아[3] 부통령직을 수락한다. 그리고 두 번째 부통령 재임 기간에 매디슨과 싸웠다(...) 이 기간에는 미합중국 제1은행의 재인가를 상원에서 결정할 때 타이브레이커로 거부표를 던지기도 했다.
임기 중이었던 1812년 4월 20일 심장마비로 72세로 생을 마쳤다. 워싱턴 DC에 묻혔다가 1908년 킹스턴으로 이장되었다.
[1] 부통령을 두 번 했는데 대통령이 서로 달랐던 사람은 클린턴과 존 C. 칼훈 이 두 명이다.[2] 어차피 대통령은 워싱턴에게 투표하는 게 확정인데, 부통령을 똑같은 버지니아 사람을 뽑을 수가 없어서 제퍼슨이 배제되었다.[3] 그리고 이 선례는 조지 클린턴의 조카 드위트 클린턴이 바로 다음 선거에서 처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