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매디슨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미합중국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 주니어
James Madison Jr.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51년 3월 16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버지니아 식민지 포트 콘웨이
'''사망'''
1836년 6월 28일 (향년 85세)
미국 버지니아 주 몬트펠리어
'''재임기간'''
제5대 국무장관
1801년 5월 2일 ~ 1809년 3월 3일
제4대 대통령
1809년 3월 4일 ~ 1817년 3월 4일
'''서명'''
[image]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제임스 매디슨 시니어
어머니 넬리 콘웨이 '''배우자''' 돌리 토드 매디슨 '''자녀''' 의붓아들 존 매디슨[8] '''학력'''
뉴저지 대학교 (정치철학 / B.A.)
'''종교'''
개신교 성공회[9]
'''신체'''
'''163cm'''[10], '''45kg'''[11]
'''정당'''
'''민주공화당''']]

1. 개요
2. 생애
2.1. 재임기
2.1.1. 미영전쟁
2.2. 퇴임 이후
3. 평가
4. 여담
5. 영부인, 돌리 매디슨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4대 대통령.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의 정치 인생을 간단히 설명하면 헌법미영전쟁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2. 생애


버지니아 주 출신이다. 1771년 뉴저지대(프린스턴대의 전신)를 졸업하고 법률을 공부했고 독립전쟁이 시작되던 1776년부터는 버지니아주 입법부에서 근무하면서 자신의 법률 지식을 바탕으로 버지니아주 헌법을 창안했다. 또한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이후인 1786년에 열린 아나폴리스 협회의 대표로 일했고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헌법협의회의 대표로 참가하여 연방헌법 제정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른바 삼권분립 제도를 미국에 창안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 그래서 붙은 별명이 '헌법의 아버지(Father of the Constitution)'.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와중에 대륙의회에서 미국 의회도서관 창립을 제안했다. 그래서 매디슨은 '도서관의 아버지(Father of Library)'라는 별명도 있다.
정치적으로는 연방정부의 필요성을 인식했지만 각 주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토머스 제퍼슨의 입장에 동조하여 민주-공화당을 창립한다. 제퍼슨과는 정치적 이념도 비슷했지만 개인적으로도 친밀한 사이였다고. 실제로 제퍼슨 정권에서 국무장관을 맡을 정도로 중용되었다.[1]
다만 그는 연방이 해체되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는데, 그럼에도 그가 한 "부당한 헌법은 연방법이라도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훗날 남북전쟁 직전 노예제를 옹호하던 남부가 연방을 탈퇴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정작 노예제를 반대했던 매디슨 입장에선 당황스러울듯.

2.1. 재임기


초선에 성공해 1809년 취임한 매디슨은 1812년 말, 미영전쟁 와중에 연방당의 뉴욕 주지사 데위트 클린턴(DeWitt Clinton)을 상대로 박빙의 승부(14만 대 13만 2천, 50.4% vs 47.6%, 128 대 89) 끝에 승리하며 재선에도 성공한다.[2][3] 이때 매디슨은 사망한 조지 클린턴 부통령을 대신해 존 랭던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지만, 존 랭던이 사퇴하므로서 엘브리지 게리가 민주공화당의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재임기 시절 그는 헌법의 확립에 힘썼고 제2미국은행을 허가했으며 관세법을 제정하여 수입상품에 부가하는 관세를 높이 책정했다. 임기 말년에는 연방의회가 운하, 도로건설을 통한 교통망 개량사업을 돕도록 하는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교통을 편리하게 해서 통상업무를 용이하게 하자는 의도였는데 이것을 거부한 이유는 헌법에 연방정부에 의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는 것이 근거였고, 이 문제는 주 차원의 문제이지 연방정부가 나설 일은 아니라는 판단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라고 한다. 과연 헌법의 아버지.

2.1.1. 미영전쟁


매디슨 재임 시기 가장 유명한 사건은 아무래도 미영전쟁일 것이다. 당시 유럽나폴레옹 전쟁으로 전란에 휩싸인 시기였는데, 이때 병력이 급했던 영국은 말이 통하는 미국 선박을 일단 나포, 선원들을 '''강제징집'''시키는 황당한 경우가 꽤 있었는데 당연히 이에 빡친 미국과 나몰라라 하는 영국의 행태가 미영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우선 메디슨 정권은 '매콘법안 2항'을 제정했는데, 이것은 영국이나 프랑스가 미국의 중립을 인정하고 미국 선원과 선박을 존중한다면 미국이 다른 교전국에 출항을 금지할 것이라는 명확 조건을 명시한 후 영국과 프랑스와의 통상을 재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허나 이 법안에 대해 프랑스는 미국의 중립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영국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이에 빡친 정부는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했고 의회에서도 "언제까지 영국한테 끌려가야 하느냐"는 여론이 강화되면서 매디슨 역시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 전쟁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미영전쟁 항목에 설명된 대로, 1814년 6월 전쟁이 시작되고 초기엔 미국이 영국령 캐나다에 우위를 점하기도 했지만 유럽에서 한숨 돌린 영국이 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하자 미군은 거의 발리다시피 했고 백악관과 의사당, 의회도서관이 모두 불타는 수모를 겪게 된다. 특히 워싱턴 D.C. 근교의 블래던스버그 전투에서 미군은 영국군에게 거의 박살이 나다시피 했는데 메디슨은 이 대패를 현장에서 직접 목격했고, 본인도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래도 구사일생으로 이후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을 개시하여 영국군에게 타격을 입혔고, 영국도 나폴레옹 전쟁으로 지쳐 있던 터에 지리멸렬하는 전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아 미국에 협상을 요청했고 매디슨 정부도 이를 받아들여 벨기에의 겐트에서 종전협상을 맺었다. 그런데 이 협상 타결이 된 며칠 후인 1815년 1월 8일, 뉴올리언스에서 이 전쟁 최대의 격전이자 미군 최대의 승전이라 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는데, 당시 통신 사정이 나빠 협상 소식이 늦게 전해진 이곳에서 앤드루 잭슨이 지휘하는 미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영국군은 285명의 전사자를 본 데 비해 미군은 단 21명이 전사하는 대승을 거둔다.
이런 막바지 승리로 자존심도 챙기며 영국군까지 철수하자 미국 국민들의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고 매디슨의 재임기 이후 미국인들의 민족주의는 크게 고취되었다.[4] 그리고 이때 매디슨은 전시에 나라를 이끈 대통령 중에서는 '''헌법을 위반하지 않은 대통령''' 중 한명이 되었다. 가령 링컨은 남북전쟁 도중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자금을 쓰거나 계엄령을 선포했고, 루스벨트도 전쟁 중 적국이었던 일본, 독일, 이태리계 미국인들에 대한 강제수용을 명령한 적이 있었다. 이에 비해 매디슨은 전시 지도자 치고 '헌법'은 어기지 않고 잘 준수한 편.

2.2. 퇴임 이후


[image]
1833년 83세인 제임스 매디슨
국정을 잘 운영하다가 후임 제임스 먼로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준 이후로 매디슨은 버지니아 주 몬트필리어에 있는 자신의 대농장을 운영하며 살았다. 그런데 농장에 심은 담배와 밀이 흉작이 되어 말년엔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고...
이후 버지니아 대학의 총장을 역임했으며 나라의 원로로서 의회 일에 참가하거나 먼로에게 조언을 하는 등 1836년 85세로 사망할 때까지 나름 바쁘게 지냈다. 특히 1832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의회가 연방의 관세법에 반대해서 연방 탈퇴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주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그였지만 이때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강력히 항의하기도 했다.

3. 평가


헌법을 창안해 미국이라는 나라가 골격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한 공적이 인정되어 오늘날에도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만 미국의 매디슨 비판론자들에겐 법 같은 분야에서의 업적이야 인정하지만, 아무리 어거지를 부렸어도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에 준비없이 무턱대고 전쟁을 선포한 점은 비판받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이겼으니 평가도 받는거지 해안을 봉쇄당하고 수도인 워싱턴이 함락, 국회의사당 같은 주요 정부 건물들까지 불탈 당시만 해도 진짜 미국은 멸망할 뻔 했고, 만약 진짜로 멸망했다면 매디슨은 오늘날 미 건국의 아버지가 아니라 망국의 아버지 쯤으로 평가받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5]
사상적으로는 친우였던 토머스 제퍼슨과 비슷하게 제법 진보적인 면을 드러냈다. 본인은 농장주이기는 했지만 노예제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이었고, 여성에 대한 시각도 당시로서는 대단히 진보적이었다. "여성들의 능력이 불신되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의 능력은 과거 천재적 여성들의 과학적이고 훌륭한 업적들에 의해 증명되어 왔다"라는 식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의 발언 치고는 대단히 획기적인 발언. 그래서인지 매디슨의 영부인 돌리 여사도 오늘날 평가받고 있는데 후술 내용 참조.
헌법의 아버지란 별칭답게 법률과 관련한 많은 저서를 남겼고 특히 『연방주의자 논설집(The Federalist Paper)』에서 정치학자, 법률학자로서 헌법에 대한 견해를 밝힌 글은 지금도 정치학에서 고전으로 대우받는다. 어떻게 파벌의 해악을 방지하는 정치제도를 설계할 것인가를 논한 부분이 가장 유명한데, 매디슨은 "파벌의 해악을 막기 위해서는 파벌을 없애야 한다"는 일반적인 생각에 대비되는, '''"파벌 자체를 없애는 건 불가능하므로 수많은 파벌에 열린 제도를 만들어 파벌끼리 서로 견제토록 해야한다"'''는 참신한 논리를 선보였고 이러한 논리는 지금도 "매디슨적 민주주의(Madisonian democracy)" 이론으로 불리며 민주주의의 전형적 모델 중 하나로 회자된다. 은퇴 후에 집필한 <1787년 연방회의에 대한 주석> 역시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4. 여담


신장이 163cm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최단신'''이다.[6] 심지어 영부인인 돌리 매디슨(170cm)보다도 작았다고 한다. 또 체중도 45kg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적은''' 몸무게였다고 알려져있다.
실제 신체적으로는 병약한 편이라서 대통령 취임식에서도 피로감이 역력했을 정도였고, 대통령 재임 중에도 자리보전을 자주 했다고 한다. 말년에도 매디슨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친구가 문병을 왔는데 매디슨은 기력을 쥐어짜서 뭔가 말하려고 했다. 친구가 이를 보고 "골골한 친구가 그냥 조용히 있지 뭘 말 하려고 그래?"라고 묻자 매디슨은 "나는 항상 누워 있을 때 편하게 말한다고."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하지만 이런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85세까지 '''장수'''했다. 실제 미 건국의 아버지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죽은 인물이다. 그리고 매디슨을 마지막으로 이들은 일종의 미국 건국 전설 및 이념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미국 정치 및 사회에서 인용 등으로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헌법을 준수한 것에서 보이듯이 상당히 원리원칙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다만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인 성품 때문에 정적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매디슨 정부의 부통령 2명이 모두 재직 중 사망했다는 진기록도 가지고 있다. 부통령 1명이 사망한 경우는 간간이 있었지만 이런 경우는 매디슨이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위스콘신 주의 주도인 매디슨은 바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매우 좋아했다. 아이스크림 외에도 다른 냉동 식품들도 좋아하며 즐겨 먹었다고 한다.

5. 영부인, 돌리 매디슨


[image]
영부인 시절
[image]
워싱턴 초상화를 챙기는 돌리 매디슨
Dolley Madison(1768~1849).
영부인도 미국에서 유명하다. 돌리는 미영전쟁 당시 미군이 블래던스버그에서 대패한 후 몸소 백악관에 있던 많은 공문서와 서적, 그리고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까지 일일이 챙겨서 영국군이 도착하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왔다고 한다. 하마터면 미국 건국 초기의 중요한 자료들이 없어질 뻔했지만 돌리 덕택에 모두 보존될 수 있었다고.[7] 원래부터 남편의 내성적인 면을 보완하는 사교적이고 밝은 영부인으로 인기가 많았지만, 이 행동으로 영웅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엘리너 루스벨트와 함께 역대 최고의 영부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1] 미국 최초의 위헌법률심판이라는 Mabury v. Madison 재판이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이다. 피소된 연방정부의 대표자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매디슨이었기 때문의 그의 이름이 들어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존 마셜 항목 참조.[2] D. 클린턴의 경우 원래 민주공화당 소속이었는데 경선에서 지고 연방당으로 가서 후보가 되었다. 문제는 이런 전례가 이후 일부 후보의 독자출마로 이어진다.[3] 참고로 이 선거의 패배 이후 연방당은 다시 재기하지 못하고 사실상 소멸 단계를 걷게 된다. 특히 미영전쟁 시기 연방당이 내세웠던 친영 기류의 반전주의는 전쟁의 극적인 승리 이후 거의 반역(...) 비슷하게 몰리게 된다.[4] 미국 국가성조기가 작사된 것도 미영전쟁 중이었다.[5] 물론 당시 정부 체제에선 워싱턴만 망하고 다른 주들은 각자도생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6] 참고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68cm)보다 작다. [7] 다만 돌리가 챙긴 건 귀금속류였고, 초상화를 챙긴 건 다른 직원이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