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런 버

 




'''미합중국 제3대 부통령
에런 버 주니어
Aaron Burr Jr.
'''
<colbgcolor=#ececec><colcolor=#0d1635> '''출생'''
1756년 2월 6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뉴저지식민지 뉴어크
'''사망'''
1836년 9월 14일 (80세)
미국 뉴욕 주 스태튼 아일랜드
'''재임기간'''
제3대 부통령
1801년 3월 4일 ~ 1805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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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ececec><colcolor=#0D1635> '''부모''' 아버지 에런 버 시니어
어머니 에스더 에드워즈 버 '''배우자''' Theodosia Bartow Prevost '''자녀''' 딸 테오도시아 버
아들 존 피에르 버 포함 7명 '''친인척''' 사촌동생 테오도르 버 '''학력'''
프린스턴 대학교 (BA)
'''신장'''
168cm
'''정당'''
'''민주공화당''']]

1. 개요
2. 생애
2.1. 독립전쟁
2.3. 결투와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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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3대 부통령, 그리고 미국 독립 전쟁의 전쟁영웅이기도 하다.
당시 건국의 아버지들이 한창이던 나이에 부통령까지 올라갈 정도면 뭔가 공적이 있어야 했는데 버는 '''전쟁영웅'''이라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활동한 시기의 인물들 사이에서 꽤나 인정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부통령 된 이후의 행적으로 이미지를 말아 먹었다.(...) 다만 건국의 아버지들 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영웅은 맞지만 직접 대륙 회의 연합규약, 미국 독립선언서, 연합규약, 미국 헌법 등의 문서 작성에 참여,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건국의 아버지가 아닌 미국 독립전쟁 세대로 분류된다.

2. 생애



2.1. 독립전쟁


아론 버는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베네딕트 아놀드의 참모로 복무했다. 버는 전선 시찰을 하는 관측장교로 복무했는데, 정확한 관측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유력자 및 농민들을 찾아가서 재빨리 친구로 만드는 친화력이 있었다. 버가 가져온 정보들로 아놀드는 전쟁 초기 대영제국의 육군을 여러차례 괴롭혔다. 그러다가 퀘벡 전투를 하기 직전에 아놀드는 버를 리처드 몽고메리한테 보낸다. 당연히 버는 몽고메리 휘하로 참전했는데, 퀘벡 전투에서는 13개 식민지군이 영국군한테 대참패를 했다. 거기서 버는 리처드 몽고메리의 사체를 들쳐업고, 부상을 당했던 아놀드까지 부축하여 미군 진지로 복귀했다. 그 후 몽고메리의 사체를 매장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버는 미국 독립 직후에 무공훈장을 받았고 이런 전쟁영웅 칭호는 정치인이 된 '''버의 강력한 정치적 무기'''가 된다.

2.2. 미국 부통령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73표를 받으며 부통령에 당선된다. 제퍼슨과 같이 민주공화당 소속이었다. 그러나 각 주의 자치권을 강조한 제퍼슨과 달리 에런 버는 연방정부가 각 주의 자치권을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연방당과 어느정도 맥락이 닿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연방과 주의 관계 외에 노예 정책 등은 민주공화당의 정책 노선을 그대로 따랐기에 연방당과 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이 과정이 조금 험난했는데, 제퍼슨과 버 모두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801년에 하원 투표에서 대통령이 결정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퍼슨과 아론 버 모두 선거인단 득표로는 73표씩을 받았다. 당시 상대당인 연방당은 선거인단으로 존 애덤스 65표, 찰스 핀크니 64표를 받아 대통령후보와 부통령후보의 득표를 조절했다. 그러나 토머스 제퍼슨과 아론 버는 둘 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최대 선거인단을 자랑하던 뉴욕 주의 주의회 투표[1]에서 아론 버가 제퍼슨을 '''이겼다'''. 뉴욕 주민 직선에서는 제퍼슨이 버를 이겼는데 50%가 적용되는 주의회 투표에서 버가 이기면서, 합산 투표결과 뉴욕 주 12명의 선거인단이 승자독식으로 버를 찍게 된다. 때문에 제퍼슨과 버의 선거인단 득표는 73표로 동일해졌고, 민주공화당이 146표를 받았고 연방당이 129표에 그쳤으므로 대통령 선거 승리는 민주공화당이 한 게 맞다. 문제는 '''민주공화당 안에서 선거인단 득표로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인을 결판내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미국 하원으로 대통령 - 부통령 당선인을 정하기 위해 민주공화당의 토머스 제퍼슨과 아론 버를 두고 결선투표를 치르게 된다. 뉴욕 주의 당시 대통령 선거 제도때문에 엄청난 후폭풍이 생긴 것이다. 뉴욕 주가 주민 직선제로 선거인단을 뽑았으면 '''토마스 제퍼슨 85표 - 존 애덤스 65표 - 찰스 핀크니 64표 - 아론 버 61표'''로 '''제퍼슨과 애덤스가 17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리버스 매치(...)'''라는 결과[2]가 나왔을 것이다. 이후 미국 연방 수정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 부통령 러닝메이트 제도가 시행되자, 뉴욕 주에서도 이 사건의 후폭풍을 인정하여 1808년부터 주의회 투표를 폐지하고 순수 100% 주민 직선으로만 선거인단을 뽑게 됐다.
이 때 하원의 연방주의자들이 반연방주의자였던 제퍼슨보다는 그나마 성향이 좀 더 가까운 버를 밀어주기로 했는데, 35번이나 투표를 치르고도 대통령이 결정되지 않았다가, 결국 버와 끝장나게 사이가 나빴던 연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이 정적인 제퍼슨을 지지하고, 이에 따라 36번째 투표에서 연방주의자가 많았던 메릴랜드, 버몬트, 델라웨어,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제퍼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에는 16개 주가 있었는데, 처음 투표 당시에는 8개 주가 제퍼슨을 지지했고, 6개 주가 버를 지지했으며, 2개 주가 기권을 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과반수 주의 지지를 얻어야 대통령이 될 수 있기에 제퍼슨은 딱 한 주가 모자라서 첫 투표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결과를 볼 때 제퍼슨이 대세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었는데, 버는 제퍼슨과 정적이었기 때문에 끝끝내 후보 사퇴를 거부했고, 결국 투표가 반복된 것이다. 버는 당시 헌법에 따라 2등 득표자로서 부통령이 되었지만 제퍼슨의 정책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존 애덤스와 토머스 제퍼슨은 그나마 연방당(애덤스) - 민주공화당(제퍼슨)이라고 당이 다른 명분이라도 있었지 제퍼슨과 버는 '''민주공화당 안에서 내분'''이었다. 민주공화당 내분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연방당은 180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앉아서도 자기네들이 이기겠네 하면서 좋아하다가 해밀턴이 버한테 죽으면서 구심점을 상실, 연방당이 1804년 대통령 선거도 못 해보고 소멸당한다.(...)

2.3. 결투와 몰락


버와 해밀턴의 사이는 계속해서 나빠졌고, 결국 전임 재무장관과 부통령이 결투를 벌이게 되었다. 해밀턴은 죽었고 버는 이 결투에서 이겼지만 정치 생명은 끝장나 버렸다. 버는 나쁜 이미지로 굳어졌고 이례적으로 살인 혐의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특히 해밀턴이 일부러 총을 빗나가게 쏘려고 했다는 것에 대한 버의 발언은 "'''사실이라면 멍청한 짓이군'''"(Contemptible, if true)이었다. 결투한 다음 날 오후에 버가 한 말은 "'''아침 안개가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면 해밀턴의 심장을 맞췄을 것이다.'''"라는 발언은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제러미 벤담[3]이 이야기한 "'''버는 살인자나 마찬가지다'''"(Burr is little better than a murderer)라는 표현은 당시의 여론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해밀턴을 정치적으로 용인하던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분노로 다음 부통령직도 얻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그 후 버는 새로 미국 영토가 된 루이지애나 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비록 대법관 존 마셜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4] 버를 석방하였지만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고 결국 버는 미국을 떠나야 했다.
에런 버는 출소 후 제퍼슨의 계속되는 영장질에 지쳐 프랑스로 망명해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영국 대신 미국을 치게 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에런 버가 개인원한을 해결하려고 프랑스 군대를 이용하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탓에 에런 버가 아무리 끈질기게 요구해도 계속 묵살했다.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사람이다. 그동안 겪은 일들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5] 결국 버는 1812년에 미국으로 돌아와 변호사 활동을 하다 사망했다.
[1] 1800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 뉴욕 주는 주민 직선 투표의 결과와 주의회 투표 결과를 각각 50%로 환산해서 합산하는 방식으로 승자독식을 넣어줄 선거인단을 지명했다.[2] 물론 이 결과는 이거대로(대통령 제퍼슨 - 민주공화당, 부통령 애덤스 - 연방당의 동거정부 탄생) 문제긴 하다. 당장 존 애덤스 - 토마스 제퍼슨 동거정부를 경험해본 미국 정치권으로서는 그나마 같은 민주공화당 소속인 제퍼슨 - 버가 대통령 - 부통령 자리를 나눠 갖는 것이 동거정부보다는 낫다고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거정부를 거부한다는 판단이 대선 후유증을 너무 심하게 만들었다.[3]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공리주의자.[4] 마셜은 전임 대통령 애덤스가 후임 대통령 제퍼슨을 견제하려고 대법관으로 임명한 인물이였기에 이 판결도 제퍼슨을 견제하기 위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나온 자료들을 보면 버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증거나 정황은 없기 때문에 누명인 듯 하다.[5] 비슷한 사례로 베네딕트 아놀드가 있는데 미국 독립전쟁 당시 독립군 장교 중 하나였으나 직위가 더 높은 게이츠에게 견제받다가 열받아서 영국에게 붙어버렸다. 사실 아놀드의 경우는 초기 독립전쟁의 영웅급이었고, 게이츠는 만인이 인정하는 꼴통이라 게이츠가 ㄱㅅㄲ라는 결론이 나오기 딱 좋지만 여기에도 여자가 끼어있어서... 게이츠와 아널드가 사랑싸움을 벌인 것은 아니고, 베니딕트 아널드가 후반부에 사귄 페기 슈펜이란 여자가 좀 된장녀 기질이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