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제퍼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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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대

제2대

제3대
패트릭 헨리
'''토머스 제퍼슨'''
윌리엄 플레밍








'''미합중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43년 4월 13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버지니아 식민지
구치랜드 카운티
'''사망'''
1826년 7월 4일 (향년 83세)
미국 버지니아 주 마운트 샬러츠빌
'''재임기간'''
제2대 버지니아 주지사
1779년 6월 1일 ~ 1781년 6월 3일
초대 국무장관
1789년 9월 26일 ~ 1793년 12월 31일
제2대 부통령
1797년 3월 4일 ~ 1801년 3월 3일
제3대 대통령
1801년 3월 4일 ~ 1809년 3월 3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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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피터 제퍼슨
어머니 제인 랜돌프 제퍼슨 '''형제자매''' 8남매 중 셋째 '''배우자'''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22] '''자녀''' 마사, 제인 랜돌프, 메리 웨일스,
루시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학력'''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B.A.)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 (LL.D.)[23]
'''종교'''
개신교 (성공회)[24]
'''신장'''
189cm
'''정당'''
'''민주공화당''']]

1. 개요
2. 일생
2.1. 대통령이 되기 전
2.2. 선거 출마
2.3. 대통령이 되다
2.4. 퇴임 이후
3. 가족관계
4. 평가
5. 종교관
6. 기타
6.1. 숫자 3과의 관계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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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a wise and frugal government, which shall restrain men from injuring one another, which shall leave them otherwise free to regulate their own pursuits of industry and improvement, and shall not take from the mouth of labor the bread it has earned. This is the sum of good government, ...

...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로서,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는 못하게 하되, 그 외에는 각자에게 맡겨 자유로이 스스로의 근면과 발전을 자율적으로 추구하도록 하며, 노동을 통해 얻은 양식을 빼앗지 않는 것. 좋은 정부라 함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이고, ..."[1]

... it left to me to decide whether we should have a government without newspapers, or newspapers without a government, I should not hesitate a moment to prefer the latter. But I should mean that every man should receive those papers and be capable of reading them.

... 나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선택하겠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받아 보고 읽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2]

미국의 제3대 대통령. 미국 건국 주역 중 한명으로 그중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실 대통령 뿐만 아니라 철학자, 사상가, 건축가, 교육자, 초대 국무부 장관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2. 일생



2.1. 대통령이 되기 전


건국 초기의 미국 대통령들이 대부분 그렇듯, 제퍼슨도 부유한 농장주 가문 출신 사람이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서는 변호사가 되어 여러 문제를 다루게 되었고, 나중에는 식민지 의회의 의원까지 지내게 된다. 그러나 미국 식민지영국 정부는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때 제퍼슨은 영국 본토가 식민지에서 벌이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다.
이후 미국 독립전쟁에서 그는 미국을 지지하였고,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해 인권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작성하였다. 이렇듯 제퍼슨은 인권 문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억압적인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 후 버지니아 주지사와 프랑스 공사를 연연하고 국무장관의 자리에 올라 반연방주의(공화주의)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알렉산더 해밀턴[3], 존 애덤스 등의 연방주의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들의 대립이 가장 잘 드러난 사건이 독립전쟁 후 군비 등으로 생긴 채무를 각 주가 균등하게 나눠서 갚느냐, 아니면 각자 알아서 갚는가의 문제. 빚을 덜 진 주의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제퍼슨은 해밀턴의 균등한 분배를 반대하였다. 결국 해밀턴은 수도워싱턴 D.C.로 이전하자는 합의안을 이끌어 각 주가 빚을 균등하게 갚자고 타협하였다.

2.2. 선거 출마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불출마 선언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은 연방주의자들의 후보인 존 애덤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으나, 당시에는 2등부통령이 되는 방식이였기 때문에 부통령이 되었고 당연히 제퍼슨은 사사건건 대통령 애덤스의 정책을 반대하는 입장이 되었다.

2.3. 대통령이 되다


그 후 다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1801년 3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꽤 험난했다.[4] 당시 선거에서는 토머스 제퍼슨과 에런 버가 선거인단에게서 정확히 동수(73표)의 표를 얻어 1801년에 하원 투표로 넘어갔는데, 35번이나 투표를 치르고도 대통령이 결정되지 않았다가 36번째 투표에서 메릴랜드, 버몬트, 델라웨어,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제퍼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연방주의자들이 그나마 제퍼슨보다 성향이 가까운 버를 밀어주다가, 연방주의자의 거두이자 버와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36번째 투표 직전에 입장을 번복하고 정적인 제퍼슨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미국에는 16개 주가 있었는데, 처음 투표 당시에는 8개 주가 제퍼슨을 지지했고, 6개 주가 버를 지지했으며, 2개 주가 기권을 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과반수 주의 지지를 얻어야 대통령이 될 수 있기에 제퍼슨은 딱 한 주가 모자라서 첫 투표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결과를 볼 때 제퍼슨이 대세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었는데, 버는 제퍼슨과 정적이었기 때문에 끝끝내 후보 사퇴를 거부했고, 결국 투표가 반복된 것이다.
버는 당시 헌법에 따라 2등 득표자로서 부통령이 되었지만 제퍼슨의 정책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웃긴 건 에런 버는 제퍼슨과 같은 민주공화당 소속(...)이었다는 것. 같은 당 소속인데도 버와 제퍼슨은 죽어라고 싸워댔다. 사법부 역시 대부분은 전임 존 애덤스가 임명한 인물들이어서 사사건건 제퍼슨을 견제하였다. 그래서인지 제퍼슨은 해밀턴과의 협의로 연방주의자들과 타협해 내각 자리를 마련해주고[5] 1기 재임 시절엔 연방주의 기조도 무리하게 바꾸지 않는다. 허나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연방주의자들의 정책은 높은 과세로 인기를 잃은 데다 수장들이 정치를 은퇴하는 등 지도부가 사라져[6] 점차 소멸하여간다.
제퍼슨의 재임 기간 동안 벌어진 큰 사건으로는 나폴레옹과 한 루이지애나 거래가 있으며[7] 해적들을 토벌하기도 했다. 미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 이민자의 체류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늘린 외국인법이 폐지되었고 보안법으로 체포된 기자들과 시민들도 석방시켰다.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하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문명화시키려고 노력했다.[8] 정확하게 말하면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을 미국의 영토로 선언해 동부 인디언들은 백인 문화로 편입시키고 나머진 미시시피 서부로 몰아내는 정책을 추진했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상당수 원주민들과는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2.4. 퇴임 이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버지니아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1826년 7월 4일 독립기념일사망했다. 사족으로 그가 죽은 지 몇 시간 후 그의 정적이자 친구, 전임 대통령이었던 존 애덤스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명은 이렇다.
[image]
"HERE WAS BURIED
THOMAS JEFFERSON
AUTHOR OF THE
DECLARATION
OF
AMERICAN INDEPENDENCE
OF THE
STATUTE OF VIRGINIA
FOR
RELIGIOUS FREEDOM
AND FATHER OF THE
UNIVERSITY OF VIRGINIA."

BORN APRIL 2 1743 O.S.
DIED JULY 4 1826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이자
버지니아 종교 자유법의 제안자
버지니아 대학교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이 여기 잠들다"

율리우스력 1743년 4월 2일 나서
1826년 7월 4일 졸하다
보다시피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은 안 적혀 있다. 세 가지는 가장 기억되고 싶은 자기의 흔적을 적은 것. 어차피 반연방주의자로서 대통령을 그렇게 기념할 만한 자리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테고.
이렇게 버지니아대를 설립한 걸 자랑스러워했지만, 정작 버지니아대에서는 노예제를 반대했다지만 그래도 노예를 뒀던 제퍼슨을 기념하는 게 맞느냐는 여론도 등장한 적이 있었다.

3. 가족관계


아내로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 여사가 있었으나 1782년 사별했다.[9] 그런데 마사 제퍼슨과 결혼 당시 딸려온 마사의 이복여동생 겸 흑인 노예인 샐리 헤밍스와 제퍼슨 여사 사후 사실상 결혼 생활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 샐리가 아버지가 불분명한 흑백 혼혈 아이들을 여러명 낳은 건 사실이고,[10] 스캔들이 터진게 제퍼슨의 아내가 이미 죽은 후인지라 샐리가 죽은 제퍼슨의 아내 대신 제퍼슨의 정부 노릇을 했다는건 당시부터 오랫동안 미국 정가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이 떡밥은 당시부터 정적들에게 회자되었는데, 제퍼슨 본인은 샐리의 아이들에 대한 정적들의 비난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제퍼슨 사후 묻히는가 싶었는데 이 떡밥은 20세기까지도 유지돼서 1990년대 들어선 후손들의 유전자를 분석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제퍼슨 가문의 DNA를 물려받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토마스 제퍼슨의 아이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측은 샐리 아이들의 아버지는 제퍼슨의 형제라고도 주장한다. DNA 검사가 샐리 후손들이 제퍼슨 집안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만을 밝혔을 뿐이지 제퍼슨 본인의 피를 직접 물려받았는지는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토마스 제퍼슨이 가장 유력한 아버지 후보인건 맞는게 제퍼슨 형제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살았고, 그러다보니 당시 샐리를 임신시킬 수 있는 제퍼슨은 확률상 샐리를 바로 옆에 뒀던 토머스 제퍼슨이 가장 높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샐리도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제퍼슨의 처제라는 점과 샐리의 어머니도 백인 혼혈[11]이고 제퍼슨 장인의 몸종이었다. 게다가 더 골때리는건 첫 아이의 나이를 역산하면 샐리가 제퍼슨과 첫 성관계를 맺은 나이는 대략 10대 중반 쯤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시기 조선에선 결혼도 하는 나이긴 했다만 그래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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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퍼슨의 첫째 딸 마사 제퍼슨 랜돌프의 초상화[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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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 헤밍스의 상상화[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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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와 제퍼슨의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1995년작인 《대통령의 연인들》(Jefferson in Paris)[14]이란 작품이다.[15]

4. 평가


토머스 제퍼슨은 그가 내세운 사상과 행적이 오늘날에도 평가를 받아 러시모어 산의 큰 바위 얼굴에도 새겨지는 등 대우를 받고 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국의 영토를 넓혀 미국의 성장(Growth)을 상징한다고 한다. 초기 미국 대통령 중에선 조지 워싱턴 등과 함께 고평가받는 인물.
그가 내세운 반연방주의 사상과 인권주의는 연방 정부의 지나친 권력 독점 횡포를 막고 주 정부와 국민들의 권리를 수호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한편, 그의 지나친 중앙 정부 견제[16]로 미국에 강한 정부가 없어 결국 남북전쟁의 홍역을 치러야 했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 그가 내세운 인권주의도 결국엔 백인이나 특정 계급만의 인권, 자유 아니냐는 식으로 내로남불이라고 까는 사람도 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노예제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결국 그 자신도 노예 농장의 소유주였으며 어린 흑인 노예와 만나[17] 사생아까지 낳았을 확률이 높다는 것에 대한 비판도 많다. 이런 점을 들어 2020년 BLM 운동 당시 제퍼슨의 동상 역시 철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일부는 실현되기도 했다.#
허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퍼슨이 당대 심지어 현대의 시각으로 봐도 꽤나 진보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제퍼슨을 비롯한 반연방주의자들의 이러한 견해는 후에 권리장전(수정헌법)이라는 개념으로 도입된다. 종교관에서도 그의 자유주의적 성향이 묻어나는데, 당시만 해도 영국성공회국교로 두듯이 미국도 주에 따라 국교를 정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13개 주로 이뤄진 미국 연방을 운영하는 데에 기독교가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과 영국처럼 국교를 따로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 상충했던 것. 실제로, 메릴랜드는 가톨릭, 펜실베이니아는 퀘이커, 버지니아/뉴욕/조지아는 성공회가 공식 종교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퍼슨은 “진리는 위대해서 홀로 내버려둬도 승리한다. 우리는 성공회도, 가톨릭침례회도 아니다. 모두 크리스천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공화주의자들과 함께 국교제 폐지를 주장했고 정교분리 원칙을 못박았다. 이는 이신론적인 그의 종교관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제퍼슨은 중상주의를 주창한 해밀턴과 반대로 그 자신이 지주이기도 한만큼 중농주의를 주창했고, "나는 우리가 정부에 자신의 힘을 믿고 도전하며 우리의 법도 어길 수 있는 주식회사의 재벌이 생겨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하며 재벌의 탄생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 그는 자작농을 공화주의 미덕의 모범이라 보고 도시와 자본가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하여튼 현대 진영에선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인물.
고전적 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리버테리안이나 리버럴들이 좋아하는 대통령이기도 하다.[18] 언론사를 운영했던 경력이 있다보니 당시에 남겼던 몇몇 말들이 아직까지도 언론 자유와 관련해 유명한 명언으로 회자된다. 대표적인 것이 상단에 인용한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 발언. 또 하나는 "언론이 자유롭고 국민 모두가 글 읽을 줄 아는 나라에서라면 만사가 안전할 것이다.". 언론 사상사에서도 신문이 정부를 견제해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한 인물로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5. 종교관


내가 아는 바에 따르면, 나는 나만의 종파에 속해 있다.

-1819년 토마스 제퍼슨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로부터 예수가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아테나제우스로부터 태어났다는 우화와 같은 수준으로 여겨질 날이 언젠가 오게 될 것이다. (중략) 이성의 빛과 생각의 자유가 미국에서 이런 인위적 발판을 제거할 것으로 생각한다.

-1823년 토마스 제퍼슨

많은 역사학자들은 토마스 제퍼슨의 행적에 비추어, 그가 이신론자였다고 주장한다. 특히, 제퍼슨 성경은 토마스 제퍼슨이 이신론자였다는 강력한 근거로 활용된다. 토마스 제퍼슨은 복음서의 내용을 편집해 자기만의 성경을 만들었는데, 이 요약본에는 예수가 행한 기적들, 죽은지 3일만에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모두 지워져 있다. 제퍼슨 성경 스캔본. 사실 제퍼슨 외에도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가[19] 당시 계몽 사상에 영향을 받은 이신론, 무신론에 빠졌다는 해석은 지금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제퍼슨은 이 부분이 특히 드러나는 편이다. 덕분에 당시 보수적인 목사들에겐 까이기도 했다.

6. 기타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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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티첼로(Monticello Estate)
뛰어난 건축 덕후이자 미국 대통령이었기에, 임기중에 많은 미국 행정기관의 건축을 주도했다. 로마시대 건축인 메종 카레를 본 딴 버지니아 주의회 의사당을 시작으로 계속 만들어진 복고풍의 미국 관공서 건물들을 '연방양식(Federal style)'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많은 관공서들과 기념관들이 마치 그리스-로마 신전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가 제퍼슨의 취향에 있었다. 또한 몬티첼로라는 자신의 주택을 설계하여 지었으며, 이는 미국 주택 양식의 하나로 이어진다. 대표작으로는 버지니아 대학교가 있다. 이후 미국에선 아예 판테온처럼 생긴 건물을 제퍼슨의 기념관으로 지어줬다. 판테온처럼 생긴 집에서 살면서 판테온처럼 생긴 대학 건물을 만들었고 죽어서는 판테온처럼 생긴 건물에서 기념되는 인물.
다재다능하고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지만 의외로 언변에는 그다지 능숙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본인 역시 대단히 수줍음을 많이 타서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싫어했다. 대통령 재임시절에 연설한 것이 '''단 두 번'''이었을 정도. 그것도 둘다 대통령 취임 연설이었다. 드라마 《존 애덤스》에서도 제퍼슨이 애덤스에게 "저는 당신처럼 능변의 재능은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동지이자 라이벌인 애덤스가 날리던 변호사였던만큼 상당히 변설에 뛰어났던 것과 달리 제퍼슨은 학자 출신이자 독립선언서의 대부분을 기초했던 만큼 말빨보다는 글빨이 더 좋았던 인물이었던 듯.
미국 역사에서 손꼽히는 엄친아 중 하나로[20] '''7개'''의 언어를 구사하였으며 아일랜드 시인 오시안의 작품들을 아일랜드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걸로 유명한 암호장비인 제퍼슨 디스크는 이후 2차 세계대전을 넘어 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까지 쓰이게 된다.
좋아하는 음식으론 맥앤치즈였으며 벤자민 프랭클린과 마찬가지로 술을 매우 즐겼다. 특히 와인을 좋아해서 와인에 대해 남긴 발언이 여럿 남아있는데, 개중엔 "와인을 싸게 살 수 있는 나라치고 국민이 취해 있는 법이 없고 증류주가 와인을 대신하는 나라치고 국민이 깨어 있는 법이 없다."란 발언도 있다. 직접 포도를 재배해서 와인을 제조하려 했으나 제조 기술이 부족해 실패한 적도 있다. 몬티첼로에 있는 저택에는 와인 수천 병을 저장한 와인셀러까지 있었다.
드라마 《슬리피 할로우》에서 현대에 부활한 독립전쟁 시대의 군인인 이카볼드 크레인이 제퍼슨의 불륜설을 듣고 멘붕하는 장면이 있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 3에서 등장한다. DLC인 워싱턴 왕의 폭정의 3편 에피소드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독립전쟁 후에 폭정을 일삼는 워싱턴을 막기 위해 잔존한 영국군들을 이끌고 뉴욕의 그의 왕궁인 피라미드를 공격하나 도리어 포위당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당하려던 찰나에 주인공 라둔하게둔에게 도움을 받아 탈출하고 이후, 함께 워싱턴을 몰락하는데 일조한다. 하지만, 이 DLC는 선악과가 보여주는 환상인지라 진짜 역사는 아니다. 여담으로 아직 대통령 되기 전이라서 그런지 게임에서는 위에 나온 초상화보다 꽤 젊게 나온다.

6.1. 숫자 3과의 관계


기이하게도 유난히 '''3'''이라는 숫자와 연관이 많다.
  • 자기 가문에서 세 번째로 '토머스'라는 이름을 가졌다.
  • 셋째 아들.
  • 세 군데의 학교를 다닌 끝에 윌리엄앤드메리대학 졸업
  • 33세에 독립선언서 기초
  • 독립선언 기초위원 3번 역임
  • 제3대 프랑스 주재 미국대사로 3년 근무
  • 워싱턴 내각에서 세 번째로 각료에 임명(국무장관)
  • 미국 철학협회 제3대 총재
  • 존 애덤스에게 3표 차이로 패배하여 2대 부통령 역임
  • 미합중국 제3대 대통령
  • 사망 당시의 나이도 83
  • 묘비에 쓴 것도 세 가지
  •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세 번째의 장신. 1위는 에이브러햄 링컨(193cm), 공동 2위는 린든 B. 존슨, 도널드 트럼프(192cm), 제퍼슨은 189cm이다.
  • 한글로 이름과 성 모두 세글자.
  • 이름, 성 영어 알파벳 모두 3의 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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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 취임 연설.[2] 대통령 취임 14년 전, 신문사 사장 시절의 발언.[3] 워싱턴 행정부 때 재무장관을 맡아 미국 경제의 기초를 쌓은 인물로 평가받으며, 못지 않게 강력한 연방정부가 필요함을 제창한 연방주의자로 유명했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4] 이는 제퍼슨의 이신론-무신론적 성향과 탈 기독교적 입장 때문에 미국 전역의 목사들이 제퍼슨에게 극히 적대적인 입장을 보인 것에 기인한 면도 크다. 토머스 제퍼슨과 에런 버의 이름값 및 업적(특히 미국 독립의 사상적 기초를 제시한 건국의 아버지로써의 업적)만 비교하면 에런 버가 제퍼슨을 상대로 의외로 선전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 기독교가 미국 사회에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생각하면 반대로 전미의 목사들이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데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토머스 제퍼슨의 업적이 대단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여담이지만 이 당시 목사들에게 '양 톰'(두 톰)이라고 토머스 제퍼슨과 함께 공격당한 인물이 바로 토머스 페인이다. 단, 야인으로 머물던 토머스 페인이 사후 개신교 목사들에 의해 "죽기 직전 자신의 과거를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했다" 는 헛소문이 퍼트려지는 고인능욕을 당한데 비해 정치적으로 성공한 토머스 제퍼슨은 사후의 모욕을 당하지는 않았다.[5] 이때 연방파들도 대선 패배의 후유증 등으로 해밀턴파와 애덤스파가 싸우고 있었다. [6] 애덤스와 존 제이는 공직에서 은퇴했고, 해밀턴은 1804년 부통령 에런 버와의 결투 도중 사살당한다.(...) 사실 이때만 해도 성격이 온화한 편이었던 제퍼슨은 에런 버도 정적보단 부통령으로 대우해주고 있었는데, 자기한테 말도 안하고 결투가 허용되는 다른 주 가서 부통령이 전직 재무장관을 사살한 사건에 충격받은 나머지 이후부턴 에런 버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는데 총력을 쏟아붓는다.[7] 사실 프랑스 입장에선 웃픈게, 미국 독립 전쟁 지원해주다 재원이 쪼그라들어 대혁명을 맞고 왕정이 무너졌는데, 그 재원 충당하고자 나폴레옹이 선택한게 루이지애나를 싼값에 미국에 넘기는 것이었다. [8] 허나 이에 대해선 비판도 있는데, 노예제를 반대하고 무역도 금지시켰으나 정작 현존하는 노예는 주의 자율에 맡긴다는 식이었고(제퍼슨은 이렇게 자유주들을 늘려가다 보면 노예 허용주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라고 봤다) 심지어 그 자신도 노예를 소유한 대농장주였기 때문. 뮤지컬 해밀턴에서도 이 점을 들어 해밀턴에게 신나게 까였다. 후술되어있듯 흑인 노예와 관계해 자식을 가졌다는 의혹도 있다.[9] 마사 여사는 첫번째 남편이 사망한 후 제퍼슨과 재혼했다.[10] 실제 매디슨 헤밍스, 이스턴 헤밍스 등은 훗날 자기가 제퍼슨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11] 샐리의 조부모 4명 중 3명이 백인이었다는 점 등이다. 그래서인지 생전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부도 하얀 축에 들었다고 한다.[12] 모친인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은 초상화가 없다. 떠도는 초상화는 몇 있는데 다 이 딸 마사 제퍼슨 랜돌프의 모습을 참고한 상상화로 추정된다.[13] 샐리 헤밍스는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다.[14] 제퍼슨이 프랑스 대사로 파리에 머물 때 얘기.[15] 실제 샐리처럼 혼혈인 탠디 뉴턴이 샐리 역을 맡았다. 뱅상 카셀이 나오기도 하고 귀네스 팰트로도 나온다.[16] 일례로 미국 행정부는 대통령 경호 같은 걸 전담하는 부서가 대통령의 권력 강화를 부른다는 이유로 한동안 만들지 않았다. 때문에 미국 대통령들은 지속적인 신변 위험에 시달렸다. 자세한건 SS 항목 참고.[17] 상기되어있듯 부인 사후 엮인거면 불륜은 아니다. 사실 샐리의 나이를 추정하면 부인 생전엔 사실상 꼬마라서 엮일 건덕지도 없긴 하고.. 샐리 항목에 따르면 1782년 부인 사후 7년이 지난 1789년부터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18]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실 클린턴의 중간 이름이 제퍼슨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 유전자 검증은 제퍼슨 자손들의 유전자 검증과 같은 기술로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19] 조지 워싱턴이나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알렉산더 해밀턴 등 다수가 이신론자였다고 평가받는다.[20] 지성이라는 측면에서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 제퍼슨의 지성에 견줄 만한 사람은 정치학자이자 행정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우드로 윌슨 정도 뿐이다. 다만 당대에는 대통령은 아니었어도 벤저민 프랭클린, 알렉산더 해밀턴과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있긴 했다.[21] 반은 농담이지만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시리즈이다보니 나름대로 '3'과의 인연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