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해
1. 개요
朱德海
1911-1972
중국의 조선족 출신 정치인으로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초대 주장을 지냈다. 본명은 오기섭(吳基涉)으로 1930년대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항일투쟁에 나서면서 여러 가명을 썼다가 주덕해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2. 생애
1911년 러시아 제국 우수리스크 부근 농촌마을인 도베야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어머니와 같이 잠시 조선으로 간 적도 있었지만 여의치가 않아서 결국에는 연변지역에서 정착하게 된다. 연변지역에서 일제의 만행으로 1930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조선의용군에 입단하기도 했다. 1936년에는 소련으로 유학갔다가 중일전쟁이 터지자 다시 중국으로 가서, 항일투쟁을 하는 동시에 학교를 세우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벽돌공장과 설탕공장들을 꾸리는 사업을 벌였다. 중일전쟁이 끝나고 나서 국공내전이 벌어졌을때 다시 참전하여 나름대로의 활약을 보였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 연변 조선족 자치구역의 신설을 당국에게 요구했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1952년부터 1966년까지 초대 연변 조선족자치주 주장을 지냈고, 이외에도 지린성 부성장, 전인대 소수민족 대표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조선족으로써 상당한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인물인데 연변이 자치주라고는 하지만 홍콩과 마카오급으로 아예 다른국가 수준의 자치권을 지니고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덕해도 (한국으로 치면)일개 도지사나 시장 정도의 권한을 지니는데 그치기 때문에 동 시기 인물인 김일성이나 이승만, 장면, 박정희에 비해서 존재감이 희박할 수 밖에 없기는 하다. 다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지자체장으로써는 그런대로 능력이 있어서 연변 발전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라는 평이다.
그러나 그렇게 평온하게 연변 자치주 주장을 지낸 주덕해였지만 문화대혁명이 닥쳐오면서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멋모르는 홍위병들에게 집안을 털렸고, 강제로 능욕을 당해버린 건 물론이고 연변 자치주 주장직에서 쫓겨나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후베이 성 일대 농촌지역으로 하방당하며 말년을 비참하게 지내야했다. 폐암으로 병석에 들었을때도 병원에서 약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상태가 악화되었으며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나마의 배려를 받을수 있었지만 끝내 공직에 복귀하지 못한채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후 4인방이 쫓겨나면서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으며, 1986년에 주덕해 기념비가 세워짐으로써 현재는 조선족들 사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로 연변 자치주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되며 위인전도 여럿 나오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