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린성

 



[image] 중화인민공화국
吉林省(Jílín Shěng

지린성 | Jilin Province

[image]

성정부 소재지
창춘시 콴청구 신파로 329
(长春市 宽城区 新发路 329)
지역
둥베이
면적
187,400km²
하위 행정구역
8지급시(1부성급시) 1자치주 21구 20현급시 16현 3자치현
인구
2,753만명
인구밀도
145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바얀촐루(巴音朝鲁/ᠪᠠᠶᠠᠨᠴᠢᠯᠠᠭᠤ)
성장
징쥔하이(景俊海)
HDI
0.760 (2017)
GRDP
$2,278억 300만 (2018)
1인당 GRDP
$8,404 (2018)
행정구역 약칭

ISO 3166-2
CN-JL
홈페이지
1. 개요
2. 지형과 기후
3. 산업
4. 교통과 관광
5. 역사
6. 교육
7. 독립군 활동
8. 중국의 동해 진출?
9. 출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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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린성(길림성, 吉林省)은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성급 행정구역이다. 성도창춘시. 행정상 간칭은 길(吉). 명칭은 만주어로 강 기슭을 의미하는 '기린 울라(Girin Ula)'를 중국어음차한 '길림오랍(吉林烏拉)을 줄인 것이다.[1] 신라를 뜻하는 말인 "계림"과 연관성이 있다는 루머도 존재한다.[2] 서쪽으로 내몽골 자치구, 북쪽으로 헤이룽장성, 남서쪽으로 랴오닝성, 동쪽으로 러시아 연해주(프리모르스키 크라이), 남쪽으로는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접한다.
동북 3성의 가운데에 위치한 행정구역. 인구(약 2,600만 명)[3]나 경쟁력으로 보면 랴오닝 성과 헤이룽장 성에는 좀 밀리는 편이다. 면적은 187,400km² 이다.
중국 조선족 밀집지역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속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린성 남부가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도라는 곳이다. 간도의 범위가 워낙 애매한 탓에, 랴오닝성 일부 지역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여행유의 지역인 이유는 북한과의 국경 지대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북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지역으로, 납북의 위험성이 있다.

2. 지형과 기후


지형은 남고북저형이고 북쪽은 둥베이 평원의 일부에 해당되어 드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확연히 산세가 험해지는데 창바이 산맥(장백산맥), 장광차이링 산맥, 랴오예 산맥 등이 뻗어 있고 산세는 강을 넘어 한반도의 개마고원백두대간으로 이어진다. 성내 최고봉은 남쪽에 위치한 백두산이다.
큰 도시는 북쪽에 집중되어 있고 대표적인 도시로 북부의 창춘시, 중부의 길림, 남부의 연길시 등이 있다.
기후는 냉대 대륙성 기후. 내륙도가 상당하기 때문에 겨울엔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추워진다. 겨울에 영하 25도는 기본이다. 특히 백두산 근처 동네는 죄다 중강진만큼의 헬게이트라고 보면 된다.
아쉽게 바다와 접하지 못한 성이다. 성의 동부 훈춘시 끝은 동해와 10km를 두고 러시아와 북한에 가로막혀 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의 삼합점에 가면 동해가 보인다. 지린성은 동해바다를 지척에 두고 해안과 접하지 않는다.
과거 청나라 시절 지린성은 매우 크고 아름다운 성이었다. 현재의 지린성 일대뿐만 아니라 헤이룽장성의 남부 그리고 연해주의 전부와 러시아 하바롭스크 지방의 남부를 모조리 차지하고 있었다. 대충 과거 발해의 동쪽 영토 대부분이 이때의 지린 성이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지린성의 면적은 현재와 같이 아담해졌다.

3. 산업


공업은 북부의 대도시들을 필두로 발달해 있으나 나머지 지역은 거의 시궁창. 옆의 요령성에 비하면 참으로 눈물나는 인프라 때문에 거의 발달해 있지 않다. 주요 산업은 중공업이지만 남쪽의 연길 등에서는 경공업과 서비스업이 우세한 편.
농업은 옥수수이 주를 이룬다. 특이한 점은, 열악한 기후 환경에도 불구하고 재배 비율이 예상 외로 높은데 이는 조선족들의 영향이 크다.

4. 교통과 관광


북쪽으로는 하얼빈으로 가는 철도가 지나가기 때문에 철도 인프라는 나쁘지 않으나 남쪽은 매우 열악하다.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도문 사이를 잇는 두만강 철교가 있지만 왠지 대한민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 정도의 이미지가 훨씬 강한 듯.
항공도 그리 편하지 않다. 주요 공항이 4개 있는데 하나는 중심지인 장춘에 있고, 다른 하나는 길림시, 나머지 2개는 전부 연변에 위치해 있다. 특히 연변은 한국과의 접근성때문에 거리에 비해 비행기 티켓값이 장난 아니게 비싸다. 물론 북한 상공을 통과하지 못하고 에돌아 가야 하는 점도 감안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가격이 비싸다.

한국 관광객들이 백두산에 가기 위해 들러야 하는 곳이다. 보통 연길에서 출발하는데 도로 사정이 상당히 좋지 않다. 절벽으로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 체험(...)이 가능하다. 연길에서 백두산까지는 대략 버스로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백두산 외에 용정, 도문 등도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최근 중국 당국이 백두산을 가는 교통에 투자하고 있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백두산을 잇는 고속철 노선(둔바이 고속철도)가 2021년 개통 예정이다.
또, 북중 교역 강화위해 퉁화와 북·중 접경 지안(集安)까지 연결되는 지안~퉁화 고속도로가 개통하였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연변은 한국어가 꽤 통한다. 그러나 일단 연변 지역이 조선족 자치구라고는 해도 한족 인구가 반수를 넘어가는 추세다. 게다가 조선족이라도 언어가 본토 한국어와 어느정도 분화가 생겼기 때문에, 소통에 어느정도 지장이 있다. 그나마 조선족은 한국 TV와 한국책 등이 많이 보급되어있고 한국으로 일하러 들어가는 경우가 워낙에 많다보니 한국인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한국인은 상대적으로 조선족의 말을 알아듣기 힘들다. 뭐 일단 이곳 가게들 간판은 대부분이 한글/한자 두가지 문자로 적혀있긴 하다.
고구려시대나 발해시대 유물, 건축물이 꽤 많아 관광을 위해 일반인에게 개방해 놓았지만 일부 지역은 한국인이 아예 입장할 수 없는 곳도 있다.

5. 역사


지금은 중국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 이름이 만주어 어원인데서도 알 수 있듯 역사적으로 중국의 통치 하에 있었던 시기보다는 한국사 왕조, 퉁구스계 왕조, 몽골유목제국의 지배를 받은 기간이 길었다. 옆동네 랴오닝은 그래도 중국이 직접통치한 시기도 꽤 있었지만 지린은 지도상으로 중국 영향권 내에 표시되어 있었던 몇몇 시기에도 워낙 춥고 산세가 험하고, 툭하면 유목 민족들에게 털리는지라 간접적 통치가 대부분이었고 관리도 매우 힘든 곳이었다.
고대에는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의 활동무대였으며 발해 멸망 후 거란, 여진, 몽골 등이 발흥해 이 곳을 통치했고 청나라 또한 이 곳에서 발흥하였다.
하지만 워낙 관리가 힘든 곳이라 이 지역의 왕조들은 중원을 지배하고 나면 항상 이 곳을 버리다시피 해왔다. 청의 경우 아예 "여긴 우리가 태동한 땅이니 신성한 곳이라 아무도 발 들이지 말라."하고 봉금령을 내렸지만 현지에 살던 만주족들은 대다수가 중국 본토로 이주해버린탓에 남아있는 만주족 인구는 매우 적어서 역시 관리라기보단 거의 방치에 가까운 정책을 폈다.
그렇게 길림성 남부 지역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게 되어 비무장지대 같이 완전 야생지역이 되다 보니 한국에서 기반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농사짓기 위해 넘어가서 마을을 만들기도 하고, 거기서 쑥쑥 자란 산삼 같은 것들 캐기 위해, 조선 사람들이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이 곳으로 많이 넘어오게 된다. 이것이 중국조선족의 시초이며 간도 떡밥의 시작이었다. 공식적으로 정한 국경선을 맘대로 넘어가는 문제라 조선에서도 불법으로 간주해 처벌했으나 북한 탈북자마냥 적극적으로 발본색원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이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청 양국 간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바람.
청나라 말기에 통제력이 약해지자 한족 농부들이 농사짓기 위해 대대적으로 이 땅에 밀려들어와 이곳의 다수민족이 되었다. 청 멸망 이후에는 만주 지역에 한족 군벌들이 성장하였고, 길림독군 맹은원의 지배를 받았으나 1919년 동삼성 순열사 장작림에게 장악되었다. 이후 10년 넘게 봉천군벌의 지배를 받았으나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 일본 제국이 점령했고 선통제를 옹립하여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이 만주국의 수도가 신경(新京)이라는 곳이었는데 바로 지금의 장춘이다. 일본 패망 후 소련군이 잠시 이곳을 접수했다가 얼마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들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6. 교육


지린성 최대 규모의 중점 대학으로는 지린시에 위치한 북화대학(베이화대학, 北华大学, Beihua University)이 있다. 1999년 교육부의 승인으로 길림사범학원, 길림의학원, 길림임학원, 길림전기화고등전문학교가 합병해서 세워졌다. 따라서 동, 서, 남, 북 4개의 캠퍼스가 존재한다.

7. 독립군 활동


길림성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 독립군들이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지역이다. 요령성은 일본의 통치력이 강했고, 흑룡강성은 지리적으로 너무 멀어 교포들이 많이 사는 길림성이 독립운동의 사실상 중심지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수많은 전투가 이 곳에서 벌어져 대승을 거두는가 하면 간도 참변 등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거치고 이 곳의 독립군 활동은 잠시 위축되는데[4] 그러던 와중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다. 이후 3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독립군과 중국군이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 하지만 점점 일본의 통치력이 강해지면서 만주의 독립군들은 대부분 중국 관내로 들어가, 만주의 독립 운동은 시들해지게 된다.
물론 그 후에도 김일성이 이끄는 세력이 함경도 내에 진입을 시도하는 과감한 활동을 하는 등 저항 운동이 있었다. 북한에서 치켜세우는 보천보 전투[5]가 이것이다. 그마저도 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사라지게 된다.

8. 중국의 동해 진출?


지도를 보면 길림성의 동쪽은 북한러시아 영토에 막혀 아슬아슬하게 동해 바다와 접해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동해로 나가고 싶은 중국 정부가 동해로의 진출로를 모색하려고 북한에게 여러가지 지원해 주면서 나진항 이용권을 얻어가고 있다. 하지만 실용성이 있을지는 미지수이긴 하다.
과거 청나라제정 러시아 시절에 연해주를 놓고 갈등을 벌인적도 있다.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캬흐타 조약이라는 국경 획정 조약을 맺었지만, 1800년대에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차례차례대로 전쟁에 이기면서[6] 아이훈 조약베이징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9. 출신인물




[1] 당시 관화는 구개음화가 되지않던 시기여서 오늘날 'ji'로 발음되는 것들은 대부분 'gi'로 발음했다. 구개음화가 완전히 진행된건 청나라 말기 이후부터였다.[2] 청나라 건륭제의 경우 만주원류고에서 길림이 신라를 뜻하는 계림과 연관이 있다는 의견을 보인 적은 있다. 다만 만주원류고는 청나라가 자신의 역사성을 과장하기 위해 한민족계 국가들을 끼워맞춘 책이라...[3] 북한 인구와 비슷하다. 다만 출생아수는 북한의 절반도 채 안된다(...) 그만큼 고령화와 인구감소 문제가 심각한 지역이라는 것.[4] 그 와중에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설립 등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5] 장군님이 축지법을 쓰셨고, 장군님이 잡은 솔방울이 수류탄으로 변했다느니, 나뭇잎을 타고 강을 건넜다느니 하는 찬양문구가 주구장창(…).[6] 아편전쟁, 청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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