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저우언라이 총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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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 '''
<colbgcolor=#cc0000><colcolor=#ffd700> '''정체'''
周恩來
'''간체'''
周恩来
'''한국식 독음'''
주은래
'''병음'''
Zhōu Ēnlái
'''자'''
상우(翔宇)
'''출생'''
1898년 3월 5일 청나라 장쑤성 회안현
'''사망'''
1976년 1월 8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소비에트공화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인민공화국 [image]
'''학력'''
난카이대 졸업
중국-프랑스 대학 중퇴
'''직업'''
군인, 정치가, 외교관
'''종교'''
무종교(무신론)
'''총리
재임기간'''
초대 1949년 10월 1일 ~ 1976년 1월 8일
'''부주석
재임기간'''
8기 1956년 9월 28일 ~ 1966년 8월 1일
10기 1973년 8월 30일 ~ 1976년 1월 8일
'''외교부장
재임기간'''
초대 1949년 10월 1일 ~ 1958년 2월 11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한민족과의 관계
5. 개인사
6. 주요 경력
7. 참고문헌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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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군인시절 사진.
중국의 혁명가, 군인, 정치가, 외교관.
192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의 핵심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죽을 때까지 초대 국무원 총리를 지냈으며 외교, 정치, 경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오랜기간 한국식 한자독음인 "주은래"로 표기했다. 지금도 주은래 총리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고, 사실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신해혁명 이전 출생 중국인은 한국식 한자독음으로 부르는게 타당하다고 해서 저우언라이랑 주은래 모두 표준 표기에 해당한다.

2. 생애




3. 평가


주은래만큼 청렴하고 욕심없는 정치인은 보지 못했다. 처자식도 없다고 한다.[1]

이런 사람이 또 있다면 UN은 언제든지 조기를 게양하겠다.

前 UN 사무총장 발트하임, 주은래가 죽은 뒤 UN이 조기를 게양한 이유에 대한 변

현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로 '''대인'''이라 꼽힌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흔히들 "저우 총리"라 부를 정도. 성격도 원만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데 뛰어나서 동료들이 저지른 실책들을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미담들이 많이 들려온다. 심지어는 상대방 측인 장제스의 여자 문제를 훈훈하게 마무리해주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전 왕조의 유산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인 자금성, 포탈라궁 등을 지켜주기도 했다.
그의 청렴성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저우언라이가 총리로 재임하던 당시 파키스탄의 관료였던 사람이 증언에 따르면 파키스탄 탁구 국가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국빈 대접 차원에서 저우언라이가 자신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저우언라이가 무언가 걱정하는 듯 보이자 파키스탄 국가대표팀 선수가 저우언라이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으시냐"고 물었는데 저우언라이가 대답하길, "우리 집에 식기가 부족해서 말입니다. 이웃들에게 좀 빌려달라고 얘기해 뒀었는데, 늦어져서 걱정입니다." 즉, 중국 총리의 사저에 기껏해야 수십 명 정도를 대접하는 데 필요한 식기조차 없었던 것.
정치가로서는 평생 마오쩌둥과 함께 한 일생일대의 동지였다. 위에도 나왔지만 저우언라이는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을 초기에 모두 반대했고, 이후에도 계속 이런 정책적 과오들을 자신의 권한 내에서 또는 마오쩌둥이 노여워 하지 않는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했다. 마오쩌둥의 카리스마가 화려한 언변과 날카로운 필력에 원천을 둔 것이었다면,저우언라이는 조용하면서도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성품으로 '''좀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내전 당시에도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 양 쪽으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현대 중국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심지어는 명재상의 대명사인 소하제갈량[2] 비교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이런저런 잘못들을 갖고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지만, '''저우언라이를 비판하는 사람은 없다.''' 일각에서는 사당에 신의 한 명으로 모실 정도라고 하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쩌둥의 급진적인 잘못을 마오쩌둥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권한으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당시 문화대혁명의 피해가 너무 크다 보니 생사를 함께한 혁명 동지들이 별의별 이유로 숙청당하는데도 총리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지켜만 봤던 그를 일부에선 방관자였다고 비판하기도 하며 이것이 저우언라이의 몇 안되는 비판점이다. 하지만 본인이 사망 직전 마오쩌둥을 국가 주석으로 세운것을 후회하는 일기가 2007년 공개됐다.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 여사가 보관하던 일기였다.[3]
게다가 마오쩌둥는 꼭 동지를 출당하거나 혹은 벌을 내릴 때 저우언라이를 통해 발표하도록 하여 책임을 떠밀었고, 저우언라이는 본의 아니게 이런 숙청 명령서에 가장 많이 사인을 하게 되었다. 류사오치의 경우도 출당 발표를 저우언라이가 했을 정도.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그 역시 숙청의 굴레에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가 없었으면 홍위병중국의 모든 문화재를 박살내고 자금성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황하가 범람해 현장에 긴급방문했는데 일하던 인부들이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가 지시를 어떻게 내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한 말은 "여러분, 아무쪼록 의견을 내주세요." 인부들이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주 총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판에 박힌 인사를 하자 총리는 "우리는 모두 일가친척입니다. 환영할 필요는 없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문제는 '다리를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모두 다리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므로 경험도 풍부합니다. 나는 모두의 의견에 따라하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의 평상시 인품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대목. 실제로 이런 점은 덩샤오핑이 상당 부분 본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도 대인의 면모를 많이 보였다. 중국 공산당이 보통 구 청나라 황족들에게 매우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던데 반해 저우언라이는 그들에게 호의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동정적이었다. 특히 청 황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남동생인 애신각라 부걸과 그의 일본인 아내 사가 히로가 같이 중국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들의 장녀 혜생의 편지를 받고 사가 히로를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초청한 사람 또한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중국일본은 적대국이었기 때문에 편지를 읽고도 그냥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관대하게도 한 소녀의 편지를 읽고 청을 들어준 것이다. 옛 순친왕부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최고의 대우를 해준 것도, 문화대혁명 때 부걸의 집이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고초를 겪자 경비병을 파견하여 그들을 지켜준 것도 모두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정말 '''대인'''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심지어는 일제 전범들에게도 인도주의적 관용을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의 아버지였던 천두슈는 1930년대 공산당을 탈당했고, 정통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가, 나중엔 아예 공산주의를 버렸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국공합작중국 국민당 정부가 옮겨온 충칭에 머물 당시, 당시 중국 국민당 감방에서 출소했던 천두슈가 병석에 눕자 병문안을 왔고, 거금을 치료비로 건내기도 했다.(천두슈는 거절했다.) 당시에도 천두슈가 옌안에 있던 마오쩌둥에게 "트로츠키파 배신자이자 잘못된 지도로 당을 구렁텅이로 이끈 무능력자"로 취급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저우언라이의 천두슈에 대한 대접은 상당히 대인배적인 것이었다.
1957년 전국인민대표회의 민족위원회가 주최한 민족공작좌담회에선 "우리는 대민족주의-특히 대한족주의-와 지방민족주의에 모두 반대한다. 반드시 민족 구역의 자치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민족의 역사발전과 경제발전, 혁명발전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이다. '''각 민족들은 완벽한 평등을 누리고 그 어떤 차별을 받아서도 안 된다.'''"라고 말하며 배타적 민족주의와 편협한 대국 쇼비니즘을 질타하기도 했다.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본다면 저우언라이가 저승에서 땅을 칠 것이다.(...)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때는 내몽골 자치구 정부주석을 맡고 있던 우란후를 지켜주기도 하였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을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는 2012년 출간된 책에서 "나 자신이 살아오며 저우언라이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인물은 없었다"고 그를 극찬했다. 닉슨 역시 자신이 방중했을 때 저우가 "내가 에 걸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내가 살아있을 때 빨리 미중 수교를 성사했으면 한다"는 말을 건네는 걸 보며 감동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인기가 많다. 황장엽의 회상에 따르면 정작 원조의 양은 소련이 중공을 앞섰지만, 브레즈네프가 "이만큼 도움을 많이 해줬지 않느냐"라며 생색내고 툴툴거렸던 반면 저우언라이는 겸손하게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중변계조약 때 북한에 양보를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종합해보면 웃음거리가 아닌, 말 그대로의 '대륙인'의 기상이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비판도 존재한다. 이례적으로, 달라이 라마는 "차라리 마오쩌둥은 투박한 시골 사람 같은 면이 있는데, 저우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적을 만들지 않는 것뿐이며 실상은 부드러운 위선자"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는 마오쩌둥의 정책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꼬리를 내리며 마오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앞서 대약진운동에서도 처음에는 대약진 운동이 너무 과격한 발상이라며 반대했지만 허황된 고속성장의 꿈에 매달렸던 마오쩌둥의 뜻을 꺽지 못하고 결국 자아비판을 하며 꼬리를 내렸으며 이러한 모습은 문화대혁명때에도 반복되었다.[4] 그러하니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한들 마오의 실책을 수습해주는 정도에 그치며 중국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데에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고, 또한 대약진 운동의 파국이나 홍위병4인방의 횡포도 막지 못했으니 이 점에 있어서 실망감을 줄수밖에 없는 위치였기도 했다. 그러하니 달라이 라마 입장에서 말이 통한다면서 기대를 걸었다가도 대차게 실망을 한 경험이 있었으니 좋은 생각이 들리는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저우언라이에 대해 위선자라고 부른 듯하다.[5] 영미권에서 야유조로 부르는 '''Chew and Lie'''(금방 눈치채겠지만, 저우언라이와 발음까지 비슷하다!)라는 별명도 이와 같은 뜻이라 보면 될 것이다.(위 각주 참고)

4. 한민족과의 관계


장제스마오쩌둥, 쑨원이 그렇듯이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1919년 3.1 운동을 지켜보면서 조선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카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연극을 공연했으며, 황푸군관학교에 재직하면서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친해졌고, 많은 조선인 제자를 두었다.
저우언라이의 대인적 풍모는 한국사에 대한 언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발해-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던 중국사회과학원에 그러지 말라고 경고를 했으며''', 그것에 대해 북한 파견단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이 문제를 다룬 신문기사 또한 1962년 북한측이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만주 지역에서 발굴조사를 한다고 했을 때 이를 허락하기도 했다. 요즘 중국 어용학계들이 보이고 있는 역사왜곡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6]
발해 - 고구려사 이외에도, 6.25 전쟁 초반 김일성이 승승장구하며 우쭐해있을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예상하고 김일성에게 이를 경고했다. 그러나 근자감에 쩔어있던 김일성은 이를 듣지 않는다. 저우언라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중공군 26만을 국경에 배치시키고, 한반도 정찰을 명령해 베이징에서 있었던 전략회의에서 "'''더글러스 맥아더가 상륙한다면''' 군산이나 원산이 아닌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정확히 예측한다.'''[7] 군사전략적 안목까지 갖췄었다는 소리. 저우언라이 본인도 대장정,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참여했으며 강서 소비에트 시절, 중국 국민당의 공세에 맞서 홍군의 총지도부를 운용해본 경험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저우언라이는 9.28 수복 이후 유엔군한국군이 계속 북진하자 미국에 여러 번 경고했다.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홀로 북진하는 것은 무방하나(즉 중국이 개입하지 않겠다.), 미군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겠고, 이후 모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여러 번 경고했다. 결국 당시 중국의 참전 의사를 경시한 UN군이 그대로 북진하자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란 미명하에 참전을 개시하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출병에 앞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와는 달리 한반도 출병에 반대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국가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출병하면 많은 자원이 그 쪽으로 전용되어 재건이 늦어지고, 세계 최강 미국을 상대로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 망하더라도 외교를 통해 미국의 중국 진공은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 그러나 마오쩌둥펑더화이의 강경론이 득세했고, 결국 중공군 참전으로 이어진다. 결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속과 김씨왕조의 성립이지만 중국 입장에서야 베이징 코앞에다 완충지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휴전협정을 먼저 제기하였다.
또한 정주영현대자동차의 은인(?)이기도 하다. 1974년 최종 타결된 중국-일본 간 무역협정에서 "남조선이나 대만과 거래하는 일본기업의 중국 진출을 불허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4가지 원칙(저우 4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 때문에 토요타와 합작 관계가 끊긴 신진자동차가 도산하면서 현대자동차가 그 반사 이익을 누린 것. 현대자동차는 미쓰비시 자동차와 합작하려 했으나, 미쓰비시가 이 원칙 때문에 현대와 합작을 포기했다. 지금 와서는 합작을 애걸하던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보다 커졌으니, 격세지감.
잘 알려지지 않지만,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조중변계조약에서 많은 양보(?)를 하여 백두산 전체가 아닌 반만 가져갔다. 백두산까지 자기네 땅이라 주창하는 중국의 관점에선 넘겨주었다고 해도 어색한 표현은 아니다. 자세한 건 백두산 문서로. 그래서 중국에서 한동안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홍위병도 이를 들어 저우언라이를 비난했다.
또한 '깐수 사건'으로 유명한 정수일 교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본래 중국 조선족 출신인 정수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 정책에 실망해서 북한 귀화를 결심하였다. 이 때 정수일은 그냥 망명하는 게 아니라 저우언라이에게 직접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정수일과 같은 인재가 중국을 떠나겠다고 하자 대단히 아쉬워하면서 "좋은 여성을 소개해 줄테니 중국에 남아 달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정수일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고 귀화를 직접 허락해주었다고. 저우언라이가 이렇게 신원을 직접 보증해준 덕에 정수일은 북한에서도 숙청을 당하지 않았다.

5. 개인사


[image]
노년의 덩잉차오.
여성편력이 복잡한 마오쩌둥에 비해 저우언라이는 젊은 시절부터 동지이자 아내인 덩잉차오(邓颖超, 등영초. 1904.02.04.~1992.11.07.)와 백년해로하여 가정적으로도 모범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나이 차는 6살. 여자 문제로 시끄러운 중국 지도층들 중에서 드문 순정파였다.[8] 물론 이것에는 아내 덩잉차오의 능력도 한 몫 했다. 한 번은 저우언라이가 다른 귀부인들과 함께 있을 때가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쳐 저우언라이를 '''작살'''낼 정도의 여장부였다고 한다.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이런 구타 행위가 두어 차례 있으니, 다음부터는 여자들이 저우언라이 근처에 갈 생각도 안 했다.
덩잉차오 역시 중국 공산당 창당시기부터 활동한 주요 인사로서 여성운동을 지도하며 주요 요직을 역임했다. 내전 이후 여권 신장과 특히 전족 폐지에 큰 역할을 하였다.
[image]
1925년 8월 8일.
이들은 '''대장정을 함께 완주해낸 부부이기도 하다.'''
덩잉차오 여사는 투쟁 기간 동안 건강을 해쳐 불임이 되었다. 출산 중 충격으로 인해 사산하고, 자신은 불임이 되었다고 한다. 때문에 죽을때까지 자식을 하나도 얻지 못했으나, 조카나 다른 아이들을 대단히 사랑했다고 한다. 특히 내전 과정에서 희생된 혁명열사의 유자녀들을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웠다고 한다. 오랜 국공내전 기간 동안 공산당은 희생된 간부들의 유자녀를 최대한 돌보았다.
[image]
1928년.
상하이에서 공산당원 부모가 체포, 처형된 후 거지생활을 하던 아이들을 구출하고 수천리 바깥 공산당 점령지구로 탈출시킨 사례도 있다. 덩잉차오를 중심으로 한 여성 간부들이 이런 고아들을 돌보았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과 그 후손들은 훗날 공산당 체제의 버팀목이 된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이다. 근데 리펑은 저우언라이와 마찬가지로 2인자이긴 한데, 존경받는 양아버지와는 달리 중국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는 인물이다. 왜 그런가 하면 리펑은 '''천안문 사태 당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책 결정은 덩샤오핑과 같은 원로들이 했지만 실제 수행은 이 사람이 했다.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든 자' 등과 같은 욕을 들으며 엄청난 비난을 들었고 지지율도 바닥쳤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직에는 남아 있을 수 있었다.

1960년 8월.
사진에서 보면 항상 붙어다니고 있고, 서로에게 쓴 편지를 보면 낯간지러울 정도이다. 대표적인 내용이...

'''"오, 당신의 입술이 그립소. 그대에게 뜨거운 키스를!"'''[9]


6. 주요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국무원 총리'''
[image]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대

2대
저우언라이
(1949년 10월 1일 ~ 1976년 1월 8일)

화궈펑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외교부장'''
[image]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대

2대
저우언라이
(1949년 10월 1일 ~ 1958년 2월 11일)

천이

7. 참고문헌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Zhou Enlai The Last Perfect Revolutionary, Gao Wenqian[10], Peter Rand, Lawrence R. Sullivan, PublicAffairs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대기근,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 개혁과 개방, 조영남, 민음사.
  • 장칭 평전, 로스 테릴, 교양인.
  • 코민테른과 대장정, 오토 브라운, 일월서각.
  • 중국 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8. 관련 문서



8.1. 인물



8.1.1. 중국 공산당



8.1.2. 중국 국민당



8.1.3. 외국



8.2. 사건



[1] 사실 후술하겠지만 처(덩잉차오)는 있었다.[2] 삼국지연의의 영향으로 제갈량을 전략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의 가장 큰 재능은 내정을 총괄하는 정치력이다. 만년 떠돌이 세력이었던 유비군이 형주와 촉에 정착하고 한중을 손에 넣어 중원을 노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갈량의 정치력이 있었다. 실제로 유비가 죽기 전까지 제갈량은 전선에 나간 적이 없고 유비군의 내정을 담당했었다. 조조군의 순욱같은 포지션이었던 것. 실제 전략가는 방통이나 법정등 이었다. 재밌게도 저우는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온 '국궁진췌 사이후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3] 사실 따지고보면 마오쩌둥이 급진적인 경제정책에 집착하지 않고 저우언라이가 추진하던 대로 차근차근 경제성장이 진행되었으면 중국은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을 겪지 않아서 훨씬 이전에 세계 수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국제적인 입지도 단단해졌을터였다. 또한 저우언라이 자신도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피해를 완화시킬려고 고생을 사서했고, 거기에다가 문화대혁명 직후로 동료들이 숙청되고 4인방의 입지가 강화되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4인방과 4인방의 비호를 받은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아야했으니 당연히 마오쩌둥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들수만은 없기는 했다.[4] "마오쩌둥은 비전에 찬 공상가였고, 저우언라이는 바로 그 악몽을 현실로 탈바꿈시키는 산파였다. 언제나 근신 중이었던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에 지칠 줄 모르고 전념하게 된다." - 인민 3부작 - 프랑크 디쾨터[5] “모택동이나 주은래나 우리 티벹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하여 헌신하는 맑스주의자들이 아니었으며 철저한 국가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가장한 쇼비니스트들이며,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자들이며, 편협한 광신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고난의 장정의 투쟁을 거친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꿈이었고 이상이었던 공화국을 세우자마자 갑자기 서구열강의 제국주의보다 더 악랄한 제국주의자들로 표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모택동은 사람이 좀 무뚝뚝하고 우직하지만 진실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주은래는 츄유 앤 라이(Chew and Lie)라는 별명대로, 항상 생글생글 웃고 친절하지만 차갑고 교활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우열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둘 다 인간세에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탐욕의 화신들일 뿐이지요.” -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달라이라마의 인터뷰[6] 현재의 중국은 동북삼성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부여 등 자국 땅에 있는 한민족의 역사 유적에 대해 발굴은 물론이고 참관도 못하게 하며 외국인이 발굴현장을 구경 하려고 하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특히 한국인'''. 그래서 관련 전공인 한국 역사학자들은 일부러 옷도 패션센스 없게 입고 말투도 조선족으로 위장해서 중국을 드나든다는 이야기도 있다.[7] 실제 미 합참과 해군이 처음 제안한 상륙지는 군산이었다.[8] 마오쩌둥은 말할 것도 없고, 장쩌민 같은 경우는 자기가 눈에 둔 유부녀 가수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으로 삼았다고 한다. 보시라이는 관계 맺은 여자만 자그마치 100여명에 달한다는 루머성 기사까지 보도됐을 정도이다.[9] '''실제 편지 내용이다.'''[10] 중국 공산당 중앙 문서고를 관리하던 역사가로, 저우언라이 관련 기밀자료들을 가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가오원첸의 저우언라이 평전은 그런 기밀문서들을 바탕으로 나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