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루 전쟁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이산들와나-로크스드리프트
3.2. 영국군의 증원과 전쟁의 종결
4. 전후처리
5. 여담


1. 개요


공식명칭은 영국-줄루 전쟁(Anglo-Zulu War)이지만 영국 부분을 생략하고 그냥 줄루 전쟁이라고만 부르는 경우가 많다.
1879년 1월 11일부터 같은 해 7월 4일까지 이어진 대영제국줄루 왕국간의 전쟁. 이 전쟁으로 줄루 왕국이 멸망했고, 영국령 남아프리카 식민지에 흡수 병합되어 남아프리카 연방의 토대가 되었다.
영국군의 이산들와나 전투(Battle of Isandlwana)의 참패로 서구에 널리 알려져 있고 동시에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대대적인 증원과 준비를 갖추고 온 유럽 열강을 현지세력이 이길 수 없음을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2. 배경


1867년 영국령 캐나다가 성립되자 영국의 제국주의자 및 식민지 군인 및 관료들은 캐나다를 롤 모델로 삼아, 남아프리카 일대에도 거대한 하나의 연방으로 합쳐 통치를 용이하게 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남아프리카 전체를 영국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에 문제되는 세력은 크게 둘이었으니, 하나는 보어인이고 하나는 줄루인이었다. 네덜란드계 이주민의 후손인 보어인들은 이미 영국의 해안지방 장악을 피해 내륙으로 이동, 트란스발 공화국을 건국한 상황이었다.(1852년) 그러나 트란스발 공화국은 건국 이래 계속 줄루인들과 국경분쟁과 충돌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 와중에 군사력을 동원한 영국 식민지의 위협에 트란스발 공화국은 남아프리카 식민지에 합병되고 만다.
이로서 줄루와 보어의 국경분쟁은 졸지에 남아프리카의 현지 국가 줄루와, 대영제국과의 국경분쟁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리고 영국은 계속 명분을 쌓아갔다. 줄루의 잦은 국경침범을 명분삼으며 계속 배상을 요구했고[1] 이런 분쟁이 늘어가던 도중 줄루족에 의한 영국 민간인 납치사건이 벌어졌다. 이것이 1878년 하반기의 일이었다.
영국측은 민간인의 즉각 석방과 납치범의 영국측 인도, 배상금 지불(소 600마리), 선교의 자유, 그리고 '''줄루군의 해산'''을 요구하는 통첩을 전달했다. 줄루 왕국 국왕 세테와요는 이의 답신을 하지 않으며 사실상 거부의사를 밝혔고, 이 사실을 보고받은 런던에서는 1879년 1월 11일, 개전을 승인한다.

3. 전개



3.1. 이산들와나-로크스드리프트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를 주제로 한 뮤직비디오
그러나 개전 직후 줄루족 영토로 들어가던 영국군 4천은 줄루족을 얕보고 들판에서 진을 쳤다가 그만 줄루군 2-3만에게 포위되었고 줄루군에게 총 몇 방 쏘다가 결국 포위 섬멸당해 병력 태반을 잃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것이 1월 20일 이산들와나 전투다. 이로서 영국군의 전쟁계획은 시작부터 깨졌고 전군의 사기도 추락했다. 패전 및 피해규모 사실을 보고받은 현지 총독부와 본국 정부는 해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자부하던 대영제국이 인종주의가 만연하던 당시의 시각으로는 '미개인들의 나라'에 불과했던 줄루 제국에게, 그것도 창과 활을 든 병사들에게[2] 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군이 대참패를 당했다는 사실에 멘붕했다.
그러나 이산들와나 전투 바로 직후, 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해 공을 세우지 못한 줄루군의 또다른 병력 수천여 명이 영국군 보급기지 겸 야전병원인 로크스드리프트를 포위 공격한다. 1월 22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로크스드리프트 전투에서, 부상병 30여 명이 포함된 영국군 단 1개 중대 130여 명은 수천여 줄루군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 줄루군에 300~1천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고 승리한다. 레고를 이용해서 로크스드리프트전투를 재현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도 있다.
두 전투는 각각 의의가 있었다. 이산들와나 전투가 영국군의 초기 공세를 완벽히 돈좌시키고 전쟁주도권을 줄루쪽으로 넘겼다면,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는 멘탈이 나갈 뻔한 영국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로크스드리프트 참전자들에게 '''13개의 빅토리아 훈장'''을 포함하여 다수의 훈장이 수여되었고, 언론에서는 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여론은 이산들와나의 복수를 외치며 들끓었고, 여론의 압력을 받은 정부와 의회는 일각에서 제기된 전쟁포기론을 기각하고 대대적인 증원을 결의한다.
또한 두 전투 모두 전개 과정이 극과 극인데 이산들와나 전투에서는 분산된 영국군 병력들이 숫적 우세를 점한 줄루군에게 대항하다 탄약이 부족한 사태에 처했는데 탄약을 보급받기 위해 전령을 보내 요청했지만 보급부대는 전장 상황은 상관없이 '''무조건''' 온 순서대로 탄약을 보급하려고 했고 여기에 탄약이 고갈된 일선 병력들이 차례로 격파당했다. 포병이나 기관총 같은 지원화력이 제때 지원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소총도 총알 없는 이상 총검 달고 창 구실이나 하는게 고작인데 이러면 줄루 전사와 비교해 나을 게 없다.
그에 비해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는 소수라도 병력이 한군데 모여 있었고 각종 물품을 이용해 엄폐물을 구축하고 보유한 탄약을 대량으로 불출해 압도적인 열세인 병력 차이를 화력으로 메꿨다. 줄루족도 전쟁 이전부터 도입한 총기가 있고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가 많았지만 사냥이나 개인간 싸움에서나 써봤지 대규모 병력이 운용하는 용도로 활용한 경험이 없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3.2. 영국군의 증원과 전쟁의 종결


이산들와나 이후 줄루군은 승기를 탔으나 공세를 할 역량은 사라져버렸다. 이산들와나-로크스드리프트에서 입은 피해는 약 5천 내외. 승리하긴 했으나 냉병기 위주의 군대로 근대식 영국군 1개 연대를 격멸시킨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3-4월에 걸쳐 영국군 전초기지들을 제거하려 한 줄루군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3월 초만 해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영국군도 충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3월 하순이 되면 로크스드리프트의 재림이 되어 줄루군은 다시 네 자리수의 인명피해를 내고 퇴각해야만 했다.
이후 영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국경으로 일제히 퇴각했고, 6월 본국 증원부대 '''7개 연대'''가 도착하자 전면공세에 돌입했다.
줄루군은 냉병기 군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기습과 매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수도 울룬디에서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결전을 시도했다 줄루군은 영국군에 최소 2배에서 3배의 숫적 우세를 지니고 있었으나 정예병들을 다 초기전역에서 잃었으며 개틀링건과 포병의 화력은 냉병기 위주의 구식군대가 감당할수 없는 것이였다.[3] 줄루군은 포병과 보병의 사격을 뚫고 꽤 접근하는데 성공했으나 포병의 포도탄과 개틀링건에 의해 전열이 붕괴하고 무너진 전열에 영국 창기병대가 돌입하여 대패한다.

4. 전후처리


패전이 확실해지자 줄루족 내 소부족장들이 항복을 청해왔고, 줄루 국왕 세테와요도 저항의지를 잃고 포로로 잡혔다. 영국 원정군은 세테와요의 폐위를 선언하고 본국의 지침에 따라 줄루 왕국을 총 13개 소부족왕국으로 나누어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영국이 전쟁 초기 노렸던 남아프리카 연방의 확대는 이뤄지지 못했다. 1년 뒤 제1차 보어전쟁에서 영국은 이산들와나 저리가라 할 대참패를 겪고 연방 확대를 포기해야 했으며 줄루전쟁 직전 강제병합했던 트란스발 공화국을 불과 2년만에 독립시켜야 했다.

5. 여담


  • 당시 영국에 망명해있던 나폴레옹 3세의 유일한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1856.3.16. ~ 1879.6.1)'가 이 전쟁에서 전사했다. 루이는 일가의 망명을 받아준 영국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영국군에 자원입대하였고, 이산들와나 패전 후 보내진 증원군의 일원이 되었으나 울룬디 전투 이전의 진격 과정에서 정찰작전을 수행중 줄루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문제는 그가 평범한 영국군 장교인줄 알았던 줄루족들이 시신을 처참하게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적의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고 이승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줄루족 나름대로의 고인에 대한 예우였는데 이게 그만 전 유럽의 분노를 사버렸고 이걸 영국이 명분으로 써먹는다(...).
  • 폐위된 줄루국왕 세테와요는 케이프타운을 거쳐 런던까지 끌려간다. 의외로 그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나름 좋은 대접을 받아 빅토리아 여왕을 대면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남아프리카로 돌아가 분열된 정치상황을 바로 잡아 통일된 줄루 왕국을 다시 이룩해야 한다는 본인의 주장은 몇몇 영국 젠트리의 지지와 호응을 받기도 했다. 이후 줄루 영내가 소란스러워지고 소부족들간 충돌이 심해지자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복위되어 줄루에 돌아온다. 그러나 복위 후에도 내전에서 패해 영국령 남아프리카로 피해야 했고, 결국 암살자의 피습을 받아 생긴 자상(刺傷)으로 몸져 누웠다 결국 사망하고 만다.
[1] 요즘도 그렇지만 부족 단위가 중심인 아프리카다. 설령 국가가 있더라도 부족국가 개념이어서 명확한 국경이 확실하지 않았던 게 당시 상황이다.[2] 사실 줄루군들은 창과 방패오 주로 무장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총기 또한 다룰 줄 알았다. 약탈로 획득하거나 기타 전쟁에서 유입된 총기를 활용하던 줄루군 병사들은 분명 존재했으며 영화 <줄루>에서도 잠깐 나오는 부분이다.[3] 이때 지휘관인 켈름스포드는 과거 이산들와나에서 바리케이드의 부재가 패배의 원인이라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이번에도 별도의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고 전투에 임했다. 대신 탄약의 보급을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조치하고, 방진을 짜 적의 우회기동을 사전에 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