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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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2차 보어전쟁의 마페킹 포위 때 보어 민병대
1. 개요
2. 배경
3. 제1차 보어전쟁
4. 제2차 보어전쟁
5. 여담


1. 개요


Anglo-Boer Wars.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전쟁들로 1차 보어전쟁(1880년-1881년)과 2차 보어전쟁(1899년-1902년)로 나뉜다.

2. 배경


희망봉 및 남아프리카 지역은 원래 네덜란드 식민지로, 네덜란드가 프랑스 점령하에 들어간 틈을 타 1806년영국이 합병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계속 갈등이 생기자, 영국의 통치를 원하지 않던 원래 이주민들, 즉 보어인들은 영국이 통치하는 지역들을 떠나 새로운 지역들을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케이프 식민지 동쪽의 나탈리아를 개척하려 했으니 이곳도 영국에게 합병된 후 북쪽으로 떠나 남아프리카 공화국 (South African Republic)[1], 혹은 트란스발 공화국 (Transvaal Republic), 그리고 오렌지 자유국 (Orange Free State)을 세우게 된다.
처음에는 영국이 이 두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해주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프리카 지역이 여러 식민지, 아프리카 왕국, 및 공화국들로 나눠진 것이 차후 불안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여겨 북쪽의 두 공화국을 자신들의 케이프와 나탈 식민지와 함께 연방을 만들어 합병을 하려 했다.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북쪽 지역에 다이아몬드이 발견된 것과 베를린 회담 이후 급속히 진행된 아프리카의 분할이었다. [2]
당시 남아프리카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흑인이었지만, 이 전쟁은 주로 백인이었던 보어인들과 영국계 백인들의 싸움이었다. 보어인들의 억압에 대응하여[3] 대부분의 흑인들은 영국을 지지했지만 그들은 전쟁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고, 양쪽 다 공식적으로 흑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군인이나 독자적인 집단으로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양쪽 다 대부분의 노동자 및 비전투 요원들은 흑인들이었고, 결국 2차 전쟁 말기에는 영국 측에서 대략 1만명의 흑인들을 무장한 군인으로서 운용한 것을 인정하게 된다. 다만 이는 영국의 초토화 및 강제수용소 정책으로 인해 지역이 막장화되자 먹고 살기 위해 군대에 지원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다.

3. 제1차 보어전쟁


{{{+1 '''제1차 보어전쟁'''
First Boer War
Die Eerste Vryheidsoorlog}}}
'''날짜'''
1880년 12월 20일 ~ 1881년 3월 23일
'''장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부 지역
'''교전국'''
[image] 트란스발 공화국
[image] '''대영제국'''
'''병력'''
민병대 2000명
식민지 주둔군 3000명
'''결과'''
보어인들의 승리, 트란스발 공화국의 재독립
영국이 합병한 케이프 및 나탈 식민지에서 나온 보어인들은 북쪽으로 나가 1852년에 트란스발 공화국과 1854년에 오렌지 자유국(Oranje Free State)을 세우게 되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이들의 독립을 인정해주었지만 트란스발 공화국에서는 , 오렌지 자유국에선 다이아몬드가 나오기 시작하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어서 1867년캐나다에서 여러 식민지들이 연합하여 연방을 세우는 것이 성공되자, 이와 똑같이 남아프리카 지방의 모든 식민지 및 국가들을 거대한 연방으로 묶어놓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연방을 세우면 영국의 영토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계속 영국에게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보어인들을 강제로라도 끌어들여서 차후 갈등의 요소를 미리 없애려 했다.
다만 이 계획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으니 강제로 합병당하는 보어인들은 물론, 본국령의 케이프 및 나탈 식민지도 이런 조치를 환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연방의 계획된 영토에는 아직 흑인 원주민들, 특히 줄루 왕국이 다스리는 땅도 있었기에 이들과의 마찰도 불가피했다. 이 때문에 런던에 있는 영국 정부는 여러모로 당장 전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지근하게 행동했지만 현지의 영국 관료들은 무력을 동원해 1877년에 트란스발 공화국을 강제로 병합한다. 보어인들은 이런 조치를 내키지 않았지만 옆의 줄루인들과 계속 마찰을 빚고 있는 마당에 영국군을 상대할 능력이 없었고, 이 참에 영국군을 이용하여 줄루인들을 처리하려는 마음으로 일단 지켜보게 된다.
그 이후 1879년에 영국은 줄루 왕국을 침공하여 합병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독립을 원하는 보어인들과의 마찰은 계속되었고, 결국 1880년에 보어인들은 폴 크뤼거를 사령관으로 하여 전쟁을 선포하여 영국군과 전쟁을 치른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1881년 2월 27일에 벌어진 마주바 언덕 전투(Battle of Majuba Hill)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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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서 양 측은 비슷한 400여명끼리 맞붙었는데 결과는 영국군의 참패였다. 영국군은 전사자만 해도 92명, 부상자, 포로까지 전군 절반을 넘었던 반면 트란스발군은 달랑 1명이 전사하고 부상자 5명이었다.
이후 양군은 다시 전투를 벌이는데 트란스발군의 총전력은 3천명 수준이었고 영국군은 1천2백명 수준이었다. 영국군은 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반면 트란스발군의 피해는 41명 수준이었다. 트란스발군의 지휘관은 피트 주베르(Piet Joubert) 대장이었고 영국군의 지휘관은 조지 콜리(George Pomeroy Colley) 소장이었는데 콜리 소장은 전사했다. 1881년 3월 23일 프리토리아 협정을 맺어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재인정했다.
당시 영국 육군은 레드 코트라는 별명답게 전투복이 빨간색이었고 탄입대나 방서 헬멧, 각종 장구류도 옛날 그대로 눈부신 하얀 색이라 딱 표적처럼 보여서 저격하기 좋았다고 한다. 다만 모든 부대가 빨간색 복장은 입은건 아니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부대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1차 보어전쟁 당시 빨간색 옷을 입은 부대가 사상자를 많이 내자 군복과 위장의 중요성이 더욱더 부각되었다.
영국에서 만든 영화 마주바 전투에서도 이런게 확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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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배치된 영국군은 척 봐도 잘 드러난 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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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스발 측은 언덕에 숨으면 잘 안 보이던 옷차림이 많았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카키색 군복을 입은 게 바로 스코틀랜드 부대인데 전통 옷차림인 킬트를 입고 전투에 나섰다.
덕분에 영국군은 현지에서 노획한 커피나 홍차 보급품 등으로 장구류를 갈색으로 물들이느라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물론 그들을 기다리는 건 꼰대 장교들의 채찍이었다.

4. 제2차 보어전쟁


{{{+1 '''제2차 보어전쟁'''
Second Boer War
Die Tweede Vryheidsoorlog}}}
'''날짜'''
1899년 10월 11일 ~ 1902년 5월 31일
'''장소'''
트란스발 공화국
'''교전국'''
대영제국 / 영국령 남아프리카 / 로디지아 /
영국령 인도 제국 / 영국령 실론 /
오스트레일리아 / 뉴질랜드 / 캐나다
오렌지 자유국
트란스발 공화국
다국적 의용군
'''병력'''
450000명
70000명
'''결과'''
영국의 승리
국가 차원은 아니지만 트란스발 공화국을 지원한 해외 자원참전병들도 있었다. 네덜란드가 2천명, 독일 제국이 550명, 프랑스 제3공화국이 400명, 미국이 300명, 이탈리아 왕국이 250명, 러시아령 폴란드가 225명, 영국령 아일랜드가 200명, 스웨덴-노르웨이에서 150명, 러시아 제국에서 100명 정도가 보어인들을 지원해 참전했다. 일부 호주인들도 보어를 편들어 참전했다.
2차 보어전쟁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발생했다. 20년 전의 전쟁과 달리 금광 등의 이유로 더 많은 영국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유입되었고 요하네스버그 등에서는 영국인과 영국이 데려온 인도인 등 외국인들이 보어인들보다 더 많아지기도 했다. 이들은 주류세력인 보어인들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이를 구실로 세실 로즈 등의 제국주의자들은 보어 정부를 뒤엎을 쿠데타 등을 꾸미기도 했다. 1895년에 일어났던 제임슨 습격 사건(Jameson Raid)이 그 대표적인 예. 하지만 로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준비되어 있던 요하네스버그'는 결국 봉기하지 않았고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덕분에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직을 사임하게 되었지만,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독일 제국카이저 빌헬름 2세는 이 쿠데타 시도를 두고 크뤼거 대통령의 성공적인 방어를 치하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이가 바로 크뤼거 전보(Kruger Telegram) 사건이다. 전보가 더 타임스에 실리자 영국인들은 즉각적으로 반독감정의 물결을 형성했으며 심지어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마저 이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1899년 9월에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에게 영국인을 트란스발의 자국민과 평등히 대하라는 내용의 전언을 보내나 트란스발은 케이프 등에 주둔한 영국군에게 48시간 내에 퇴각하라고 답했다.
(영국이 알아서 기라는 최후통첩을 날리자 케이프에서 꺼지라는 최후통첩으로 응수한 보어의 패기가 엿보인다)
1899년 10월 12일 보어인들은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등을 공격했다. 전쟁 초반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으며 특히 12월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의 주요 전략은 전열을 갖춘 보병들의 횡대 전략이었는데 보어인들은 민병대 위주의 기병부대여서 진형을 짜지 않고 영국군에게 접근해서 지형을 이용한 기습을 가했다.[4] 12월 10일 슈토름베르크(Stormberg) 전투에서 영국군은 오렌지 자유국군과 충돌하여 135명이 전사했고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12월 11일엔 1만4천명의 영국군이 킴벌리 공략을 펼쳤으나 참호를 파고 대기하던 보어군에게 당해 120명의 전사자를 냈다. 12월 15일 콜렌조(Colenso)의 피해는 막대했는데 2만1천명의 영국군이 레이디스미스(Ladysmith)를 탈환하기 위해 투겔라(Tugela) 강을 건너던 중에 포격 등에 노출되어 1127명이 전사했다.
이 일로 영국에선 대규모 애국주의 광풍이 불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 후기에 이르러 영국은 미국독일 제국의 등장으로 차차 쇠퇴해가던 시절이었는데 그 반작용으로 보어전쟁엔 엄청나게 관심이 집중됐다. 말하자면 미국한테 밀리고 독일한테 밀릴지언정, 보어한테만은 그럴 수 없다는 위기감이었다. 브리튼 본토의 요맨까지 징집하는 반 총력전 태세을 갖춘 영국은 1900년이 되자 영국은 대규모 물량공세 펼친다. 브리튼에서 온 대규모 즈원군이 케이프타운에 상륙, 3로 공세를 펼치며 대영제국이 진지하게 제대로 나섰으니 이제 보어느 끝장이다...라는 기세도 잠시.
3곳 모두에서 패배한다.
1900년 1월 영국군은 스피온 콥 전투(Battle of Spion Kop)에서 대패했다.[5] 당시 영국군의 지휘관은 찰스 워렌이었는데,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영국 왕립군사학교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찰스 워렌은 유명한 잭 더 리퍼 사건 당시 런던 경찰 총책임자였는데 이 때도 엉터리 같은 행동으로 수사에 지대한 어려움을 끼쳤다. 결국 이런 비난 속에 1905년 해임되어 한직이나 돌아다니며 3년 뒤 사임하고 이후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벌이고 책(자서전이라며 지가 벌인 실책을 변명하던)이나 쓰다가 삶을 마감했는데 192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장수했다.
이 전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 산이 아닌가봐"'''로 정리할 수 있다. 찰스 워렌은 위에 언급한 레이디스미스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인 스피온 콥을 확보하도록 했다. 병력이 야간에 안개를 틈타서 산을 올라서 진지를 펴고 보니 정작 스피온 콥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고, 그곳은 보어군의 포병 부대[6]가 사전에 조준하고 있던 곳이었다. 독일제 화포로 무장한 보어군 부대는 영국군에게 포격을 가해서 큰 피해를 입혔는데 이 화포는 신형 무연화약을 사용해서 발사시 연기가 나지 않아 영국군은 화약 연기를 이용해서 좌표를 추적할 수 없었고, 결과는 일방적인 포격전으로 흘러갔다. 금과 다이아몬드 등을 독일산 무기 사는데 탁탁 털어넣은 결과였다.
이 와중에도 워렌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 이 당시 일화로 종군 기자이자 경기병 연대의 장교로 참전했던 윈스턴 처칠이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는데 뭐라도 하셔야죠."라고 말하자 워렌은 쓸데없이 간섭한다며 처칠을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결국 우군인 스코틀랜드 여단의 우회 공격과 탄약 부족으로 보어군이 슬슬 철수하려 할 즈음에야 워렌은 병력을 철수시킨다. 이 당시 보어군의 피해는 전사자 68명, 부상자 267명인데 반해 영국군은 전사 243명, 부상자 1,250명으로 영국군의 완패였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잊지 못한 처칠이 신나게 기사를 써 워렌의 무능이라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도하여 워렌은 무진장 욕먹고 군직에서 잘려 경찰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찰스 워렌에 관한 위의 기술은 주의를 요한다. 첫번째, '이 산이 아닌가봐' 라는 식으로 전혀 엉뚱한 고지로 올라갔다고 주장하지만, 영문위키의 설명을 보면 찰스 워렌의 영국군은 야간에 제대로 Spion Kop 을 올라갔고 그곳을 지키는 보어인 민병대를 기습 공격으로 밀어내고 점령했다. 문제는 영국군이 실제로는 Spion Kop 의 일부, 그것도 보어인 민병대의 사격에 노출되는 높이가 낮은 일부만을 점령했지만, Spion Kop 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착각했던 것이 실수였다.[7] 그것도 엄청난 실수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Spion Kop 전투가 벌어진 때는 지금으로부터 100 년도 더 넘은 정확하게 1900 년이었다. 오늘날처럼 GPS 나 야간 조명탄 같은 것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당시 시대나 상황을 고려하면 지도가 준비되어 있을리도 만무했다.(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현지 가이드의 인솔 혹은 기껏 정찰병이 스케치한 조잡한 지도에 의존해서 싸워야 했다.) 게다가 Spion Kop 점령 자체가 야간에 기습 공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햇불 등으로 시야를 충분히 밝힐 수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Spion Kop 점령을 이끈 사람은 찰스 워렌이 아니었다.''' 찰스 워렌은 사단장(중장)이었는데 사단장이 직접 점령을 이끌었겠는가? Spion Kop 점령은 찰스 워렌 휘하의 Edward Woodgate 소장이 이끄는 부대가 맡았다. 이런 사실 관계를 싹 빼고 무능한 찰스 워렌이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병력을 이끌고 올라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명백한 악의적인 왜곡이다. 두번째, 윈스턴 처칠이 보다못해 한마디하자 찰스 워렌이 처질을 끌어낸 일은 욕먹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윈스턴 처질은 애초에 민간 특파원으로 남아프리카에 왔고, 1900 년에야 현지에서 장교로 입대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높은 계급이 아닌 중위 계급이었다. 전투 경험도 거의 없는 기껏 연락 장교 역할을 하고 있던 새파란 중위 따위가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사단장(중장)에게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 아닌가? 찰스 워렌이 무능하니 어쩌니 해도, 이걸(그 일화가 사실이라면) 찰스 워렌을 비난하기 위한 근거로 쓴다는 것은 잘못이다. 세번째, 물론 찰스 워렌이 무능력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애초에 실제 전쟁에서 지휘 경험이 거의 전무한 찰스 워렌에게 중책을 맡긴 것부터가 영국의 실수. 또한 찰스 워렌은 Spion Kop 의 영국군을 과감하게 철수시킨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양동작전을 펴면서 Spion Kop 을 완전히 점령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소극적으로 지원 병력을 Spion Kop 으로 올려보내기만 했고, 그 결과 불리한 상황에서 교전을 지속했던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이게 찰스 워렌의 진짜 잘못 중 하나다.) 하지만 찰스 워렌이 Spion Kop 전투 몇 개월 후 본국으로 소환당한 것이 단지 무능이라고 하기에는 2 차 보어 전쟁 초반 영국군의 삽질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Magersfontein 전투에서는 Lord Methuen 은 정찰이 제대로 되지 못했음에도 당연히 보어인 민병대는 Magersfontein 언덕 정상에 있겠거니 하면서 공격을 밀어붙였고, 새벽 공격을 위해 야간에 밀집 대형으로 이동하던 영국군은 언덕 초입에 매복한 보어인 민병대의 포화에 노출되면서 시작부터 공격 부대 지휘관 Andrew Gilbert Wauchope 소장이 전사하는 개망신과 참패를 겪었다. 찰스 워렌의 무능이 Methuen 의 무능보다 더 나빴나? 글쎄. 하지만 Methuen 은 안짤렸다. 이것만 보더라도 찰스 워렌이 짤린 것은 단순한 무능 때문이 아니라, 실전 경험이 부족한 찰스 워렌의 백그라운드 약점, 상관인 Redvers Buller 와의 불화, 처칠이 언론을 통해 일으킨 비난 여론에 대한 희생양으로 던져주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잭 리퍼 사건 오명, 하지만 잭 리퍼 사건에서도 찰스 워렌은 할만큼 했는데 범인이 안잡혀서 그냥 욕받이 무녀가 된 것에 가깝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작성자 노트; 위 찰스 워렌에 관한 서술을 사실 관계에 맞게 중립적으로 고쳐쓴다면 이 단락은 삭제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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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반격하는 과정에서 영국군들은 보어인 게릴라가 발붙일 곳을 없애기 위해 집결캠프(강제수용소)를 세워 12만명의 보어인을 강제 수용했는데(당연히 원래 보어인들이 살던 집과 농장은 불태웠다), 이 아이디어(?)는 뒷날 나치 독일아우슈비츠에서 활용하게 된다.(인종간 결혼 금지법을 미국에게 배웠듯, 게르만은 앵글로색슨에게 여러모로 많이 배웠다) 강제수용소에서 27,927명의 보어인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이 중 22,074명은 16세 이하였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흑인들도 14,154명이 기아로 사망했는데 보어인들에게는 영국을 편든다는 이유로, 영국군에게는 보어인들을 편든다는 이유로 동네북, 혹은 고래싸움의 새우등 신세로 죽어나갔다. 사진 촬영 후 바로 사망한 보어인 소녀. 보기에 따라 끔찍하니 클릭시 주의할 것. 이 때문에 이 강제수용소를 두고 최초의 조직화된 학살이라 보기도 한다. 영국 본국에서조차 같은 기독교인 백인을 이렇게 죽이냐며 반발이 많았다. 이런 반발 속에서 영국군을 옹호하는 글을 쓴 게 바로 아서 코난 도일이었다.
1900년 9월에 이르러 영국은 트란스발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보어인들은 게릴라전으로 맞서게 된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초토화 작전으로 나간다.
1902년 5월에 보어는 항복하고 두 공화국은 소멸하여 남아프리카의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영국은 승리하긴 하였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강제수용소와 초토화 작전으로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당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많이 상실했고 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동맹국으로 삼아 영일동맹을 맺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당시 한반도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었다.
트란스발 공화국의 폴 크뤼거 대통령은 1900년 유럽으로 떠나 보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트란스발로 돌아오지 않고 망명했다. 1904년 78세의 나이로 스위스에서 사망한 후 그의 시체는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프라토리아에 묻혔다.
영국은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땅 전체를 영유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 때 보어인들의 저항에 질려 1910년에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땅을 자치령으로 지정하고 남아프리카 연방을 출범시켜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내정을 완전히 위임했다.

5. 여담


  • 아서 코난 도일이 육군 군의관으로 2차전쟁에 참여했는데, 이 전쟁은 외국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았지만 코난 도일은 애국심을 호소하는 글을 기고하며 전쟁을 정당화했다. 코난 도일은 1902년 6월 26일 기사작위(Knight Bachelor) 대상자로 지명됐는데(1902 Coronation Honours), 코난 도일 본인은 보어전쟁에 대한 정당화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수필인 <남아프리카의 전쟁: 원인과 행위(The War in South Africa: Its Cause and Conduct)> 집필이 서훈에 주효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만 당시 관보에는 서임된 이유(citation)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해당 연도에 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썼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셜록 홈즈 시리즈 저자로서의 공헌도 종합적으로 고려된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 보이스카우트를 창설한 베이든 포우엘 경이 이 전쟁의 참가자였다.
  • 윈스턴 처칠도 종군기자로 2차 보어전쟁에 참전해 보어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쓴 책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이듬해에 하원의원으로 정계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 처칠의 전기 영화인 젊은 날의 처칠에서도 나름 심도있게 그리고 있다. 영화 내용은 당연히 처칠 찬가(...).
  • 나치 독일 시대에 나온 크뤼거 아저씨라는 영화가 보어전쟁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보어전쟁 후 망명한 크뤼거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보어전쟁을 회상하는 형식인데, 영국은 망해가는 제국주의 국가에 인종말살정책, 멸절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는 천하의 개쌍놈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금광 운영권을 위해 쿠데타를 획책하는 세실 로즈,[8] 중증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는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쿨하게 피수용자를 학살하는 수용소장[9]의 연기가 일품인 작품. 이 영화는 2차 매체 발간이 금지되어 있고 지금도 상영회 때 상당히 엄격한 신원조사를 하고 있다.
  • 이 전쟁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서는 한동안 친척뻘 민족이라며 보어인들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이 크게 일었으며 이는 2차대전 당시 나치 부역자들이 생기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2차대전이 끝나고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이 도를 넘게 되자 네덜란드 여론은 다시 적대적으로 선회했다.
  • 영국군은 전쟁 중 눈에 띄는 레드 코트를 버리고 카키색 전투복을 입고 싸웠다. 다만 장구류가 흰색이라 시망. 그래서 영국군은 커피나 홍차 찌꺼기를 구해서 염색하려고 혈안이었는데 영국군에도 똥별이 있었는지 검열 때 걸리면 채찍형이었다.
  • 보어전쟁에서 영국군은 산업혁명 이후 비참해진 영국 하층민들의 생활상 때문에[10] 징병 연령대의 청년들이 신체적 결함이 속출하여 전쟁터에 투입할 인원을 모집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차후 유럽 경쟁국들과의 전쟁에서 병사들의 질적 차이로 질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층민들에게 충분하게 식료품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지원해 주거나 아예 급식을 제공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시각에 따라서는 이 정책을 현대의 국가 주도 복지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 아일랜드인들이 마치 태평양 전쟁에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억지로 싸웠듯이 이 전쟁에 강제 징용되어 억지로 싸웠다.
  • 로런스 오츠는 매우 촉망받는 뛰어난 장교였으나 이 전쟁에서 절름발이가 되는 중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퇴역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로버트 스콧의 휘하에서 탐험대원이 되었다. 하지만 남극의 혹한의 추위와 영양 부족 속에서 그가 전쟁에서 입었던 상처가 악화되어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 되었고 탐험대 전체가 자신 때문에 뒤쳐질 위험에 처하는 것을 막고자 스스로 죽음을 각오하고 대열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탐험대 전체가 사망했으며 오츠의 시신은 10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
  • 한국에도 정발된 '어느 멍청한 소대장의 작전 이야기'가 보어전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병 소대장, 중대장이 배울 만한 전술서이다. 다만 출판된지 시간이 지나서 현재 서점에서 절판이라 중고 책방으로 구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이 책을 쓴 저자는 바로 스윈튼 소장으로 영국의 전차 개발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 이때 당시 조선에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도 언급되어있다. '보어인들의 강한 저항에 감동한 영국이 그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더라' 라고 소개해놓으며 위정척사파들에게 짐승이라고 배척받는 서양에서도 제 나름대로의 도덕과 의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개하였다.[11]
  • 한 전쟁사 덕후가 보어 전쟁에 관한 영어 원서를 읽고 이를 번역 & 요약해 놓은 보어 전쟁 연재글이 있으니, 이 나무위키 페이지에서도 충분히 서술되지 않은, 보어 전쟁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의 전체적인 진행 경과에 관심있는 사람은 참고하길 바란다.
[1]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Republic of South Africa)과는 다르다 [2] 영국은 이 때 이집트 카이로부터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까지 연결하려는 아프리카 남북 종단정책(Cape to Cairo Line)를 실행시키려고 노력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의 횡단정책과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3] 보어인들은 대부분 백인 우월주의자들이었고, 다른 유럽 국가의 식민지를 빼앗음으로 현지 아프리카인들과 어느 정도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던 영국과 달리 그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선 끊임 없이 원주민들과 싸웠어야 했다. 보어인들도 나중에 폐지하였지만, 처음에 영국 땅을 떠나 새로 개척하려던 것도 노예제의 폐지에 대한 반발심도 컸다.[4] 특히 보어인들은 게릴라 저격전술로 영국군을 사냥했다. "저격수 보이지 않는 공포"에 해당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5] 리버풀의 서포터즈 이름 '콥'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유는 이 전투에서 리버풀 출신 병사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6] 보어군은 특성상 민병대의 비율이 높아서 군복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 포병부대는 보어군 부대 중 유일하게 전 장병이 제복을 제대로 갖춘 부대였다.[7] As dawn broke, the British discovered that they held only the smaller and lower part of the hilltop of Spion Kop, while the Boers occupied higher ground on three sides of the British position.[8] 이 영화에서 세실 로즈로 나온 독일 배우는 나치 선전영화 '유대인 쉐스'에서 인간말종 유대인으로 열연했다.[9] 윈스턴 처칠과 대단히 비슷하게 생긴 배우가 나왔다.[10] 심하면 소총조차 제대로 못드는 수준이었단다. 그 당시 소총이 5kg 언저리로 현대 돌격소총들보다 좀 무겁긴 했지만 5kg 짜리 몽둥이도 제대로 못들 정도의 저질 체력들이 대부분이라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었다는 말.[11] 위정척사파들은 서양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는 했지만 그들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만국공법(=국제법)을 보고 감탄하여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쓰거나 의병을 일으킬 때도 서양 무기의 위력은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에서 서양인이 공격당하는 일도 동시대 일본이나 청나라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