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3세

 



'''Napoléon III'''
'''본명'''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
(Charles-Louis-Napoléon Bonaparte)
'''출생'''
1808년 4월 20일
프랑스 제국 파리
'''사망'''
1873년 1월 9일 (64세)
영국 잉글랜드 켄트 치슬허스트
'''신체'''
'''160cm'''[1]
'''재위'''
프랑스 제국의 황제
1852년 12월 2일 ~ 1870년 9월 4일
'''재임'''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1848년 12월 20일 ~ 1852년 12월 2일
'''정당'''
보나파르트파
'''배우자'''
외제니 드 몽티조 (1853년 결혼)
'''자녀'''
루이 나폴레옹(속칭 나폴레옹 4세) 외 사생아들
'''아버지'''
루이 1세(1778 ~ 1846)
'''어머니'''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1783 ~ 1837)
1. 개요
2. 가족
3. 정계 진출
4. 프랑스 황제
4.1. 뛰어난 내치
4.2. 제국주의적 외치
5. 보불전쟁과 몰락
6. 평가
6.1. 인간적인 매력: 파시즘의 효시
6.2. 내치
6.3. 식민지 정책
8. 가족과 후손들
8.1.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
8.2. 외제니 황후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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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국은 곧 평화다.(L'empire, c'est la paix.)

- 1852년 보르도 연설에서[2]

본명은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Louis-Napoléon Bonaparte).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3]'''이자 '''마지막 군주(이자 황제)'''라는 매우 아이러니한 타이틀의 소유자. 그리고 보나파르티즘의 충실한 계승자이자 사실상의 창시자. 그의 치세는 근대적 독재자의 선례를 만들었다.[4] '''최초의 근대적 독재자'''라고 평가 받기도 한다.
대통령 취임 당시 40세로, 2017년 프랑스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이 39세의 나이로 당선되기 전까지는 프랑스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었다.
보통 큰아버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키가 작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나폴레옹의 키는 당대 평균보다 오히려 약간 컸고[5], 진짜로 키가 작은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 3세. 키가 불과 160cm 였다고 한다. 덕분에 큰아버지인 나폴레옹이 키가 작다는 루머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2. 가족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의 의붓딸 오르탕스와 결혼하여 얻은 아들이다. 오르탕스가 바람 피워 낳은 사생아라는 주장도 있으나 증거 부족으로 공인받지는 못하고 있다. 이런 의혹에 대해서는 아래 출생의 비밀 항목을 참조.
루이 보나파르트는 아내인 오르탕스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오르탕스가 남편과 별거하게 된 후 애인이던 플라오 백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샤를 드모르니(Charles de Morny)인데, 그는 정치가로 활약하며 이부형의 집권에 큰 도움을 주었다.

3. 정계 진출


루이필리프 치하에서 몇 차례 반란을 기도했다가 실패하여 수감되었다. 그 후 탈출하여 해외를 떠돌면서 잉여로운 인생을 살았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수립되자 갑툭튀하여 '나폴레옹주의의 계승자', '프랑스의 영광의 재현'을 내걸고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보통선거에서 70%가 넘는 지지율로 대통령이 된다[6]. 그의 득표 가운데 3분의 2 가량은 보수세력의 텃밭이었던 소농들에게서 나왔으며, 2월 혁명 당시 사민주의 이념에 기반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창하였다가 부르주아지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진압당한 노동자들 역시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그에게 몰표를 던져주었다.
그의 대통령 임기 동안, 그의 정적들 대부분은 그를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에 의지할 뿐인 얼간이 정도로 생각했기에 갈수록 황제처럼 변하는 그의 언행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헌법 개정을 통한 중임을 시도했으나 의원의 3/4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1850년 국민의회가 300만 명에 이르는 빈곤층 유권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병크를 터뜨려 지지가 떨어지자 이들로부터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임기 마지막 해인 1851년 삼촌처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국민투표로 황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한다. '''그의 쿠데타는 친위 쿠데타의 전형이 된다.'''

4. 프랑스 황제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삼촌의 이름을 팔아 이를 진정시키고, 제국주의 시대에 걸맞는 확장정책을 펼쳤다.

4.1. 뛰어난 내치


그가 집권한 19세기 중반은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당장 반세기 전 의 목을 자르고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짓밟아 제국을 세웠으며, 이 여파로 인해 왕이 계속 바뀌었다.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1832년으로, 정치적 혼란 속에서 민생이 바닥에 떨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삼촌의 이름을 팔아 높아져가는 각 세력간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파리혁명에 동참하기는 커녕 무엄하다며 왕당파의 편에 서던 대부분의 지방세력들에게 나폴레옹의 이름값은 상상 이상이었고,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과 왕당파들의 불만은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 잠재워질 지경이었다.
그는 같은 시기 그의 정적이었던 비스마르크와 유사하게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심을 부추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1851년 공휴일 및 주말 작업금지제도, 1852년 공공부조제도, 1855년 빈곤층 무료급식제도 등을 도입하였다. 또한 1860년을 기점으로 그는 그의 제정이 충분히 안정되었음을 느끼고 1864년 결사, 쟁의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1868년 집회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나폴레옹 1세백일천하 당시 약조한 '자유 제정(帝政)'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제롬 보나파르트가 추진하던 '민주적 보나파르티즘'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앞선 정책들에 더해 시민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젊을 적 런던에서 생활하였는데, 이때의 런던은 파리보다 발전된 근대도시였다. 이에 런던을 동경하여 혼란스럽고 전근대적이던 파리를 런던보다 더 근대적인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을 파리 지사로 임명하고 1853년 '파리 개조 사업(Transformations de Paris)[7]을 실시하였다. 우리가 오늘날 익숙한 파리의 거리의 모습은 대부분 이 시기에 설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도시 전체를 개조하는 대사업을 통해 가도를 넓히고 공공위생의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막강한 황제의 재가 아래 거의 전권을 쥐고 도시를 재설계한 오스만 남작의 설계는 21세기인 지금도 큰 문제나 변화 없이 굴러가는 파리의 모습을 만들었다. 이외에도 거리의 가스등, 에투알 광장, 생어거스틴교회 등이 그의 치세에 세워졌다.
그의 치세에 정치의 안정 및 각종 개혁에 더불어 자본주의 역시 발달하였는데, 1865년에는 수표 사용, 1863년 유한책임회사제도, 1867년 유한회사제도를 승인하였다. 각종 해운회사가 설립되고 대형 백화점(르봉마르셰, 쁘랭땅)을 설립되는 등 다양한 발전성과를 보였다.
상기한 노동인권의 성장에 더불어 프랑스 여성인권 역사상으로도 괄목할만한 성과들이 많다. 1861년 여성 최초로 바칼로레아 입학생이 생겼으며, 1866년에는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의약학대학에 여성입학생이 생겼다. 인구 500명 이상인 지자체에는 여성 교육을 위한 여학교를 개교할 것을 명령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근대의 산물인 철도, 전신, 차도, 하수도, 가스등, 근대항구등을 설치, 정비하였다. 수치상으로 철도총연장 13,000km 설치, 차도설치 총연장 3배 증가, 전신 설치총연장 40,000km, 하수도 설치 총 거리 340km 등.

4.2. 제국주의적 외치


강력한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펴 베트남 침공, 제2차 아편전쟁, 병인양요, 크림 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 등을 치렀다. 1858년에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 무관심한 것 때문에 로마에서 분노한 암살자들의 폭탄 공격을 받았으나 경상으로 목숨을 건진 오르시니 사건이 일어났다. 한편 주범 펠리스 오르시니는 체포된 후 황제에게 감화되었고 나폴레옹 3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적극적으로 이탈리아 통일 문제에 신경 쓰게 된다.
1864년에는 멕시코에도 개입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대공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추대하여 친프랑스 멕시코 제국을 세우려 책동했다.
북아프리카-중동에서는 이집트에 적극 진출하고 남미에서는 안데스 산맥 일대를 통괄하는 친프랑스 국가를 세우려 하는 등의 확장책을 펼쳤으나 대부분의 경우 다른 열강들과의 갈등이나 황제 개인의 허영으로 인해, 대부분의 해외 원정에서 프랑스군이 크게 선전했음에도 결국 실리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는 사르데냐를 지원해 안시니스 등의 사보이 지방의 영토를 획득했고[8]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는데 이게 그나마 제대로 된 대외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9] 남북전쟁 때 목화 때문에 잠시 남부를 승인하는 듯 행동했지만, 공식적으로 승인한 적은 없었다.
외교 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큰아버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실패한 원인이 영국을 적대한 것에 있다고 보고 영국과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서유럽의 양대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경쟁과 갈등이 없어질 수는 없었지만, 아편전쟁이나 크림 전쟁 등에서 그런대로 협조가 가능했고, 이것만으로도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프랑스가 베트남 등으로의 확장을 시도할 때도, 영국은 촉각을 곤두세우기는 했지만 강하게 제동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이는 당시 프랑스의 확장이 영국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벨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의 주요 유럽 국가와 자유 무역을 위한 관세 협정을 맺어 무역을 크게 증진시키기도 했다.
심지어 조선에도 집적거렸다. 엄밀히 말하면 1846년의 개항 요구는 루이필리프 시절이니까 최초는 아닌데, 1866년의 '''병인양요'''가 그의 치세에 벌어졌다.
해군의 전략적 지위를 인정하고 체계적인 해군 증강계획을 세워 세계 최초의 철갑함과 증기추진 전함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한때는 건조 중인 것을 포함하여 전열함 51척(그 중 범주함 37척, 스크류함 14척), 프리깃함 82척(범주함 40척, 스크류함 23, 외륜함 19척), 코르벳함 38척(범주함 18척, 증기함 20척)을 주력으로 하는 336척까지 도달했고, 이러한 막강한 함대를 바탕으로 프랑스는 18세기 이후 다시 한번 영국 해군과 경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부르봉 왕조의 후계가 끊기자[10] 발생한 스페인 왕위 계승문제에서 노련한 프로이센 왕국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끌려다니는 외교로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여기에 멕시코 원정의 실패와 병환의 악화로 나폴레옹 3세는 1860년대 후반부터 입헌 군주로의 변혁을 꾀하고 권력을 하나둘 포기하기 시작했다. 보불전쟁 직전 즈음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황제의 손을 떠난 상태였고, 실권은 의회가 쥐고 있었다.
그럼에도 라인강 소(小)라인란트, 자를란트, 팔츠 지방 란다우룩셈부르크[11], 벨기에를 집어삼키려 집적거렸으나 이는 영국을 자극해서 영국의 여론이 친프로이센으로 기울어 프로이센에 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삽질이었으며 결정적인 패착으로 꼽힌다. 프랑스 여론이 비스마르크에게 거하게 낚여 1870년에 보불전쟁을 개전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으며 이로 인해 완전히 망했다.[12]

5. 보불전쟁과 몰락


백부 코스프레를 하면서 직접 전선으로 출전했으나 그의 군사적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다. 군데군데 들리는 포성과 함성 소리, 병사들이 죽어가는 소리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보다 못한 측근들이 얼굴에 혈색이 돌게 보이게끔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라고 조언할 정도였다. 여러 차례의 삽질 끝에 스당에서 프로이센군에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는데,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한 채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포탄이 쏟아지는 프랑스군 진지 내를 정처없이 걸어다닐 뿐이었다. 그를 수행하던 장교 하나는 포탄에 맞아 죽었고 옆에 있던 군의관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고 한다.

이 인간이 여기에 자살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대체 뭘 하러 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전 내내 어떤 명령도 내린 것이 없다.

결국 1870년 9월 1일 오후 항복하여 프로이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소식에 파리에서는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황제는 폐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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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빌헬름 캄프하우젠(Wilhelm Camphausen) 작품,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포로로 잡힌 나폴레옹 3세
독일 카셀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복귀를 꿈꾸었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첫 총선거에서 보나파르트파가 완전히 몰락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1871년 3월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후 권좌를 되찾기 위해 지지자들을 모아 쿠데타를 다시금 계획했지만 1873년 1월 요로결석[13] 제거 수술을 받은 후 죽었다. 프랑스에서 1만 명 이상의 조문객이 와 옛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유해는 당초 망명지인 틸즈허스트의 마을묘지에 묻혔지만, 1887년 빅토리아 여왕의 배려로 햄프셔 북동쪽 판버러(Farnborough)에 있는 세인트 미카엘 수도원(St Michael's Abbey)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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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 주치의와의 대화가 '''스당 전투에서 자신은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내용이었을 정도로 죽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겁쟁이로 매도당하는 걸 마음에 두고 있었다.
집권 기간이 더 긴데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1세에 비해 인지도가 매우 떨어진다. 그가 죽자 공화국으로 돌아온 프랑스는 그에게 아첨하던 인물들을 대거 숙청했는데 그 중 한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쏴죽인 조르주 당테스였다. 나폴레옹 3세를 지지하여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그의 폐위와 몰락 이후 숨어서 살며 20년 넘게 비참하게 살다가 83세인 1895년에 쓸쓸하게 죽었다.

6. 평가


나폴레옹의 가장 큰 치욕은 워털루 전투 패배도 아니고 세인트헬레나에 유배된 것도 아니다. '''어릿광대가 그의 이름을 빌려 권좌에 오른 일이다.'''

빅토르 위고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희극으로'''. 한 무리의 병정들에 둘러싸여 있던 1804년의 꼬마 하사관 다음에는 한 무리의 부르주아지에게 둘러싸인 1851년의 콧수염쟁이.

카를 마르크스

그의 큰아버지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수많은 전공과 치적을 이루며 황제로서의 위업을 세웠다면, 나폴레옹 3세는 쿠데타로 전권을 장악하고 국민투표란 정치적 수단을 강요했다. 당연하지만 지식인과 급진 사상가들에게 이는 치욕적인 일이기에 [14]반대하는 소요를 일으켰으나, 나폴레옹 3세에게 손쉽게 진압당했다. 1852년~1870년 사이 나폴레옹 3세는 큰아버지를 본받아 외치에 신경을 기울여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샤르데냐 왕국을 도와 오스트리아 제국을 굴복시켰고, 이 과정에서 사보이와 니스를 얻었다. 크림전쟁에서 러시아의 양보를 얻어냈으며,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했다. 또한 청나라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에 진출해 프랑스의 위력을 외견상으로 보였으며 비록 큰 실패로 끝났지만 멕시코 원정도 시도했다.
국내에서도 시운의 상승을 맛봤는데, 알래스카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결과 프랑스의 경제활동이 자극되어 성장세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19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번영, 자신감, 그리고 정치적 무관심을 특징으로 갖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소규모 자영농과 가톨릭교, 기업가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만들어 세력을 넓혔고, 수도 파리를 새롭게 단장하기 위해 수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파리를 다시금 유럽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권위주의와 개인의 매력에 의한 성과였을 뿐, 강력한 체제로 이어지지 못했다. 1860년 노동자들은 영국에서 노동조합운동의 방법을 배워와 국내 노동운동 활성화를 일으켰고, 이는 기업가들이 나폴레옹 3세에 대한 지지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1860년대에는 황제의 추문이 폭로되어 인기를 떨어뜨렸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노동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1864년 노동자들에게 파업권을 부여하고, 1868년 노동조합 조직을 허락했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선거에서 반 나폴레옹계 의원들이 진출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센의 도발이 터지자 전쟁을 감행한 나폴레옹 3세는 그 패배로 인해 퇴위를 하게 된다.

6.1. 인간적인 매력: 파시즘의 효시


인간적인 매력은 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 아편"이라는 별명까지 있을 정도로 사람을 끌어들이는데 능란했고, 호기심 또한 왕성해서 보나파르트주의를 내세워 제정을 다시 세운 주제에 사회주의에까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15][16]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자신의 남편인) 앨버트 공 다음으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평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국정 운영 능력은 썩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순수한 정치력, 즉 인기를 확보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능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추측되며, 특히 대중 정치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꼽기도 한다. 농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가 정적으로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을때 이를 돌파하는 수단으로 가장 애용한 것은 국민투표였다. 그래서인지 에릭 홉스봄은 저서 <자본의 시대>에서 이 사람을 샤를 드골의 선배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물론 비꼬는 사람 중에는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는 부자의 재산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가난뱅이들로부터 그들의 재산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 또한 최근 들어와서는 수정주의 계열 역사학자들로부터 추후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에 최종적으로 프랑스에 정착하는 민주주의를 견습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그가 국가주의자들에게는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약속하고, 부자들에게는 안전을 약속하고, 왕당파에게는 자신 역시 군주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노동자들에게는 공정한 분배를 약속하고 농민들에게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동시에 가부장적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약속함으로써 지지를 얻어냈다"고 하면서 그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서술한 바 있다. 즉, 다양한 욕망을 가진 집단들에게 (실제로는 그 모든 약속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했음에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것이라고 약속하고, 믿게 만들 수 있었다는 것. 강렬한 카리스마와 대중적 호소력을 통해 실체없는 약속을 남발하고, 이로써 현실성 없는 기대와 추상적인 국가적 영광의 이미지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을 휩쓴 파시즘적 광풍의 효시로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선배격.
위에서 정적들이 그를 나폴레옹의 후광에 의존한 광대라고 평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즉, 대중에게는 상당히 폭넓은 인기와 지지를 얻었던 데 비해 지식인이나 교양인들에게는 평가가 극히 나빴던 것. 그의 정치 스타일을 파시즘의 효시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당대의 지식인들이 보인 이와 같은 태도는 선동가를 지나치게 경멸하고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다가 근현대사 최대의 참극을 불러온 파시즘에 대한 경멸적이지만 미온적인 대처의 효시라고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6.2. 내치


상기한 바와 같이 도시개발과 각종 인권정책 추진, 의회제도의 발전과 같은 숱한 업적을 남겼다. 보나파르티즘을 내걸고 강력한 황권을 동경하였으나 내각제, 의회제를 유지하고 말년에는 각종 자유를 인정하며 의회제를 확대하였다. 그의 황권 아래 통제되는 근대적 민주주의와 의회정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체제 자체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대응하였고, 1856년에는 요로결석으로 고생하여 정치 공백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인간적 매력은 있을지언정 제왕학을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않은[17] 그의 부족한 리더십으로 인해 측근들이 강력한 황권에 기생하여 막후정치를 하기도 하였다. 1863년 임명된 재상 외젠 루아르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부황제'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른다.
이러한 모습은 훗날 파시즘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독재자의 전형을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훗날 귀스타브 르봉은 이러한 모습들을 바탕으로 군중심리를 출판하기도 했다.

6.3. 식민지 정책


나폴레옹 3세는 외정 면에서는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프랑스령 알제리를 발판으로 하여 아프리카에 상당한 규모의 식민지를 구축하고[18], 인도 제국 성립에 맞서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를 차지한 후 코친차이나, 나아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구축했다.
그러나 식민지 정책에서 실책을 남겼다. 가장 큰 실책은 멕시코의 내전에 개입해 무리하게 막시밀리아노 1세를 자기가 황제로 즉위시켜 놓고 방관한 점이다. 막시밀리아노 1세가 베니토 후아레스에게 잡혀 죽게 생기자 '''아무 구조활동도 안하고 그냥 죽게 내버려뒀다.''' 결국 막시밀리아노 1세는 멕시코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

7. 출생의 비밀


한때 나폴레옹 3세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아들이 아니라, 나폴레옹 1세의 의붓딸 오르탕스가 바람을 피워 낳은 '''혼외자'''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이미 19세기 당대에도 빅토르 위고 등 많은 정적들이 제기해온 뿌리 깊은 의혹이었다. 애초부터 루이오르탕스의 결혼은 어머니 조제핀의 불안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억지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에, 이들 부부의 관계는 누가 보더라도 소원했다. 거기에 루이는 사실 동성애자이며, 오르탕스도 공공연히 바람을 피운다는 설이 나돌면서 의혹을 부채질했다. 이것이 확대되면서 나폴레옹 3세 혼외자 설로 번진 것이다. 결국 루이-오르탕스 부부는 이로 인해 사이가 더욱 나빠져서 끝내 파경을 맞게 된다.
그런데 2010년대 들어 유전학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 설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프랑스 유전인류학 연구소에 재직하는 제라르 루코트(Gérard Lucotte) 박사가 나폴레옹 1세의 머리카락에서 추출한 Y-DNA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나폴레옹의 Y염색체 DNA는 하플로그룹 E1b1b1c1(E-M34)에 속한다. 이후 루코트 박사가 후속 작업으로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롬의 후손들을 분석한 연구가 보강되면서 보나파르트 집안 남자들의 Y염색체 DNA는 하플로그룹 E1b1b에 속해 있음이 밝혀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인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의 유해에서 채취한 머리카락과 기타 혼외자 후손에서 채취한 DNA 분석에 의하면 이들은 다른 하플로그룹 I2a2a에 속한다. 이는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가 적어도 부계 쪽으로는 친족 관계가 아님을 시사한다.
이러한 유전학적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 설명이 존재한다.
첫째, 19세기 당대에 반대파들이 공격하던 대로 '''나폴레옹 3세는 오르탕스의 외도를 통해 낳은 혼외자'''라는 설명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별거 이후 애인이기도 했던 샤를 드플라오[19](Charles Joseph de Flahaut) 백작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는 주장이 있다. 오르탕스와 플라오 백작 사이에서 태어난게 확실한 샤를 드 모르니 (모르니 공작) 와 닮았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되고는 한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는 기존 역사학계의 연구 결과도 만만치 않아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둘째, 나폴레옹 3세가 루이오르탕스의 아들인 것은 맞으나, 오히려 '''루이가 나폴레옹 1세의 이부형제'''였다는 설명이다. 외도한 사람이 어머니 오르탕스가 아니라 할머니(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 보나파르트라는 이야기이다. 레티치아가 코르시카에 살던 시절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군 장교들과 교분이 깊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적지 않게 떠돌던 풍설이기도 했다. 이 설은 나폴레옹 1세와 3세의 Y염색체 DNA가 다른 하플로그룹에 속하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설명되며, 나폴레옹 3세의 출생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연구와도 배치되지 않는다. 또한 이 경우 '''나폴레옹 3세가 나폴레옹 1세의 조카라는 사실도 유효'''하다. 나폴레옹 1세와 루이가 모계 유전자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 때문에 첫째 설명에 비해 조금 더 많은 지지를 받고 몇몇 프랑스 현지의 서적언론기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 루이 보나파르트의 DNA 검사가 아직 이뤄지지 못한데다가, 할머니인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의 외도 사실을 확인할 다른 방법도 없어 전반적으로는 흥미로운 가설 정도로 치부되는 상황이다.
셋째, '''루코트 박사의 분석을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주로 연구에 활용한 나폴레옹 3세 친족들의 유해 시료가 불완전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관련 문헌에도 나오지만 이 연구에서는 사망 직후 유해에서 채취해서 박물관, 수집가가 소장하고 있는 체모, 모발 등을 이용했다. 그러나 특히 나폴레옹 3세 본인 및 아들의 유체 시료는 출처도 불분명하고 상태도 좋지 않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 3세의 하플로그룹 분석 결과는 공인된 학술저널에 실리지도 못했다. 이를 명확하게 확인하려면 루이 보나파르트 및 나폴레옹 3세의 관을 열고 보다 확실한 DNA 시료를 채취해야겠으나, 섣부른 의혹만으로는 고인의 명예를 흠집내고 영면을 방해하는 이런 행위가 정당화될 수도 없다.
정리하자면, 나폴레옹 3세의 출생의 비밀은 극히 일부의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입증할 근거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그 아들인 나폴레옹 황태자도 살아서 후사를 남겼으면 훗날에라도 이 문제가 거론됐겠지만, 그가 독신인 채로 자식도 없이 아프리카의 전쟁터에서 전사했으니, 논란의 여지도 완전히 사라졌다. 보나파르트 가문의 수장은 제롬 보나파르트의 후손이 잇고 있다.
당대에는 나폴레옹 3세 본인은 물론 누구든지 그가 루이의 아들로서 보나파르트 가문이라고 여겼으므로, 역사적으로는 아무 의미 없는 스캔들에 불과할 뿐이다.

8. 가족과 후손들



8.1.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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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외젠 루이 장 조제프 보나파르트
Napoléon Eugène Louis Jean Joseph Bonaparte
(1856년 3월 16일 ~ 1879년 6월 1일)
나폴레옹 3세의 유일하게 공인된 아들[20]인 '루이 외젠 보나파르트'는 황태자였으나, 보불전쟁으로 부친이 폐위당해 영국으로 망명하자 따라갔다가 영국군에 자원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외제니 황후를 설득하여 안전할 것임을 보장한 다음에야 그는 줄루 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참관인 자격으로 정찰하던 도중 40명이나 되는 줄루족 전사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는 맹렬하게 맞서 싸웠지만 결국 다리와 어깨에 창을 맞고 쓰러져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전사했다.
줄루족은 자신들의 전쟁 예법에 따라 죽은 자가 이승에 미련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창으로 열여덟 군데나 찔러 시신을 크게 훼손했는데, 이게 본의 아니게 전 유럽의 분노를 사버렸다. 그의 호위병들도 모두 죽거나 실종되었고, 그의 시신은 아버지가 묻힌 세인트 미카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루이는 황제가 된 적이 없지만 보나파르티스트들이 그를 황제로 예우하여 나폴레옹 4세라고 호칭된다. 그런데 불과 50야드 떨어진 곳에서 영국군 클레이 중위와 그의 병사들은 황태자가 죽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고, 후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여왕과 황후의 중재로 풀려나지만 온 유럽 대중의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 그는 불명예 제대를 당한 후 인도로 떠나서 7년 후에 봄베이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줄루족은 자신들이 죽인 백인 장교가 보나파르트 황가의 후계자이자 명목상 프랑스의 황태자임을 알고 경악하여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 영국은 명목상이지만 백인 황태자가 유색인종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줄루 전쟁에 박차를 가해 결국 줄루랜드 전체를 식민지화했다.
여담으로 부르봉 왕가의 앙리 5세의 양자가 될 뻔 했다. 다만 진지하게 고려된 것은 아니었고, 앙리 5세의 사정이 숨어 있었다. 프랑스 제2제국이 멸망한 이후 앙리 5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추대하자는 여론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왕당파가 요구한 것은 오를레앙 왕조의 후계자인 파리 백작 필리프를 양자로 삼으라는 것이었다.[21] 이에 앙리 5세는 '''오를레앙 가문에게 왕위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보나파르트 가문이 낫다'''는 뜻에서 나폴레옹 4세를 양자로 들이겠다고 선언했다.[22]

8.2. 외제니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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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제니 드 몽티조 Eugénie de Montijo,
(1826년 5월 5일~ 1920년 7월 11일)
나폴레옹 3세의 황후는 외제니 드 몽티조(Eugénie de Montijo)로 외제니 황후라 불렸는데 에스파냐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23] 그녀는 나폴레옹 3세의 총애를 받아 애인이 되었으나, 혼전순결을 지키길 원했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와 결혼 전까지 육체적 관계를 가지진 않았다.
나폴레옹 3세는 외제니와 연애결혼을 했는데, 그녀가 나폴레옹 3세의 황후가 된 과정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본래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는 유럽의 왕가의 여성들에게 혼담을 넣었다. 처음에는 스웨덴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손녀인 카롤라에게 혼담을 넣었지만 카롤라의 아버지인 바사 공 구스타프는 바사 왕조[24]와 보나파르트 왕조 간의 껄끄러운 역사,[25] 불안정한 나폴레옹 3세의 지위를 생각해 거절했다. 뒷날의 일을 생각하면 선견지명인 듯.[26] 두 번째로 빅토리아 여왕의 조카인 아델라이드에게 혼담을 넣었는데 역시 빅토리아 여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어쨌든 나폴레옹 3세가 후계자를 자처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영국의 적이었던 점도 있을 것이고 빅토리아 여왕이 보기에도 그리 안정적인 혼처로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게 되자 프랑스 국내에서 황후를 찾을 생각을 한 측근들은 혼처를 찾기 시작했는데, 나폴레옹 3세가 외제니와 결혼하겠다는 공식 발표를 한 후 프랑스 대귀족의 딸이 아니라 에스파냐 출신의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인해 사교계와 보나파르트 가문, 나폴레옹 3세의 측근들[27]사이에서도 반대가 나왔지만 나폴레옹 3세의 결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물론 나폴레옹 3세의 측근 중에선 이 결혼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예로 쿠데타를 실무기획한 샤를 드 모르니 공작의 경우 처음엔 결정을 번복할 것을 종용했지만 황제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것과, 민중들이 황제의 연애결혼에 찬성하고 외제니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것이라 예상해 찬성했다. 과연 그 예측대로 외제니 황후는 제2제정기 사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패션을 비롯한 유행은 모두 그녀로부터 시작했다. 외제니 황후는 보나파르트 왕가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보석을 광적으로 좋아했고 그녀의 보석 컬렉션은 오늘날 루브르에 남아 있다. 그녀는 한번 입은 옷은 다시 입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 덕분에 럭셔리 브랜드가 호황을 이뤘다. 또한 황후가 여행을 떠날 때 드레스와 보석, 향수들을 실어나를 가방을 납품한 루이 비통을 총애해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에 포장 회사를 개업하도록 도와줬다.
결혼 후 나폴레옹 3세는 외제니 황후의 건강이 좋지 않아 후계자를 얻을 때까지만 잠자리를 했다고 한다.[28] 수에즈 운하 완공식 참석을 위해 이집트 왕국에 남편과 함께 국빈 방문 했을때 이집트 군주 이스마일 파샤와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남편이 보불전쟁 패배로 제위에서 밀려나면서 함께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거기서 남편과 외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이후 영국에서 줄곧 체류하며 영국, 러시아 왕실 인사들과 교류했고, 1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군 지원을 위한 모금 및 기부활동을 펼쳐 그 공로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 90세를 넘기며 장수한 끝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2년 만인 1920년에 타계했다. 남편과 일가를 몰락시킨 독일 제국의 패망을 보고 죽었으니 나름 복수를 한 셈이지만, 그로 인해 가까이 지냈던 유럽 왕실들의 몰락도 함께 목격했으니 복잡한 심정이었을 듯. 유해는 앞서 죽은 남편, 외아들이 묻힌 영국 판보로의 수도원에 함께 안장되었다.
이후의 황실 수장은 왕위 요구자/유럽/프랑스 문서를 참고.

9. 여담


  • 지도자의 인간적인 매력은 곧 지도자의 사생활(…)로 연결되는 것인지, 색욕이 매우 왕성하여 나폴레옹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유럽을 전전하던 중에도 각지에 자신의 정부를 두고, 봉기에 실패해 영국으로 망명해 런던에 거주할 때도 해리엇 하워드라고 하는 여배우를 정부로 삼았다. 반대로 아내는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 이스마일 파샤[29]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30].
  • 나폴레옹 3세의 언어구사력에 대해서 "독일어 같은 프랑스어, 프랑스어 같은 독일어, 이탈리아어 같은 영어, 영어 같은 이탈리아어를 구사했다"는 평이 있다. 실제로 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 독일에 장기간 체류했었던 탓에, 독일어 억양이 짙게 배인 프랑스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았다고. 그리고 독일어는 프랑스어 억양이 배어 있었다고 한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모든 분야에 대해서 알고 있긴 한데 전부 어색하다는 냉소적 해석이 섞인 평가로 볼 수있다.

[1] 역대 프랑스 대통령 중 가장 키가 작다. 심지어 키 작기로 유명한 니콜라 사르코지 보다도 키가 작다...[2] http://dicocitations.lemonde.fr/citations/citation-105257.php[3]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는 '대통령'직이 없었다.[4] 굽시니스트시사인 만화에서 전두환의 5.17 쿠데타를 루이 나폴레옹식 쿠데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리고 제5공화국의 (유신정권에 비해) 유화적인 정책과 서울시 건설 사업은 나폴레옹 3세의 내치 정책들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5] 당시 프랑스인 평균키 165cm. 나폴레옹 168cm. 물론 당시 귀족들의 평균키보다는 작았다고 한다.[6]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장마리 르펜을 상대로 82%로 압승하기 전까지 역대 최고 득표율로 남아있었다.[7] Travaux haussmanniens 이라고도 한다. 직역하자면 '오스만 토목공사'.[8] 그 전까진 사르데냐의 영토였다.[9] 제1차 세계 대전 때 이탈리아가 이때 내준 영토 때문에 어느 쪽에 붙을까 고민을 하게 만들기는 했다.[10] 이사벨 2세가 쫓겨났다.[11] 국내 서적에서 나폴레옹 3세가 라인란트 전체를 요구했다는 서술이 많은데 요구한건 프로이센령 자를란트, 팔츠지방 바이에른 왕국령 란다우와, 중립국 룩셈부르크였다. 이는 빈 회의 때 초반 프랑스 국경을 1792년 1월 1일 당시 국경으로 축소시키려 했을때 프랑스령으로 남았으나 백일천하로 취급이 더 가혹해져서 1790년 1월 1일 당시 국경으로 수정되어 독일 연방에 할양된 영토로 소(小)라인란트라고 칭한다. 출처는 세계외교사(김용구)[12] 나폴레옹 3세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전쟁준비가 제대로 되지 못한 상황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프랑스 여론은 들끓었고 나폴레옹 3세조차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13] 비둘기과 비슷한 크기였다고 한다.[14] 대표적으로 빅토르 위고.[15] 다만 이 때가 산업혁명기인데다가 사회보장제도가 미비했던 시절이라 빈부격차가 엄청났게 컸기때문에 집권층 입장에서는 관심을 가지는것이 당연하기는 했다.[16] 아이러니 한건 그가 몰락한 후 프랑스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이 탄생했다는 것이다.[17] 그는 젊을적 나폴레옹 1세의 몰락 이후 런던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18] 2차대전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알제리 일대는 사실상 프랑스 본토와 동일하게 여겨졌다. 한국으로 치면 내선일체.[19] 탈레랑의 사생아이기도 했다.[20] 나폴레옹 3세는 황제에 오르기 이전부터 많은 정부(情婦)가 있었고 따라서 사생아도 많았지만, 당연히 사생아를 정식 후계자로 삼기는 곤란하다.[21] 앙리 5세는 자녀가 없었기에 앙리 5세 사후 오를레앙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었다.[22] 그리고 앙리 5세는 국기 등의 핑계를 대며 결국 왕위에 오르는 것을 포기했다.[23] 그녀의 아버지는 보나파르트 지지자였다.[24] 남계 직계는 단절되었고,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외손자격으로 계승.[25] 바사 공 본인이 원래 왕태자였으나, 스웨덴 내부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이 와중에 나폴레옹의 개입으로 스웨덴 왕위는 현 왕실인 베르나도테 왕조로 넘어간다.[26] 바사 공은 1877년까지 살아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몰락 소식을 들은 그는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작 본인이 사망한 후엔 직계가 완전히 끊겨버리고 여동생쪽 후손이 딱 1명 남았는데(바덴의 빅토리아), 베르나도테 왕조로 시집 가버린다(...)[27] 대표적으로 내무장관 루에르나 페르시니가 약혼소문을 듣고, '''"우리가 온갖 위험을 무릎쓰면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당신을 허튼 계집과 결혼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란 격한 언사까지 내뱉으며 반대했다. 그리고 이 말 때문에 외제니 황후의 미움을 산 페르시니는 권력의 중추에서 밀려났다.[28] 외제니 황후는 유산을 겪은 후로 몹시 괴로워했는데, 이 때문에 나폴레옹 3세와의 잠자리 역시 기피했다고 한다.[29] 말이 총독이지 당시의 이집트는 사실상의 독립국이었다. 또한 그의 조상이던 무함마드 알리 초대 이집트 총독부터 이스마일 파샤의 후손들까지 총독직을 세습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이후엔 이집트 최후의 왕조로 진짜 세속군주화 되었다.[30] 그러나 이는 루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애초에 외제니 황후는 몸이 안좋아 아들인 루이 나폴레옹을 낳고선 남편과의 성관계조차 제대로 치루지 못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