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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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Victoria'''
<colcolor=#000> '''이름'''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Alexandrina Victoria)
'''출생'''
1819년 5월 24일
런던 켄싱턴 궁전
'''사망'''
1901년 1월 22일 (81세)
와이트 섬 오스본 하우스
'''장례식'''
1901년 2월 4일
윈저 프로그모어 영묘
'''재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여왕
1837년 6월 20일 ~ 1901년 1월 22일
인도 제국여제
1876년 5월 1일 ~ 1901년 1월 22일
'''신장'''
152cm
'''배우자'''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
(1840년 결혼 / 1861년 사망)
'''자녀'''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앨리스
알프레드
헬레나
루이즈
아서
레오폴드
베아트리스
'''아버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어머니'''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이부 남매'''
라이닝겐의 카를 왕자[1]
호헨로헤-랑겐부르크의 페오도라[2]
'''서명'''
[image]
1. 개요
2. 칭호
3. 즉위 배경
3.1. 어린 시절
3.2. 여왕 즉위
4. 치세
4.1. 치세 앞부분
4.2. 과부 여왕
4.3. 인도 여제
4.4. 치세 뒷부분
5.1. 골든 주빌리
5.2. 다이아몬드 주빌리
6. 개인사
6.1. 가족관계
6.2. 남편과의 순애보
7. 사망
8. 평가
9. 이야깃거리
10. 미디어 매체의 빅토리아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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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국왕이자 인도 제국의 황제이며 하노버 왕조의 마지막 군주. 대영제국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지만[3], 동시에 당시 극에 달해있던 영국 주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군주이자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여왕이'''었'''지만 2015년 9월 9일 오후 5시 30분부로 엘리자베스 2세가 기록을 경신해 빅토리아는 두 번째로 오래 재위한 군주가 되었다.
영국과는 달리 하노버 영지에는 살리카법이 적용되어 여성 군주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빅토리아의 즉위와 함께 조지 1세부터 윌리엄 4세까지 지속된 영국과 하노버 왕국동군연합이 종료되었다. 참고로 윌리엄 4세 사후의 하노버 국왕 자리는 윌리엄 4세의 동생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계승했다.
영국 왕 중에서 드물게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4][5] 그렇기에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왕호로 사용하는 영국 여왕이 앞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빅토리아 1세로 불리지 않는다.
[image]
<^|1> [image]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 초상화, 조지 헤이터 경, 1840년
즉위 50주년에 촬영한 초상사진, 1887년

2. 칭호


처음 즉위할 때는 영국의 국왕이었고 유럽의 여러 지위들과 나중에 인도 제국의 황제 자리까지 겸임한 결과 공식 칭호가 다음과 같이 늘어났다.

'Her Majesty Victoria,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Queen, Defender of the Faith, Princess of Hanover and Duchess of Brunswick and Lunenburg, Princess of Saxe-Coburg and Gotha and Duchess in Saxony, Empress of India, Sovereign of the Royal Family Order of King George IV, Sovereign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Sovereign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Sovereign of the Most Illustrious Order of Saint Patrick, Sovereign of the Most Honourable Order of the Bath, Sovereign of the Most Distinguished Order of Saint Michael and Saint George, Sovereign of the Order of British India, Sovereign of the Indian Order of Merit, Sovereign of the Most Exalted Order of the Star of India, Sovereign of the Royal Order of Victoria and Albert , Sovereign of the Most Eminent Order of the Indian Empire, Sovereign of the Imperial Order of the Crown of India, Sovereign of the Distinguished Service Order, Sovereign of the Royal Victorian Order'

-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여왕, 신앙의 수호자, 하노버의 대공녀이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공녀,[6]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비이자 작센의 공비,[7] 인도의 여황제, 조지 4세 왕립 기사단장, 가터 기사단장, 씨슬 기사단장, 성 패트릭 기사단장, 바스 기사단장,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기사단장, 영국령 인도 기사단장, 인도 메리트 기사단장, 인도성(星) 기사단장, 로열 빅토리아·앨버트 기사단장, 인도 제국 기사단장, 인도 왕좌 기사단장, 무공 기사단장, 빅토리아 왕립 기사단장이신 빅토리아 여왕 폐하'


굉장히 장황하기 때문에 국가간의 공식적인 조약에서도 "Her Majesty Victoria, by the Grace of God, of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Queen, Defender of the Faith"까지만 쓰고 그 뒤는 "etc.,etc.,etc.,(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3. 즉위 배경


빅토리아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의 딸로,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왕위에 오르기 힘든 입장이었으나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해 즉위가 가능했다.
빅토리아의 할아버지 조지 3세는 9남 6녀를 두었는데, 당시 왕세자였던 장남 조지 4세의 외동딸이자 후계자인 샬럿 공주가 아이를 낳다 요절했다. 상황이 이리 되자 조지 3세의 아들들 중 3남 클래런스 공작 윌리엄, 4남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5남 컴벌랜드 공작 어니스트, 6남 서식스 공작 오거스터스 [8], 7남 케임브리지 공작 아돌푸스 이 5명의 아들 중 먼저 자녀를 얻는 사람에게 왕위 계승에서의 우선 순위가 주어지게 되었다.[9] 3남 윌리엄은 자식이 모두 11명이나 있었으나 아델레이드 왕비 사이에서 둔 적자녀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자[10]였고, 적자였던 자녀들마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4남 에드워드가 1819년에 외동딸 빅토리아를 얻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빅토리아가 태어난 지 1년만인 1820년에 사망했다.
이후 왕위는 3남인 윌리엄 4세가 물려받았으며, 차기왕위 계승 1순위는 빅토리아가 되었다.

3.1. 어린 시절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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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빅토리아 여왕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와 함께. 어린 빅토리아의 손에 들린 그림은 1820년 1월 23일에 작고한 부친 에드워드 왕자의 초상화이다.
빅토리아 공주는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오거스터스와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의 딸 빅토리아 공녀 사이에서 1819년 5월 24일늦둥이로 태어났다. 즉위 배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막 태어났을 무렵엔 조지 3세의 살아있는 유일한 손녀로서 언젠가는 왕위를 계승할 추정상속인으로 여겨졌다. 아버지 켄트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가 죽은 뒤 잠시 추정상속인이 될 가능성이 낮아졌지만 윌리엄 4세작센마이닝겐의 아델라이드 왕비 사이에서 1819년에 낳은 첫딸 샬럿, 1819년에 사산된 아이 1명, 1820년생 셋째 엘리자베스, 1822년 넷째로 사산된 쌍둥이 왕자가 차례로 요절하면서 다시 추정상속인으로 지위가 부상한다.
본래 독일 출신인 데다 남편마저 잃은 뒤 궁정에서 경원시당하며 영국에 정을 붙이지 못 하고 친정에 돌아가고자 했던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은 장차 딸이 즉위하면 섭정이 될 야심을 품고 비서인 존 콘로이와 함께 어린 빅토리아를 옥죄기 시작했다. 이게 어느 정도였느냐면 콘로이의 딸 빅투아르 콘로이를 빅토리아의 소꿉친구로 붙여주고, 혹시라도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해서 죽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이유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빅토리아 혼자서는 못 하게 할 정도였다. 딸의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써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음악, 역사, 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시켰음은 물론이다. 또한 자신들 이외의 다른 영국 왕족들이 빅토리아와 친하게 지내는 걸 막으려고 윌리엄 4세와 아델레이드 왕후가 빅토리아와 만나는 것도 방해했다.
비록 딸은 아닌 조카였지만 빅토리아를 진심으로 아끼고 좋아했던 아델레이드 왕후는 그녀와 만나기 어렵게 되자 매우 슬퍼했고 윌리엄 4세는 켄트 공작부인과 콘로이가 그들의 야심을 이루기 위해 어린 조카딸을 괴롭힌다고 생각해 저 둘을 혐오했다. 그는 1836년 자신의 생일 만찬 때, 켄트 공작부인의 면전에 대놓고 '짐은 빅토리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서 그대가 섭정이 되는 꼴은 결코 보지 않게 할 것'이라 일갈했다. 발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이 짐을 최소한 9개월은 더 살게 해줄 거라 믿소...내 그렇게 되면 지금 내 옆자리의, 저 악마 같은 조언자에게 둘러싸여 상황도 제대로 제어 못해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이나 하는 내 무능한 제수씨가 내 조카의 왕위를 가지고 노는 일 없이, 잠정 왕위 계승자인 저기 앉아있는 젊은 아가씨에게 왕위를 넘겨주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오.''''

'I trust to God that my life may be spared for nine months longer ... I should then have the satisfaction of leaving the exercise of the Royal authority to the personal authority of that young lady, heiress presumptive to the Crown, and not in the hands of a person now near me, who is surrounded by evil advisers and is herself incompetent to act with propriety in the situation in which she would be placed.'

당시 빅토리아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고, 켄트 공작부인은 당연히 울그락푸그락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빅토리아가 18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이 되고 나서''' 26일 후에 윌리엄 4세가 세상을 떠난 것.
빅토리아는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를 극성스런 어머니와 그 비서의 등쌀에 시달려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사귀지 못 한 채 억눌려서 자랐다. 어린 빅토리아가 의지했던 유일한 인물은 가정교사 루이즈 레첸 여남작이었는데, 그녀는 콘로이와 켄트 공작부인의 섭정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다. 여남작은 빅토리아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을 우려해 (특히 켄트 공작부인과 콘로이 경에게) 강하고 타협하지 않는 여성이 되도록 가르쳤다. 이런 유년기를 보낸 빅토리아는 자기 주장이 매우 확고한 고집스런 성격으로 자랐다. 이런 성격은 죽을 때까지 고쳐지지 않았고 여왕과의 금슬이 좋았던 남편 앨버트 공마저 그녀의 성격을 바꾸지는 못 했다. 그저 비위를 맞춰가며 달랬을 뿐. 당대에도 앨버트 공이 보살급 멘탈이라 저 성격 받아주고 산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있었다고 한다.
빅토리아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루이즈 레첸 여남작(Baroness Louise Lehzen)은 빅토리아의 즉위 후에도 여왕의 개인 비서와 조언자로 일하다가 앨버트 공과 빅토리아의 결혼 이후 첫 아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가 태어난 1840년 겨울에 앨버트 공과의 갈등 끝에 은퇴해서 고향 하노버로 돌아갔다. 레첸 여남작은 1870년 사망할 때까지 빅토리아와 평생 편지를 교환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3.2. 여왕 즉위


1837년 6월 20일, 큰아버지 윌리엄 4세가 재위 7년만에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빅토리아는 여왕으로 즉위했다. 성인이 되어 즉위했기에 섭정을 둘 필요가 없었던 여왕은 자신을 달달 볶았던 어머니와 콘로이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어머니와 내연관계에 있다는 추문까지 나돌 정도로 가까웠던 콘로이는 연금을 주고 퇴직이라는 명분으로 내쫓아버렸고, 켄트 공작부인은 거처를 외딴 곳으로 정해 버킹엄 궁전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못 하도록 했다.[11]
첫 아이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가 태어난 후에야 남편인 앨버트 공의 노력과 자신도 어머니가 되는 일을 겪고 나서 사이가 많이 나아졌고, 켄트 공작부인은 빅토리아의 궁정에서 환영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손주들을 아주 예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완전히 화해한 건 아니어서 켄트 공작부인이 1861년 3월 16일 사망하자 그녀가 썼던 일기와 자신의 어릴 적 물건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것을 발견한 여왕은 어머니와 평생 사이 좋게 지내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고 한다.

4. 치세


빅토리아는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이었던 전성기의 영국을 통치한 여왕이었다. 이 시기 영국은 자본주의 선진국이 되는 동시에 2대 정당제 의회정치가 전개되었고 그 동향이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본인이 여성이었음에도 정작 여성 참정권 보장에는 반대했지만 64년간의 긴 치세를 통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따라 오늘날의 영국 군주제를 확립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빅토리아 여왕 치세도 말기로 가면서 독일, 미국 등의 후발주자에게 산업적으로 밀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경제가(특히 농촌 경제가) 어려워지자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보호무역론)이 상당해졌다. 군사적으로도 보어 전쟁 등에서 체면을 구기는 등 점점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 흔히 '''빅토리아 여왕의 갱년기'''라 부른다(…). 보통 "현대(모던) 영국"은 불경기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왕립상공회의소가 설립되고 선거권을 확대, 평등화하는 개혁법, 의석재분배법이 통과된 1885년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때가 바로 그 쇠퇴가 시작된 시기였다(1969년 저작 Henry Pelling의 "현대 영국사(Modern Britain), 1885-1955").

4.1. 치세 앞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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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여왕이 즉위한 19세기 중반은 외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불황과 맞물려 노동자들이 과격한 러다이트 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참정권 보장을 주장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시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있었다. 이 때문에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매일 1시간씩 30대 총리 '멜번 경(당시 59세)'[12]을 접견해 여러 현안을 논의하면서 군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치세 초기의 여왕의 정치적 성향은 자유주의에 쏠려있어 휘그당을 옹호하고 토리당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1839년 2차례에 걸쳐 여왕을 모시는 시녀들이 정치적 성향을 문제 삼아 궁정에서 쫓겨나는가 하면, 시녀 교체를 주장한 토리당의 '로버트 필' 31대 총리 예정자의 의견을 여왕이 거부하면서, '로버트 필'이 총리를 거부하고 내각이 다시 휘그당으로 교체되는 등, 젊은 여왕의 등장에 환호했던 영국 국민들은 궁정에서 들려오는 파벌 싸움에 실망해 인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이는 휘그당에 우호적인 시녀들에 둘러싸인 여왕의 영향력을 국정에서 차단하기 위해 그녀가 정치적으로 부족하다는 토리당의 선전이 먹혀들어간 것으로, 유달리 30대 총리 멜버른 경[13]과 친밀했던 처녀 여왕은 'Mrs.Melbourne(멜버른 부인)'이라는 비꼼을 당하기도 했다.
한편 미혼인 상태에서 즉위한 여왕의 남편 자리를 놓고 여러 나라의 왕족들이 나섰다. 원래 여왕은 독일 출신인 어머니에 대한 반감 때문에 독일인과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영국에 온 외사촌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공자 앨버트에게 반해서 결국 1840년 2월 10일, 앨버트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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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결혼식
지식과 교양이 풍부했던 앨버트 공은 여왕의 남편이라는 위치 때문에 공직도 작위도 받지 못 하고 아내를 보필하는 조력자 역할에만 충실해야 해서 결혼 초기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임신 이후 거동의 제약이 생기고 점차 남편에게 깊이 의지하면서[14] 앨버트 공의 역할이 커졌고, 그는 고집세고 외골수였던 아내의 곁에 머무르며 여왕의 부군으로서 여러 가지 업무를 훌륭하게 처리했다. 19세기 중반의 시대적 변혁에 따라 당대의 민중이 요구한 노예제도 폐지나 교육제도 개혁에 힘썼고 왕실 가족과 재산의 관리도 담당했고, 1851년의 제1회 국제박람회의 개최도 그가 추진한 행사였다. 이런 앨버트 공이 있었기에 여왕은 양당제 의회에서 정치적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입헌군주제를 공고하게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4.2. 과부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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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공의 초상화와 함께한 여왕
1861년 12월 14일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이 4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동안에도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거라며 애써 현실을 외면하던 여왕은 남편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나 큰 나머지 앨버트 공의 사후 모든 국정에서 손을 떼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어린 자녀들과 함께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채 윈저 성에 은거해버렸다.
정신병을 앓았던 조지 3세는 왕세자를 섭정으로 임명한 후 공무에서 물러났지만, 섭정도 두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은거해버린 여왕의 무책임한 행동에 내각과 의회는 매우 당황했다. 명목상 군주이긴 해도 국가 대사를 처결할 때는 여왕의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기에 총리는 하는 수 없이 런던에서 멀리 떨어진 여왕의 처소로 매번 찾아가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빅토리아를 동정하던 국민들도 여왕의 부재가 길어지자 일각에서는 거액의 생활비를 지급받고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면서 국정에는 소홀한 여왕의 행태에 염증을 느껴 '윈저의 과부는 물러가라'며 퇴위를 주장하는 등 불만의 여론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여왕은 떠밀리듯이 공무에 복귀했으나 앨버트 공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언제나 검은 상복만 입고 지내는 등 우울한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고,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얹는 베일을 착용하기 불편하다며 제국왕관(Imperial State Crown)[15]을 쓰는 것도 거부했다. 그러자 이러한 모습이 국가의 위신과 왕실의 체면에 손상이 갈 거라고 판단한 영국 정부는, 여왕을 위해 특별히 제국 왕관의 축소판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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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골조를 만들고 다채로운 보석이 사용되지 않아 겉보기에는 소박한 직경 9cm, 높이 10cm의 작은 왕관에는 오로지 '''다이아몬드만 1,187개'''가 사용되었다(…). 이 왕관은 1871년 2월 9일 의회 개원식 때 처음 착용한 뒤로 쭉 애용했고 공식 초상사진을 촬영할 때도 항상 이 왕관을 썼으며 사후 장례식 때 여왕의 관 위에도 올려졌다. 여왕 사후 에드워드 7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왕비가 한때 착용하기도 했으나 그 후로는 왕실 보석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현재는 런던 탑에 보관되어있다.

4.3. 인도 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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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레일리가 인도 제국의 왕관을 여왕에게 바치는 것을 풍자한 주간지 '펀치(Punch)'의 만평(1867년, John Tenniel).[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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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과 인도인 시종 두 사람[17]
1857년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그동안 인도를 간접통치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동인도 회사를 해체하고 인도 제국을 통해 본격적인 직접통치에 들어갔다. 여왕은 인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은 걸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군주로서의 책무를 다시금 절감했다는 감상을 일기에 적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874년 총선거를 통해 다시 집권한 벤저민 디즈레일리 총리는 여왕의 공식 칭호에 '인도 여제(Empress of India)'의 칭호를 덧붙이는 것을 골자로 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것은 기존 무굴 황제 대신에 영국의 왕이 인도의 황제로서 인도 각지의 제후들 위에 군림하는 형태로 변경한 것이다.
영국은 식민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영국화해 영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하는 데에 인색했던 대신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지만 않으면 되도록 기존 사회체제에 손을 대지 않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영국은 식민화 과정에서 현지의 토착 지배자들과 타협해 영국의 왕이 그들 위에 존재하는 더 높은 군주라는 관계를 정립한 일이 여럿 있었다. 예를 들어 피지에서는 (여)왕에 대응되는 현지어 표현을 '대추장'이라고 번역했다. 말 그대로 피지 각지의 추장들 위에 군림하는 더 큰 추장이라는 의미. 영국의 왕에게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해 통치한 곳은 인도가 유일했지만.[18]
디즈레일리가 굳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 황제 칭호를 부여한 동기 중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공주(어머니와 이름이 같음)도 있었다. 빅토리아 공주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왕세자(이후 프리드리히 3세)한테 시집을 갔는데 이후 1871년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해 독일 제국을 만들었다. 그러자 영국 국내에서는 "프리드리히가 즉위하면 빅토리아 공주는 Empress[19]가 되는데 어머니는 Queen이어서 칭호가 서로 역전된다"는 불만이 돌았다고 한다. 영국인들 스스로 대영제국[20]이라고 할 정도로 세계 최강국인데 신생 독일 제국보다 못날 것도 없다는 자존심도 있었을 것이고. 근데 그렇다고 그 동안 익숙하게 잘 써온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란 국호를 갑자기 무슨무슨 제국으로 고치고 여왕의 칭호를 여제로 바꾸는 것은 여러모로 번거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마침 영국이 인도를 완전히 장악[21]함에 따라 디즈레일리가 묘수를 낸 것이다. 영국 여왕을 인도 여제로 군림하게 함에 따라 인도의 기존 지배 질서 위에 영국이 지배력을 행사하게 만들면서 칭호 문제로 촉발된 영국인들의 자존심 문제를 적당히 해결한 것. 영국 국내에서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비아냥이 없지는 않았지만(위 풍자화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디즈레일리의 제안은 관철되었다. 따라서 1877년 1월 1일부터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여왕이자 인도의 여제이신 빅토리아 폐하'로 불리게 되었으며 109캐럿짜리 인도산 다이아몬드 코이누르를 제국 왕관에 박아넣었다. 빅토리아 이후로 영국의 국왕들은 1948년까지 인도 황제의 칭호를 같이 썼다.

4.4. 치세 뒷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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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여왕
1878년 12월 14일 차녀 앨리스 공주가 디프테리아에 걸려 병사했고 60세가 된 다음 해에 첫 증손녀인 작센마이닝겐페오도라[22]가 태어남에 따라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남편과 자식을 앞세우는 비극을 겪은 여왕은 가장 아끼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에게 한층 더 매달렸다. 베아트리스 공주가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와 사랑에 빠졌을 때도 딸과 사위가 자기 곁에서 지내는 걸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할 정도로 여왕은 젊었을 적의 완고했던 성격이 노년에 접어들어 더욱 강해졌다.
이런 여왕의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격은 외교와 군사 문제에서 강경한 대응을 통해 영국의 위신을 세우려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1877년 러시아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해 산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하고 불가리아를 할양받자 이에 반대해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여 1878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산 스테파노 조약을 폐기하고 러시아 몫으로 돌아갈 영토를 크게 줄여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뿐이었고, 뒤이어 각종 악재가 여왕과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1881년과 1885년에는 각각 남아프리카와 수단에서 영국군이 패퇴했고, 1882년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발한 아일랜드에서 총독이 비밀결사에 암살당했고, 1870년대와 80년대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은 아일랜드 자치동맹, 아일랜드 토지동맹을 거쳐 아일랜드 민족동맹을 만들고 아일랜드 자치당은 50여 명을 영국 의회에 진출시켰다. 아일랜드 자치당은 캐스팅보더 역할을 하며 몸값을 높여 영국 자유당글래드스턴을 도와 아일랜드 토지법과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켰다.
이런 조짐은 대영제국의 최전성기가 끝나고 내리막으로 접어든 신호탄이었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여왕은 개인적인 비극이나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왕위를 지키며 1887년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는 골든 주빌리를, 1897년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당시까지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재위기간을 뛰어넘은 빅토리아는 생전에 이미 대영제국의 구심점으로서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빛나는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것이다. 영국의 팽창주의는 도리어 이 내리막 시기에 더 극대화된다.

5. 장수만세



1900년, 더블린을 방문한 여왕

5.1. 골든 주빌리


1887년 6월 20일, 여왕은 남편 앨버트 공이 묻혔던 프로그모어의 나무 아래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것으로 즉위 50주년(골든 주빌리)의 일정을 시작했다. 이후 기차를 타고 윈저 성에서 패딩턴, 다시 런던으로 갔으며 이날 저녁 버킹엄 궁전에서는 왕실 가족과 50개국의 군주를 비롯해 해외의 영국 식민지를 통치하는 고위 관료들이 참석한 호화로운 연회가 열렸다.
6월 21일, 덮개가 열린 사륜마차를 탄 여왕은 인도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행차한 뒤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왔다. 버킹엄 궁전 앞에 운집한 군중들은 궁전 발코니에서 모습을 드러낸 여왕을 향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날 저녁 연회에 참석한 여왕은 각국 외교관들과 인도의 라자들을 접견했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골든 주빌리 행사 때 여왕은 인도인 시종 두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중들도록 했고, 그 두 사람 중 하나인 압둘 카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진해 여왕에게 우르두어를 가르치고 집사 역할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당대의 관점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라 여왕의 주변에서는 카림을 악의적으로 비방했지만 여왕은 들은 척도 않고 그를 가까이에 두었다.

5.2. 다이아몬드 주빌리


[image]
1896년 9월 23일부로 당시까지 영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할아버지 조지 3세의 재위기간을 경신했다.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은 다음 해인 1897년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 때 이를 함께 기념해 대영제국과 여왕을 더욱 빛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897년에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에서는 영국 식민지 자치령의 모든 총리와 총독 들이 초대받았고, 거창한 행렬에는 영국 전역의 군대들도 참여했다.
1897년 6월 20일, 이날은 일요일이었기에 여왕은 윈저 성 내의 성 조지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다.
6월 21일에는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왔다.
공식 행사일인 6월 22일, 여왕의 행렬은 세인트 폴 대성당 야외에서 거행된 기념식에 이어 런던 남부와 국회의사당을 지나 버킹엄 궁전으로 돌아왔는데, 무개마차에 탑승한 노구의 여왕을 향해 수많은 인파가 축하와 환호를 아낌없이 보냈다. 이날 저녁 여왕은 '내가 거리를 지날 때마다 본,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열정과 환희로 가득한 모습에 진심으로 놀랍고 감동받았다'고 일기에 적었다. 버킹엄 궁전에서 열린 공식 만찬과 더불어 여왕의 며느리 알렉산드라 왕세자비는 런던의 빈민 40만명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행사를 베풀었다.
영국 역사상 처음 거행된 다이아몬드 주빌리는 여왕과 대영제국 모두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야외에서 거행된 기념식은 78세의 고령인 여왕에게는 무리여서 그로 인해 류마티스성 관절염이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2번째 다이아몬드 주빌리가 거행된 것은 115년 뒤인 2012년, 여왕의 현손녀인 엘리자베스 2세 때였다.
당시 조선에서도 이 기념식에 사절을 파견했는데, 그 주인공은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6개국 겸임공사였던 민영환이었다. 그는 1897년 3월 24일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서울을 출발해 나가사키, 상하이, 마카오,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 지중해에 도달했다. 여기서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흑해로 들어가 오데사에 상륙한 다음 기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국서를 바치고 열흘 동안 체류하다가 6월 1일런던으로 출발했다. 민영환 일행이 런던에 도착한 것은 6월 5일이었으며 6월 22일에 거행된 기념식에 참석하고 7월 17일에 귀국길에 올랐는데, 민영환은 이때의 노정을 <사구속초(使歐續草)>라는 여행기로 남겼다.
6월 26일에는 영국 해군의 대함대(Grand Fleet)가 관함식을 개최했다. 이때 선박 엔진의 역사를 바꾼 아주 유명한 난입 사고가 있었다. 증기터빈 항목 참고.

6. 개인사



6.1. 가족관계


[image]
빅토리아 여왕의 가족, 프란츠 하버 빈터할터, 1846년
(왼쪽부터) 차남 앨프레드[23][24], 장남 에드워드[25],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 차녀 앨리스, 3녀 헬레나[26], 장녀 빅토리아[27]
[image]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그리고 아홉 자녀들
[image]
빅토리아 여왕[28], 에드워드 7세[29], 에드워드 8세[30], 조지 5세[31] 4대.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조지 3세
(George III)
프레더릭 루이스 왕세자
(Frederick Lewis, Prince of Wales)[32]
작센고타의 공녀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공녀 샬럿
(Princess Charlotte of Mecklenburg-Strelitz)
메클렌부르크 공작
카를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Duke Charles Louis Frederick
of Mecklenburg)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의 공녀
엘리자베트 알베르티네
(Princess Elisabeth Albertine
of Saxe-Hildburghausen)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 and Saalfeld)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프리드리히
(Francis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Ernest Frederick,
Duke of Saxe-Coburg and Saalfeld)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공녀 조피
(Princess Sophia
of Brunswick-Wolfenbüttel)

로이스에보스도르프의 여백작
아우구스테 카롤리나
(Countess Augusta Carolina
of Reuss-Ebersdorf)

로이스에보스도르프 백작
하인리히 24세

(Henry XXIV, Count Reuss-Ebersdorf)
에어바흐쇤베르크의 여백작 카롤리나
(Countess Carolina of Erbach-Schönberg)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독일 제국의 빅토리아 황후
(Victoria, German Empress)
1840년 11월 21일
1901년 8월 5일
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
슬하 4남 4녀[33]
1남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1841년 11월 9일
1910년 5월 9일
덴마크의 알렉산드라[34]
슬하 3남 3녀[35]
2녀
헤센 대공국 대공비 앨리스
(Alice, Grand Duchess of Hesse)
1843년 4월 25일
1878년 12월 14일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슬하 2남 5녀[36]
2남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드
(Alfre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1844년 8월 6일
1900년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37]
슬하 1남 4녀[38]
3녀
헬레나 공주
(Princess Helena)
1846년 5월 25일
1923년 6월 9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공자 크리스티안
슬하 2남 2녀
4녀
아가일 공작부인 루이즈 공주
(Princess Louise, Duchess of Argyll)
1848년 3월 18일
1939년 12월 3일
제 9대 아가일 공작 존 캠벨
3남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Prince 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
1850년 5월 1일
1942년 1월 16일
프로이센루이제 마르가레타
슬하 1남 2녀[39]
4남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
1853년 4월 7일
1884년 3월 28일
발데크피르몬트헬레나[40]
슬하 1남 1녀[41]
5녀
베아트리스 공주
(Princess Beatrice)
1857년 4월 14일
1944년 10월 26일
바텐베르크의 헨리
슬하 3남 1녀[42]
앨버트 공 사이에서 4남 5녀를 낳았다.[43] 그 공주들이 당대 유럽 왕가들로 시집을 가서[44] 유럽의 많은 왕실[45]이 빅토리아 여왕의 피를 잇게 되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유럽할머니'''. 자녀가 9명에 손주는 42명이고 증손주는 85명에 달하니 결코 빈말이 아니다(…). 현재 영국[46] 왕실을 비롯하여 노르웨이[47], 스웨덴[48], 덴마크[49], 스페인[50] 국왕이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그리고 그녀의 혈우병 인자도 온 유럽의 왕실로 퍼졌다.(...)
자세한 사항은 빅토리아 여왕/가족관계 문서를 참조.

6.2. 남편과의 순애보


남편 앨버트 공과의 사랑이 널리 알려져 있다. 빅토리아가 발랄한 성격이었던 반면 앨버트는 과묵한 편으로 성격 차이가 컸지만 둘 사이의 유대감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했다고 한다. 둘 사이의 금슬은 무척 각별해 20년의 결혼생활 동안 무려 9명의 자녀를 낳았다. 결혼 기간의 반은 임신 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빅토리아는 앨버트 공의 머리카락이 담긴 장신구를 달고 다녔는데 이게 유행이 되어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해 머리카락을 담은 장신구를 다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앨버트 공이 장티푸스로 죽은 뒤[51] 빅토리아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 동안 남편을 기리는 의미로 매일 고인의 옷을 펼쳐놓고 언제나 검은 옷만을 입었다. 이 때문에 검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하얀 레이스를 얹은 모습이 빅토리아 여왕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굳어진다.
뿐만 아니라 여왕은 윈저 성에서 앨버트 공이 임종을 맞은 침실을 그대로 보존했으며 잠자리에 들 때도 앨버트 공이 생전에 입던 옷 등 유품을 곁에 놓았다고 한다
남편 앨버트 공의 죽음이 빅토리아 여왕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는 두 사람이 결혼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1세[52]에게 쓴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의 행복은 끝났습니다. 제게 이 세상은 없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앨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을 번쩍 들어서 집무실에서 침실로, 침실에서 집무실로 데려다 주었다는데 아무리 앨버트 공이 건장한 남자였다 해도 이건 분명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앨버트 공 사후 존 브라운이라는 하인이 이 역할을 대신했는데, 존 브라운이 앨버트 공의 외모를 닮기도 해서 잠깐 동안 스캔들이 퍼지기도 했다.[53]
두 사람 사이의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어느 날 둘이 부부싸움을 하고는 앨버트 공이 너무 화가 나 방에 틀어박혔다. 빅토리아 여왕이 노크를 하자 앨버트 공이 누구냐고 물었고, 빅토리아 여왕이 ''''영국의 여왕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여왕이 노크를 하고 ''''당신의 아내에요''''라고 대답하자 기쁘게 문을 열었다고 한다.

7. 사망


[image]
[image]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 행렬
[image]
프로그모어 영묘에 있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석관

군인들의 행군 소리, 쇼팽장송곡과 드럼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든 영국인들이 부모를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느 런던 시민, 여왕의 장례식에서

여왕은 어린 시절인 1835년과 이후 1871년에 크게 앓아누웠던 것을 제외하고는 건강한 편이었다. 다만 무릎이 약한 편으로 1883년, 1892년의 무릎 부상을 당한 뒤에 더욱 심해졌다. 1894년부터는 치아까지 빠져버려 틀니를 착용했으며 1898년 백내장이 발병하고[54] 나서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빅토리아는 군대 사열식, 가든 파티 등 여왕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했으나 1900년복벽 탈장자궁탈출증을 겪는 등 크게 쇠약해졌다. 결국 1901년 1월 22일 오후 6시 30분 서거 시점을 기준으로 영국 역사상 가장 긴 64년 동안 재위한 빅토리아 여왕은 81세를 일기로 와이트 섬의 오스본 하우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윈저 대공원(Windsor Great Park)의 프로그모어 영묘(Frogmore Mausoleum)로 운구된 여왕의 유해는 40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이에 따라 하노버 왕조는 그녀의 대에 이르러 단절되고 이후 영국의 왕조는 부군 앨버트 대공의 가문인 독일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이어진다.

8. 평가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산업, 군사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변혁이 있었던 여왕의 64년 치세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로 불리며 고전적이면서 보수적인 도덕주의, 엄숙주의와 더불어 허영과 위선 같은 상반된 면모가 병존한 시대로 기억된다.
이전 국왕들과는 달리 사생활에서 매우 엄격한 도덕주의를 추구한 여왕의 영향으로, 귀족 부인이 누군가와 스캔들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 그 여성은 살롱에 출입할 수 없었고 남성 귀족들은 자신의 정부가정부라 속였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만 그런 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할 거 다 하면서도 그걸 드러내지 않고 더욱 은밀하게 숨긴, 속되게 표현하면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깐'''' 시대였다.

즉, 귀국에서 가져간 부는 모두 중국인의 정당한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권리로 중국인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고의로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것이 아닐지언정, 탐욕스럽게 이득을 갈구하는 그들은 타인을 해친다 하여도 상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폐하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임칙서가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의 일부.[55]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국제적으로 최전성기를 누렸으나 그것은 다시 말해 아시아, 아프리카제3세계의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영국에 의해 고통받았음을 의미한다.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수많은 국가들의 국민들은 나라를 잃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또한 산업혁명의 여파로 극심한 가난과 고된 노동 속에서 고통받던 노동자들이 뭉친 차티스트 운동의 전성기도 빅토리아 시대였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참정권, 선거권을 요구했으나 군홧발에 짓밟혔다. 그래도 노동자들의 요구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었고 결국 노동자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는 남성에 한해서였고 여성이 선거권을 가지게 되는 건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가야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여성임에도 정작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산업 및 기술 또한 이 시대에 발전했지만, 이후 영국 자동차 산업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는 적기조례가 제정되기도 하였다.

9. 이야깃거리


"We are not amused(짐은 즐겁지 않느니라)"[56]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 설이 유명한데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 영국 드라마 닥터후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직접 만난 로즈 타일러가 계속 이 말을 유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어머니였던 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에게 모유수유를 받았다. 당시 상류층이 유모를 고용하던 관습을 생각하면,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모유수유에 부정적이었으며 딸들이 아기들에게 모유를 주자 딸들이 젖소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혈우병 보인자. 이로 인해 유럽 왕실들이 꽤 골치를 앓았는데 가장 유명한 곳이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 하필이면 니콜라이 2세외아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혈우병 환자였고, 이 때문에 그리고리 라스푸틴 같은 놈이 등용되어 득세했고, 그래서 러시아는 [[러시아 혁명|혁][57]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서 유전병 관련해 자주 언급된다(…). 여왕의 부모와 남편 모두 혈우병 보인자가 아니어서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불륜을 저지른 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돌연변이로 보고 있다.[58] 여왕의 자식들 중 차녀 앨리스와 4남 레오폴드, 5녀 베아트리스가 혈우병을 물려받았다.
나폴레옹 3세를 남편인 앨버트 공 다음으로 매력적인 남자라고 평한 바 있다.
1832년부터 죽기 열흘 전까지 일기를 빼놓지 않고 썼는데 2번에 걸쳐 이를 출판하기도 했다. 지근거리에서 비서 역할을 하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는 여왕 타계 이후 일기의 내용을 편집하면서 어머니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적인 부분은 따로 골라내 남김 없이 불태워버렸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일기의 양은 꽤 많은 편. 2012년 5월 24일, 영국 왕실이 여왕 탄생 193주년을 맞아 여왕이 생전에 쓴 개인일기 전량에 대한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빅토리아 여왕 일대기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1838년에 토머스 에드워드 존스라는 14세 소년이 버킹엄 궁전에 몰래 들어와 여왕의 편지나 팬티(...) 등을 훔쳐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넣어서 빠져나가다 들키는 소란이 있기도 했으나, 놀랍게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래서인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 소년은 1840년에도 두 차례나 왕궁에 침입했다. 심지어 첫 침입에서는 들키지도 않고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으나, 둘째 침입에서 여왕의 탈의실 소파 밑에 숨어있다가(...) 여왕의 유모 레첸 여남작에게 들켜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소년의 아버지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긴 했으나, 놀랍게도 그 내용은 고작 소년원 3개월(...).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린 이 소년은 소년원에서 출소한 지 2주도 안 되어 1841년에 왕족 주거지에 또 침입했다가 징역 3개월의 처분을 받고 복역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출입금지 상태가 된 버킹엄 궁전에서 배회하다가 해군에 강제 입대되어 복역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노년에는 호주로 건너가 퍼스의 포고자(Town Crier)로 일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중병을 앓다가 낫게 해준 의사가 내린 건강 지침을 평생 동안 철칙으로 삼았는데 그건 바로 '''춥게 지낼 것'''. 따뜻함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지만 추위는 정신을 맑게 하고 긴장감을 유지시켜 사람을 최적의 상태로 만든다는 조언을 충실히 지켰는데 문제는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건 다반사요, 비바람이 불 때 산책하길 좋아한 것이다. 물론 여왕 본인은 80살 넘게 건강했지만 여왕을 모시는 주변 사람들의 건강에는 이상이 생겼다(…). 특히 언제나 여왕 곁에서 지내며 시중들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는 급기야 30대에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려 따뜻한 지방으로 요양갔는데, 그녀 없이는 못 산다던 여왕은 '''따뜻한 곳에 같이 가는 게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베아트리스 공주의 요양을 허락했다(…).
미식가였던 것으로 유명해 처음에는 궁정 요리사로 프랑스 요리사를 고용했고 인도 여제가 된 후에는 인도인 요리사도 데려와 영국에 인도 요리를 정착시켰다.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어간 군주라서 그런지 영국 연방의 도시들 중 상당수가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라 명명했다.
2011년 11월 1일 에든버러에서 열린 경매에서 여왕이 말년에 사용한 비단속옷이 9,735파운드에 낙찰되었다.#
[image]
열강이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풍자화에서 외손자인 빌헬름 2세[59] , 그리고 외손녀사위인 니콜라이 2세[60]와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대립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61] 그리고 빅토리아 여왕의 맏며느리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여동생이 바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표도로브나이기도 하여(즉 에드워드 7세는 니콜라이 2세의 이모부.) 니콜라이 2세는 외가 쪽으로 영국 왕실과 엮이기도 한다. 즉 에드워드 7세 입장에서 저 그림을 보자면 어머니, 생질(甥姪, 누이의 아들), 이질(姨姪, 처제의 아들) 겸 질서(姪壻, 조카딸의 남편)가 서로 중국을 두고 싸우는 꼴....(...)

10. 미디어 매체의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시대가 영국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을 상징하다 보니 '산업화가 왕성하게 일어나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고, 제국주의적 팽창이 미화되고, 상류층과 하류층의 격차가 뚜렷하고, 사회 분위기가 어딘가 어두우면서 엄숙한데 여왕이 다스리는 시대'라는 서브컬처 내의 묘사가 있으면 십중팔구는 빅토리아 시대를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전적한 가구 및 벽지와 함께하는 마차와 증기 기관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상징이자 아이덴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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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빅토리아. 남편인 앨버트 공과의 사랑과 결혼을 중심으로 그의 즉위 전~즉위 후의 삶을 영화화했다. 에밀리 블런트 주연.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바로 전부터 신혼초까지를 다룬 영화. 호화스런 의상과 배경이 아름다운 영화이다. 고증은 상당히 잘 되어있는데 일부 세부묘사와 엔딩이 실제와 좀 다르다. 영화에서 앨버트 공이 빅토리아 여왕과 마차를 타고 가는 과정에서 앨버트 공이 괴한의 총에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앨버트 공은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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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스 브라운. 앨버트 공 사망 후 우울에 빠졌던 빅토리아가 시종 존 브라운과의 교감을 통해 우울에서 벗어난다는 내용. 주디 덴치 경 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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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 압둘. 2017년 작. 역시 주디 덴치 경이 빅토리아 여왕 역을 맡았으며, 여왕과 인도인 시종 간의 인간적 교감을 다룬 내용인데 보면 압둘로 인해 태자와 공주들과 친척들 그리고 정부인사들과 하인 하녀들이 두 사람의 친근함을 당연히 못마땅해 하며 이후 인도식으로 저택을 꾸미고 지방 별장으로 데려가는 등의 행보를 보이자 여왕에게 대놓고 압둘의 민족과 출신을 내세워서 내칠려고 하는 등 적나라하게 나오며 이런 일이 지속되자 잠시 멀어지기도 하나 결국 다시 친하게 지내고 이후에도 주변 사람들이 계속 방해하다가 아들이 '''엄마 계속 이러시면 정신문제로 삼을수 있다는 패드립을 치자 여왕도 자신의 위치를 말하고 너도 확실히 치워버릴 수 있다라고''' 말하자 아들이 쫄아버리는 등 확실하게 화를 내면서 기싸움을 하는 등 과거 미세스 브라운의 빅토리아 여왕을 맡은 주디 덴치의 또 다른 빅토리아 여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북미에선 사실 좀비 헌터였다(…)는 내용의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뱀파이어 헌터의 아류.
위대한 쇼맨에서도 바넘 일행이 버킹엄 궁전을 방문하였을 때 잠깐 출연한다.
흑집사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이 여왕 시기다. 애니 1기에서는 그 부분이 더욱 부각되었고. 타락천사인 애쉬에게 농락당하는 안습인 인물. 하지만 새로 제작된 3기에서는 원작 기준으로 갈 것으로 보여서 안습함은 조금 줄 듯. 원작에서는 사람 좋은 할머니로 보이지만 노회한 면도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62]
어쌔신 크리드: 신디케이트의 주 시대이기도 하고 직접 등장한다고 한다. 제이콥 프라이가 트레일러에서 자본가들이 빅토리아 여왕의 재산보다 더 많은 돈을 숨겨두었다고 까기도 했으니.
파라독스의 전략 게임 빅토리아 시리즈는 제국주의가 만연했던 1836년부터 1936년까지의 시대를 나타내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게임의 이름이 이 항목의 인물을 담고 있다.
죽은 자의 제국의 시대적 배경인데, 여기서는 시체를 되살려내 살아있는 인간 대신 노동자나 군인으로 이용함으로써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부각되지 않았지만 소설에서는 시체를 죽은 자로 소생시킬 때 남성만을 사용한다. 여성을 이용한 죽은 자가 금기시된 이유는 대영제국의 최고권력자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 즉,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H. 왓슨봄베이에서 여성인 죽은 자를 보고 크게 놀라기도 한다.
영국 ITV 방송국에서 제나 콜먼 주연으로 여왕의 젊은 시절을 다룬 드라마 '빅토리아'를 방영 했다. 참고로 제나 콜먼은 닥터후에서 클라라 오스왈드 역을 맡은 적 있는 배우인데, 아래 문단에서 나오는 닥터후와 빅토리아의 연관을 생각하면 재미 있는 우연이다.[63]
문명 시리즈에서는 4와 6에서 영국 문명 지도자로 등장한다.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주인공의 대단한 행동들로 인하여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변했으며 그 결과로 살아생전에 세계대전을 보게 생겼다.
도미네이션즈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브로치가 유물로 등장한다.
TRPG 메이지 디 어센션에서는 오더 오브 리즌의 수장이자, 오더 오브 리즌을 현대의 테크노크라시로 재구성한 위대한 테크노크라트로 묘사된다.
Fallen London에서는 알버트 공을 되살리기 위해 런던을 심연의 존재에게 바쳐 런던이 심연으로 떨어지게 한 장본인이다. 그래서 게임 내 현재에서는 배신자 여제(Traitor Empress)라 불린다. 이후 Sunless Sea에서 심연에 박혀있었던 런던은 빅토리아 여왕의 지도하에 떠올려져 Sunless Skies 시점에서는 천상의 도시가 된다.
레이디 디텍티브의 배경이 빅토리아 시대인덕에 본작에서도 직접 등장한다. 여기서는 남주인공이자 히로인(?)인 에드윈의 인생 멘토로 활약한다. 본인보다 높은 신분의 아내였던 빅토리아 여왕을 내조했던 남편 앨버트 공과 비슷한 처지인 에드윈에게 인생선배로써 조언해주는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이렇게 에드윈을 각별히 여기는 이유는 남편 앨버트 공의 유일한 절친의 양자가 바로 에드윈이였기 때문. 게다가 에드윈은 과거 앨버트 공의 후원도 받으면서 자랐기에, 그에게서 사랑했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인간적 면모도 보여준다. 또한 앨버트 공과 비슷한 처지 때문에 불안에 떨던 에드윈에게 약혼자 리지가 얼마나 에드윈을 의지하고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등, 그의 멘토를 자처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10.1. 닥터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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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영국SF 드라마(영드) 닥터후뉴 시즌 2 에피소드 2 <Tooth & Claw>에 등장한다. 여행을 하던 도중 닥터로즈 타일러를 만나 철로가 막히는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근처의 토치우드 저택에서 묵게 되고, 그 날 밤 거기에 늑대인간들이 나타나 위기에 빠지지만 10대 닥터와 로즈로 인해 그 사태를 겨우 피한다. 하지만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하려는 두 사람이 마치 이 사태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면서 두 사람을 쫓아내고는 외계의 위협으로부터 대영제국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토치우드 연구소를 설립한다.
이때 몸에 상처를 입는데, 이것이 늑대인간에게 물린 것인지 그냥 어딘가에 긁힌 것인지 애매하게 떡밥을 남긴다. 닥터는 '빅토리아의 혈우병이 너무 갑작스럽게 생긴 걸 보면 그녀의 가족과 후손들에게 발병한 혈우병도 사실 빅토리아가 그들을 물어서 늑대인간으로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그런데 위에서도 말했지만, 빅토리아는 영국에서 나름대로 위인 대접을 받는 왕인데 이거 영국 드라마다(...).[64]
해당 에피소드에서 빅토리아 여왕 역을 맡은 배우 폴린 콜린스(Pauline Collins)는 닥터후 올드 시즌에서 '''아역'''으로 등장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최장기 방영 드라마의 위엄. 이후 뉴 시즌 10 에피소드 9 <화성의 여제(The Empress of Mars)>에서 화성에 간 영국군이 챙겨간 초상화로 등장하는데, 이 초상화 역시 폴린 콜린스를 모델로 했다.

[1] 어머니의 첫 남편 라이닝겐의 공자 에미히 카를의 소생 이부오빠[2] 어머니의 첫 남편 라이닝겐의 공자 에미히 카를의 소생 이부언니[3] 대영제국을 선두로 하여 여러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기술발전이 절정에 달했던 이 시절을 아예 빅토리아 시대라 일컫기도 한다.[4] 노르만공 윌리엄의 도래 이래로 치면 스티븐, , , 빅토리아.[5] 이 중 존은 암군 중에 그런 암군이 없는지라 일부러 피하는 것이다.[6] 상기 두 개는 하노버 왕국의 공주이자 왕족으로서 받은 것.[7] 상기 두 개는 작센코부르크고타의 귀족인 앨버트 공의 부인으로서 받은 것.[8] 1794년에 태어난 아들, 1801년에 태어난 딸이 있었으나 모두 서자였다.[9] 2남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왕자는 자식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제외되었다.[10] 이 서자의 후손 중 1명이 데이비드 캐머런이다.[11] 콘로이를 지나치게 믿고 의존했던 공작부인은 후에 콘로이가 횡령을 저지른 사실 등을 뒤늦게 알자 잘못을 깨닫고 딸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12] 윌리엄 램(1779 ~ 1848), 캐롤라인 램의 남편[13] 제2대 멜버른 자작으로, 이름은 윌리엄 램이다. 27대, 30대 총리였다.[14] 여왕이 앨버트 공 사후, 딸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에게 보낸 편지에 "앨버트에게 모든 것을 의존했다. 그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사진이나 서류도 정리하지 않았고,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드레스를 입지도, 보닛을 쓰지도 않았다."고 적었다.[15] 맨 위의 대관식 초상화에서 쓰고 있는 것.[16] 만평의 캡션에 "헌 왕관을 새것으로 바꿔드립니다!"(New crowns for old ones!)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써있기야 그렇지만 실제로는 '''바꾼''' 게 아니라 새로운 관을 '''추가한''' 것임에 유의.[17] 아래에 나온 것처럼 2017년에 영화화되기도 했다.[18] 이렇게 유럽 국왕에게 비유럽 지역 식민지의 전통적인 황제 칭호를 부여해 격을 높이는 방식은 나중에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가 따라했다. 무솔리니 시기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제국을 침공했을 때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에티오피아 황제의 칭호를 바친 것. 하지만 국제사회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지배를 인정하지 않아 대부분의 국가들은 그 황제 칭호를 인정해주진 않았다(…).[19] 알다시피 영어에서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어에서) 남성 군주의 배우자와 여성 군주의 칭호 형태는 동일하다. 즉, 여제와 황후의 표현이 동일한 것. 물론 굳이 구분을 하자면 Empress '''Consort'''라고 배우자임을 나타내주면 구분을 할 수 있긴 하다.[20] 연합왕국(United Kingdom)은 본토에 한정해 쓰는 표현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 본토뿐만 아니라 본토 외 속령까지 아울러 부르던 명칭이 바로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다. 한국에선 양자를 많이 혼동하지만 실제론 구별해야 하는 표현이다.[21] 포르투갈령이었던 고아(Goa), 프랑스령이었던 퐁디셰리처럼 예외가 있긴 했다.[22] 빅토리아 황후의 장녀 샤를로테의 딸이다.[23] 애칭은 애피.[24] 치마를 입고 있는 이유는 당시엔 남자아이도 어릴 적에는 여자아이처럼 꾸미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25] 애칭은 버티.[26] 애칭은 렌첸[27] 애칭은 비키.[28] 증손자 에드워드 8세를 안고있다[29] 오른쪽 위[30] 빅토리아 여왕이 안고 있다.[31] 왼쪽 위[32] 조지 2세의 장남이다.[33] 빌헬름 2세, 그리스의 소피아 왕비[34]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이다.[35] 클래런스 공작 앨버트 빅터 왕자, 조지 5세, 노르웨이의 모드 왕비[36] 밀퍼드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 러시아 제국 대공비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러시아 제국의 알릭스 황후[37] 알렉산드르 2세의 차녀이다.[38] 루마니아마리 왕비[39] 스웨덴마거릿 왕세자비[40] 헬레나가 네덜란드빌헬미나 여왕의 이모이다.[41]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42] 스페인의 빅토리아 유제니 왕비 등[43] 빅토리아 여왕은 아이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남편인 앨버트 공이 자식을 많이 갖기를 원했고, 남편이 원하는 거면 뭐든지 다 들어주고 싶은 빅토리아가 적극적으로 호응(?)해주면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낳게 된 것. 심지어 계속된 임신&출산 스트레스로 여왕의 과격한 성격이 갈수록 심해지자 주치의들이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를 권유했지만 빅토리아 부부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44] 여왕은 딸들을 외국 왕실로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장녀 빅토리아와 차녀 앨리스는 남편 앨버트 공의 의사가 워낙 강해서(앨버트 공은 평생동안 고향 땅 독일을 사랑하고 그리워했으며 독일의 통합을 꿈꾸었다.) 설득당했다고 한다. 3녀 이후로는 사위들에게 '''영국에서 평생 살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근데 장녀 빅토리아와 차녀 앨리스가 정말 많은 자식을 낳은 데다 그 자식들이 또다른 왕실과 통혼을 하면서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은 전유럽의 왕실로 퍼져나갔다.[45] 군소 공국을 제외하고 왕실만으로 따져도 독일,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노르웨이, 스웨덴, 러시아, 덴마크, 스페인에 이른다.[46] 장남 에드워드 7세의 차남 조지 5세의 친손녀가 엘리자베스 2세[47] 장남 에드워드 7세의 3녀 모드 공주의 손자가 하랄 5세[48] 3남 아서 왕자의 장녀 마거릿 공주의 손자가 칼 16세 구스타프[49] 3남 아서 왕자의 장녀 마거릿 공주의 손녀가 마르그레테 2세[50] 5녀 베아트리스 공주의 장녀 빅토리아 유제니의 증손자가 펠리페 6세[51] 아들 에드워드 7세 때문에 공이 42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는 설도 있다. 나이 20살이 되도록 주색잡기에 빠져 살던 큰아들 에드워드가 여왕과 다툰 후 가출하듯 별장으로 떠나고 앨버트 공이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무리하게 따라나섰다가 비를 맞아 폐렴에 걸려 죽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왕은 큰아들 에드워드를 죽는 순간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한다.[52] 빅토리아에겐 외가 쪽으로, 앨버트 공에겐 친가 쪽으로 숙부가 되는 인물. 빅토리아의 사촌언니가 되는 조지 4세의 딸 샬럿 공주의 남편이기도 하다.[53]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의 관 안에 존 브라운의 사진을 넣었고, 그녀의 손에 브라운 어머니의 반지를 끼웠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는 앨버트 공을 잃었을 때만큼 고통스럽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54] 여왕은 조명이 어둡기 때문이란 핑계를 대며 시력 저하를 인정하지 않았다.[55] 이 편지는 1840년 1월에 영국에 도착했으나, 영국 정부는 이 편지를 정식 외교문서로 인정하지 않았다.[56] 번역이 틀린 게 아니라 유럽에서 왕과 교황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지칭한다. 이를 장엄복수형이라고 하며 유럽권에서 일반적이다.[57] 물론 러시아 혁명이 오로지 라스푸틴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역사가 그 방향으로 흘러가게끔 한 여러 개의 톱니바퀴 중 하나 정도로 볼 수 있을 듯.[58] 학설에 따르면 아버지의 나이가 많을 때 태어난 딸에겐 돌연변이로 혈우병 인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버지가 50대일 때 태어난 늦둥이다. 영화나 게임의 영향 때문에 돌연변이라면 몸에 눈이 여러개 달려있거나 괴물같은 힘, 이상한 초능력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일반적으로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그냥 그 유전자가 생산하는 단백질이 기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즉 혈우병 인자가 생긴다는 게 없는 인자가 생겨나는 게 아니고, 혈액응고 관련 단백질을 생산하는 유전자 중 하나에 돌연변이가 생겨 기능을 잃은 것. 나이가 많아질수록 유전체를 복제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복제되지 않고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 일례로 다운 증후군의 경우 산모 나이 40대 이상의 노산에서 발병률이 급격히 치솟는다.[59] 장녀이자 프린세스 로열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자의 장남이다.[60]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의 4녀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남편이다.[61] 또한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와는 서로 7촌 지간이기도 하며 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던 사이이기도 하다.[62] 실제 역사속에서도 훈훈한 할머니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치와 외교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모습도 보여주긴 했다.[63] 여담으로 닥터후에서 11대 닥터 역으로 제나 콜먼과 호흡을 맞춘 맷 스미스는 다른 드라마에서 빅토리아의 현손녀의 남편이자 역시 빅토리아의 후손이기도 한 필립 마운트배튼 역을 맡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64]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대충 '정조대왕이 사실 도깨비였다' 같은 내용이라는 얘기다(...). 왕실과 역사적 인물 놀려먹기에 대한 거부감이 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면모를 잘 보여주는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