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트리

 


'''Gentry'''
1. 개요
2. 역사적 맥락
2.1. 영국 귀족의 특성, 장남에게만 전해짐
2.2. 둘째부터 젠트리화됨
2.3. 장미 전쟁: 급격한 귀족 수의 감소
2.4. 젠트리의 두각
2.5. 그럼에도 젠트리 주류는 지방 대토지 지주
2.6. 자본가화
3. 정리
4. 관련 문서


1. 개요


잉글랜드의 사회 계급 중 하나. 귀족은 아니나 사회 지배계층이다. Gentleman의 어원. 흔히 자작농, 부농 상공업자로 오해하나 이는 요먼이라는 계층에 해당하고,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인용된 캠브리지 옥스퍼드 사전의 정의대로 '''"well-born, genteel and well-bred people" of high social class'''로서 절대로 중간 계층이 아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 때 잉글랜드 전역에 봉한 노르만족 대귀족 아래에 있던 가신계급들이며 대귀족 밑에서 다시 영지 규모에 따라 준남작(baronet), 기사(Knight), 향사(Esquire), 신사(Gentleman) 등으로 분류되었다.
중세가 끝나고 상위 귀족들이 장미 전쟁으로 서로 죽이는 통에 숫자가 급감하고 흑사병의 창궐과 백년전쟁이라는 장기간 정쟁을 통해 사회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자 점차 토지를 독식하여 대지주로 전환하고 사회 영향력을 넓혀갔다. 명청시대 중국의 신사(紳士). 일본사족(士族), 조선양반 계급과 비슷하다. 사실 '신사'로 번역한 것도 Gentleman의 번역을 중국 지방 사족계층인 신사와 의미가 통한다고 봐서 그리 번역한 것이다.

2. 역사적 맥락



2.1. 영국 귀족의 특성, 장남에게만 전해짐


젠트리 계층을 설명하기 위해선 대륙과 다른 잉글랜드 특유의 귀족 제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대륙의 경우, 대표적으로 독일은 귀족의 자식이면 모두 귀족이고 차남이나 딸도 신분에 맞는 결혼을 하면 그 후손은 모두 작위가 있건 없건 귀족이었다.[1] 이와 달리 영국에서는 작위를 가져야만 귀족이고, 그 귀족 지위는 장남만이 물려받을 수 있다. 차남 이하는 평민이고 그 후손들 또한 평민이 된다. 물론 귀족의 자제는 일대귀족이라 하여 귀족급 대우를 해주기는 한다. 귀족의 차남 이하는 물론, 작위를 물려받을 장남조차 타이틀 보유자인 아버지나 조부가 살아있다면 후계자는 본 작위를 가진 아버지의 하위 타이틀로 귀족처럼 부르지만(예를 들어 노퍽 공작의 장남은 아룬델 백작[2]) 법률적 신분은 평민과 같다. 말하자면 xx공작 아들, xx백작 딸 정도.[3] 즉 잉글랜드 내의 특권 귀족은 현직 작위를 가진 불과 수십명이고, 많아봤자 수백 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2.2. 둘째부터 젠트리화됨


귀족의 자제지만 작위가 없는 차남 이하의 후손들은 3대째가 되면 자연스레 젠트리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말버러 공작의 손자 윈스턴 처칠이 예인데 처칠의 아버지는 공작의 삼남이라 당대에만 일대귀족으로 대우받고, 윈스턴 처칠은 자연스레 젠트리(평민)가 되었다. 따라서 공작가의 손자이며 아버지가 재무장관을 지내고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33세에 장관을 맡는 금수저가 겨우 평민(?)으로 분류될 정도로 젠트리를 단순 상공인이나 부농으로 오해하는 것은 상당히 사실과 거리가 멀다.
또 다른 예로는 앤 불린의 불린 가문을 들 수 있다. 앤의 할아버지 윌리엄 불린은 부유한 상공인으로 젠트리에 속하였는데 아들 토머스 불린이 당시 영국의 유일한 공작 가문 토머스 하워드의 여동생과 결혼하였고,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며, 앤 불린이 왕비가 되자 백작 작위를 수여 받았다. 그러므로 젠트리들은 귀족과 통혼이 가능한 명문가이지 단순히 중간 계급이라고 분류하긴 어렵다는 것.
중세 시절 기사에스콰이어귀족으로서의 지위는 없으나, 가문의 휘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 받은 계층들은 지방에서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대체로 연수입 20파운드가 넘는 지주[4]라야 젠트리 계층으로 포함되었다. 훗날 사회상이 변하면서 도시의 유력계층이라 할 수 있는 상공인, 교수, 법률가 등도 출세하여 의회에 진입하며 젠트리화되었고, 기존 지방 대토지 소유 젠트리의 인적구성이 변모했다고 보면 된다.

2.3. 장미 전쟁: 급격한 귀족 수의 감소


이처럼 잉글랜드는 특유의 귀족 제도 때문에 귀족의 수가 매우 적었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전술한 대로 장미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잉글랜드 귀족 전체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혈통인 랭커스터 가문요크 가문의 편으로 찢어져 서로 싸웠다. 일시적으로 이기면 숙청하고, 다시 반격해서 쫓아내고 하는 통에 장미 전쟁이 끝나고 헨리 7세가 귀족을 소집했을 때는 29개 가문밖에 남지 않았다. 헨리 8세 시절에도 귀족 작위 중 가장 높은 공작급은 왕족이 아닌 경우 달랑 하나만 남았었고(하워드 가문 노퍽 공작가)[5], 공후백자남 중에 끄트머리 귀족이라 할 남작 가문 30여 개 합쳐서 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작위 가진 귀족은 50개 가문밖에 남지 않은 것.

2.4. 젠트리의 두각


그렇기 때문에 유럽 대륙과 달리 귀족 계층 대신 사회 지배계층이라 할 수 있는 젠트리가 튜더 왕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대륙의 프랑스처럼 귀족부르주아의 갈등으로 혁명이 일어나지도 않았고(귀족 쪽수가 달려서 밟는게 불가능했다. 아예 싸워 볼 만한 체급부터가 안되니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은 것.)[6] 독일처럼 부르주아들이 합법적으로 귀족 작위를 사서 편입되는 형태도 아니었다. 이렇게 잉글랜드는 젠트리가 주도하는 형태의 정치 형태로 발전한다.
튜더 왕조헨리 8세가 주도한 종교 개혁 당시, 영국가톨릭 교회와 수도원이 가지고 있던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여 매각하자 이를 헐값으로 얻은 젠트리 계층이 종교개혁을 지지했으며, 젠트리는 이를 통해 크게 성장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미 그 전부터 젠트리 계층은 대륙의 귀족처럼 사회 지도계층이었다.''' 국유 자산을 매입할 수 있는 재력이나 권력은 극소수의 전통 귀족을 제외하면 나머지 젠트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 중에 신흥 상공업자가 성장하여 젠트리 계층에 편입된 경우가 있다. 상대적으로 런던 시내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젠트리 집단이 대륙의 복음주의 신학에 공감했다고 보면 된다.

2.5. 그럼에도 젠트리 주류는 지방 대토지 지주


훗날 청교도 혁명올리버 크롬웰은 젠트리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상인이나 법률가로 올라선 중산계급이 젠트리화되기도 했다. 인클로저 운동의 주체도 바로 이들이다. '''그러나 젠트리 계층의 대다수는 시골에 일정규모 이상 토지를 보유한 지주들이었다.''' 대도시의 지식인 계층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아서 군 장교[7], 치안판사, 성직자, 교수, 상공인이 되어 정치적으로 의회 권력에 진입한 것이지 일개 미천한 상인들이 런던 시내에서 장사하다가 벼락출세한 케이스는 상대적으로 소수다. 이는 영국 내전과 청교도 혁명기에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의회 대다수를 차지한 젠트리들은 대부분 보수적인 시골 지주들이었다. 젠트리는 종교 개혁을 열렬히 지지한 걸로 알려져 있으나 꼭 그런 것은 아니고, 가톨릭을 고수한 젠트리도 상당수였다. 종교에 열성적이지 않은 대다수의 무리들은 영국 국교회로 편입된다.

2.6. 자본가화


대륙 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청교도는 젠트리 중 소수였다. 그렇지만 런던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였고, 이들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는 게 권력과 가까운 법률가, 신학자, 교수, 군인, 상공인들은 튜더 왕조 시절 권력의 상층부에 편입되면서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완전히 주도권을 잡은 데다가 사상적으로 대륙 개혁신학 사상으로 무장하여 17세기부터 스튜어트 왕가와 심한 갈등을 겪게 된다. 이 부분부터는 청교도 문서를 참조. 이후 이들은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상공업에 종사하여, 부를 쌓은 젠트리들은 자연스럽게 자본가로 전환하게 된다. 이 기점을 중점으로 젠트리 계층의 계념이 명문가 출신 사람에서 그냥 영국판 부르주아가 된다.

3. 정리


앞서 서술한 대로 젠트리=영국 지배층이었다. 비록 신흥계층들이 포함되었다 해도 극소수의 귀족 가문을 제외하면 사실상 다른 나라의 지방 귀족 내지 기득권에 해당하며 중국 명청시대의 향신(신사), 조선의 양반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전부터 젠트리들이 간간이 줄을 잘서거나 군공을 세우거나 왕실의 친인척이 되거나 하는 식으로 귀족으로 신분 상승은 있어왔는데 제임스 1세 시절에는 연 수입 50 파운드 이상의 젠트리들은 강제로 제임스 왕의 충실한 신하임을 증명(?)하기 위해 명예로운(?) 준남작 작위를 사야 했다. 그러니깐 이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세금 뜯으려고 강제 구입...[8] 영국의 제도적 특성상 귀족은 아니나 지배층이었다. 쉽게 말해서 이들은 은수저가 아니라 금수저라는 것.

4. 관련 문서


  • 영국
  • 봉건제도
  • 맨앳암즈
  • 요먼
  • 젠틀맨
  • 엠마[9]
  • 다운튼 애비[10]

[1] 이는 프랑스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의 경우는 한술 더 떠서 공작의 아들은 전부 공작, 백작의 아들은 모두 백작이다. 레프 톨스토이만 하더라도 넷째아들이었지만 역시 백작이었다.[2] 아룬델 백작이 서리 백작보다 유서가 깊은 작위이다. 영국에서 현존하는 최고의 백작 작위로 잉글랜드 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즈에 더 유서 깊은 작위가 있더라도 잉글랜드의 귀족이 우선순위이다.[3] 귀족의 경우 기소되어도 귀족 재판소에서만 재판 받고 배심원들은 전부 귀족이 선정된다.[4] 요먼 같은 경우는 연수입 2파운드 이상이어야 했다.[5] 그나마도 토머스 하워드의 장자 서리 백작은 처형당하고 손자 토마스 하워드도 처형...되나 기적적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6] 다만 프랑스 혁명 당시의 프랑스 귀족들도 전통귀족들이라기보단 군대나 성직, 재력으로 일어선 신흥귀족이 대다수였다. 이들이 기득권 강화를 위해 사다리 걷어차기를 시전하면서 부르주아들이 반발했던 것.[7] 크롬웰만 하더라도 자기 재산으로 잉글랜드 내전기에 기병연대를 유지하는데 이는 어지간한 재력으론 불가하다.[8] 진짜로 안 사면 더 손해일 정도의 벌금을 때렸고, 찍히면 고등 재판소에서 꼬투리 잡아서 쳐넣었다.[9] 주인공 윌리엄 존스의 존스 가문은 지위는 낮지만 재력이 상당한 젠트리 집안으로 묘사된다.[10] 초반에 젠트리 출신 주인공이 백작가의 후계자가 되며, 귀족 가문의 전통을 배우며 벌이는 소소한 이야기의 드라마다. 사실 젠트리라고 하긴 좀 뭐한게 주인공과 백작가는 고조할아버지때부터 갈라져 나온거고 주인공도 부유하다기보다 그냥 변호사로 그냥 당시의 평범한 중산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 또한 귀족과는 좀 거리가 먼 직업이었다. 즉 그냥 조상님 중에 백작이 한분 계셨는데 운좋게 유일한 후계자가 되어버린 케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