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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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鞏/曾巩[1], 1019년 9월 30일 ~ 1083년 4월 30일
1. 개요
2. 생애
3. 업적
4. 여담


1. 개요


북송의 문장가. 자는 자고(子固),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별칭으로 남풍선생(南豐先生)이 있는데 이는 그의 고향이 건창(建昌, 현 장시성) 남풍현이었기 때문이다.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구양수(歐陽修)·소순(蘇洵)·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소철(蘇轍)과 더불어 당송팔대가로 불리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뛰어난 문인이었던 그의 친척들인 증조(曾肇)·증포(曾布)[2]·증우(曾紆)·증굉(曾紘)·증협(曾協)·증돈(曾敦)과 더불어 南豐七曾(남풍칠증)으로도 일컬어진다.

2. 생애


12세 때에 육론(六論)을 썼고, 1057년에 구양수가 주최한 과거에 형제지간인 소식, 소철과 함께 급제한 후 문풍(文風)을 일신하게 해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태평주(太平州) 사법참군(司法参軍)을 거쳐 중앙에 들어가 편고사관서적(編校史館書籍), 관각교감(館閣校勘), 집현교리(集賢校理), 영종실록검토관(英宗實錄檢討官) 등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다. 지방에 다시 나와서 월주(越州), 통주(通州)의 통판(通判), 제주(齊州), 양주(襄州), 홍주(洪州), 복주(福州), 명주(明州), 박주(亳州) 등의 지주를 역임했고 부임지마다 민중의 안녕과 행복 증진을 꾀하는 행정에 마음을 잘 써서 치적을 올렸다. 제주 지주로서 임기를 마치고 떠나려 할 때, 민중이 그 훌륭한 공적을 애석히 여겨 교량을 파괴한 채 증공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해서 밤을 틈 타 간신히 떠났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니...
이어 판삼반원사(判三班院事)로 재직할 적에, 국가의 재정이 근년에 들어 팽창하는 사태를 우려해 경비를 반드시 삭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송인종은 그 의견을 기꺼이 듣고서 "오조(五朝)의 치적은 증공의 판단이 옳다."라고 하면서 사관수찬(史館修撰)에 제수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갓 60세를 넘긴 참이었다. 1082년에 중서사인(中書舎人)을 맡고 1년 동안 근무하다 1083년 4월에 난징에서 죽었다.

3. 업적


서발(序跋), 잡기(雑記) 류에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대표적 저서로 고금의 전각(篆刻)을 모은 <금석록(金石錄)> 500권과 시문집 <원풍유고(元豊遺藁)> 50권, <융평집(隆平集)> 30권이 있다.
먼 혈통의 인척 관계에 있는 왕안석과는 1041년경에 직접 알게 된 이후 평생에 걸쳐 친하게 사귀었다. 다만 왕안석의 신법을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왕안석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그 반성을 재촉하기도 하였다.
산문의 경우 화려함은 부족하지만, 끈기 있고 결실한 의론(議論)의 전개가 특징으로, 청대의 고문가(古文家)인 요내(姚鼐)는 "증공(曾公)은 능히 그 단점으로 하는 곳을 피해 어기지 않는다."라고 평한 적이 있다.
당대 문인들 상당수가 그러했듯이 증공 역시 고전 연구에도 이바지하였는데, 현존하는 전국책 33편본이 바로 증공이 재교정한 고전으로, 일부 분실된 자료들을 사대부가에서 찾아 보정한 것이다. 증공의 재교정본은 전국책목록서(戰國策目錄序)라 불리기도 한다.

4. 여담


2016년 5월 15일에 현존하는 유일한 친필 작품인 <국사첩(局事帖)>이 개시가격 1억 3천만 위안으로 시작해 최종 1억 8천만 위안에 낙찰되었다. 커미션을 더한 가격은 2억 7백만 위안이다. #

[1] 참고로 현대 표준중국어 발음은 Zēng Gǒng이다.[2] 증공의 이복동생이다.